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로 때리고 병 깨고” 그리고 34번의 반성문…‘갑질’ 조합장 판결은?

안승길 2024. 4. 4.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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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발 폭행'과 '폭언'…"내가 조합장인데!"

"네가 사표 안 내면 XX 내가 가만 안 둘 판이야."

조합장과 함께한 식사 자리는 직원들에게 악몽이었습니다.

지난해 9월, 전북 순창의 한 한우 식당. 업무와 자신에 대한 대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잔뜩 화가 난 조합장은 직원들에게 장시간 폭언을 내뱉었습니다. 심지어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 직원을 때리고, 이를 말리는 다른 직원의 뺨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한 시간 전쯤엔 인근의 장례식장에서 노조 탈퇴를 종용하며 술에 취해 발길질과 주먹질을 하고, 소주병을 들어 위협하는 모습도 포착됐습니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기행입니다. 모두 이 여성이 전북 순정축협의 인사권과 운영권을 쥔 조합장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조합장 고 모 씨는 앞서 지난해 4월에는 조합장인 자신의 주소를 모른다는 이유로 노래방에서 맥주병을 깨뜨리고 사표를 쓰라며 한 여성 직원을 협박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경찰과 검찰 수사를 받고 지난 1월 구속기소 된 고 씨, 제기된 혐의는 특수폭행과 특수협박, 강요, 근로기준법 위반, 스토킹 처벌법 위반 등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이 고용노동부는 순정축협에 대한 특별근로감독을 통해 폭행과 직장 내 괴롭힘, 성희롱, 부당노동행위 등 18