“좀 천천히 가더라도 가슴 뛰게 하는 일 찾으세요”

서울앤 2024. 4. 4.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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⑲ 서대문 구립 도서관에서 18년간 독서모임 강사로 활동하는 김은실씨

[서울&] [다시, 시작]

서대문구립 이진아기념도서관 독서모임 강사 김은실씨. 강정민 작가

성인이 되면 서점 차리고 싶었던 소녀

12년간 독박육아 뒤 독서지도사 돼

2005년 인연이 된 이진아기념도서관

‘휴게실 독서모임’ 하다 프로그램 맡아

강사료는 낮았지만 꾸준히 수업하자

도서관 밖서도 역사 강의 의뢰 들어와

수업하기 4개월 전부터 철저히 준비

매일 4시간 독서…“책은 위로·용서”

공공도서관에서 열리는 독서모임에 주민들의 반응이 뜨겁다. 참여자를 선착순으로 모집하는데 공고가 나자마자 마감된다. ‘서대문구립 이진아기념도서관’(이하 이진아도서관)의 독서 모임을 이끄는 강사는 김은실(55)씨다. 평범한 주부였던 김씨가 어떻게 인기 강사가 될 수 있었을까?

김씨는 어릴 적 책을 좋아해 성인이 되면 서점을 차리고 싶었다. 매주 독서토론을 하는 요즘 북카페 같은 공간 말이다. “고전을 좋아했는데, 고전을 읽으면 새로운 지혜와 통찰을 얻을 수 있어요. 저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굉장히 멋있었어요.”

김씨는 셋째가 세 살이 될 때까지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고 12년간 독박육아를 했다. 다시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여성발전센터에서 독서지도사 자격증을 땄다. 방과후에 초등학생과 중학생 독서 수업을 하고 동기들과 푸드코트 등을 돌며 독서모임을 가졌다. 2005년 가을 우연히 독립문에 갔다가 단풍이 떨어진 운치 있는 계단 길을 보았다. 계단을 오르니 다른 세상이 펼쳐졌고 거기에 적벽돌의 멋진 도서관이 서 있었다. 이진아도서관으로 홀린 듯이 들어서니 벽면에 이진아양의 앳된 얼굴과 짧은 글귀가 보였다.

서대문구립 이진아기념도서관 전경. 강정민 작가

‘19800915 서울에서 태어나다. 20030602 미국에서 영원한 나라로 가다. 20050915 별이 된 딸의 이름이 소중한 빛으로 영원히 남아 있기를 바라는 한 아버지의 간절한 사랑으로 서대문구립 이진아기념도서관이 건립되었습니다.’

김씨의 첫째와 진아양의 생일이 같았다. 두 아이가 겹치면서 김씨는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 이후 독서모임을 도서관 휴게실에서 했는데 이를 눈여겨본 당시 이정수 관장이 독서 프로그램을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다음해, 김씨를 포함한 세 사람이 초등학생, 중학생 그리고 성인 대상의 독서프로그램을 이끌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김씨만 남게 됐다. 공공도서관의 강사료가 들이는 품에 비해 턱없이 낮은 것이 그 이유였다. 당시 도서관은 새로운 강사를 발굴해 인문학 강좌를 진행했고 주민 반응은 뜨거웠다. 참여했던 강사인 ‘수유너머’ 고미숙씨와 철학자인 강신주씨도 인문학자로 이름을 알리게 됐다. 이진아도서관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 타 도서관의 모범이 됐다.

도서관 강사 3년차에 그는 성인 독서회 회원들에게 초등수업을 맡겼다. 독서 수업에 대한 반응이 좋아지면서, 도서관 밖에서도 역사 강의 의뢰가 들어왔다. 외부 강의의 강사료 덕분에 그는 안정적으로 수업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다. 또한 외부 강의를 위해 만든 역사프로그램을 도서관 안으로 들여왔다. 주로 사교육 시장에 존재하던 역사 강좌를 도서관에서도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야 이진아도서관이 자기 이름값을 한다고 느껴졌다.

1층 벽면의 이진아양의 사진과 이진아양을 기리는 글. 강정민 작가

또한 도서관 강좌는 돌봄이 부족한 지역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살피는 역할도 담당했다. 어떤 땐 책도 안 읽은 아이가 친구까지 수업에 데려와서 간식도 먹고 신나게 놀다 집에 가기도 했다. 사실 도서관만큼 아이들이 늦은 시간에도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은 흔치 않다. 과거에 천방지축으로 까불던 아이들을 김씨는 요즘 버스에서 만나는 경우도 있다. 희한하게도 그는 아이들의 이름을 잊지 않고 다 기억한다. 어엿한 성인이 된 친구들을 만날 때 김씨는 자기 일에 보람을 느낀다.

청소년들과 수업한 덕에 김씨는 자녀를 더 잘 이해했고 적절한 거리 두기를 해서 관계도 좋다. “우리 집은 아이들이 수능 끝나면 용돈은 물론 핸드폰 요금도 본인이 내야 해요.” 성인이 된 세 자녀는 자기 자리에서 제 역할을 잘하고 있다. 작년에 ‘고 이진아 20주기 음악회’가 유족도 모시고 도서관 앞마당에서 열렸다. 도서관에 애정이 깊은 김씨의 첫째가 사회를 봤다.

김씨는 지난여름엔 중학생 대상으로 ‘역사 시리즈’를, 겨울엔 ‘신화 시리즈’로 방학 특강을 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2주간 오전 10시에 줌 수업을 시작했는데 정원 30명에 평균 27명이 출석했다. 엄마 말도 안 듣는 중학생이 방학 때 오전 10시 수업에 참여했다는 게 놀라웠다.

우수도서관 상패. 강정민 작가

학생들이 독서 수업에 이렇게 흥미를 갖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수업하기 4개월 전부터 강사진과 책을 선정하고 교재 작업, 영상 제작, 수업 시나리오까지 철저하게 만들었다. 김씨 외에 강사진 누가 강의하더라도 수업이 가능하게 만들고 싶었다. 강의 준비는 순전히 무급이다. 이런 보이지 않는 노력 덕에 학생들이 흥미로워하는 수업이 만들어졌다. 그와 강사진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올해 들어 정부의 도서관 예산이 줄어 도서관 사업이 축소되고 있다. 도서관이 예산 부족으로 제 역할을 못하는 모습을 볼 때 그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현재 김씨는 성인 반 세 개의 수업만을 맡는데 참여자가 총 65명이다.

독서 모임을 어떻게 하는지 직접 참관해봤다. 회원들은 정해진 책을 읽고 모임에 참석했다. 그가 책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하고 회원들이 돌아가며 느낀 점을 10분 정도 나눴다. 회원들은 다양한 의견을 내는 데 눈치를 보지 않았다. 책을 읽으며 느꼈던 점을 타인과 공유하는 기쁨을 회원들은 즐기고 있었다.

성인 독서모임 모습. 김은실씨 제공

김씨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하고 싶을까? “진아양에 대한 동화를 쓰고 싶어요. 그리고 독서회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그는 18년 전 이진아도서관과 우연히 인연을 맺었다. 도서관은 우수도서관으로 일곱 차례 선정됐는데 그가 이끈 독서회도 우수도서관 수상에 한몫했다.

김씨는 과거 자신처럼 사회로 나오고자 하는 경단녀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을 찾으면 좋겠어요.”

김씨는 지금도 매일 4시간씩 책을 읽는다. 김씨의 꾸준함과 노력 덕에 이진아도서관의 독서 수업은 봄날의 꽃처럼 활짝 폈다. “책은 위로였고 용서였어요. 나와 화해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요.”

김씨는 독서모임을 이끌며 자신을 구원하고 타인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우리 삶을 위로하고 구원하는 도서관이 더 많아졌으면 한다.

강정민 작가 ho089@naver.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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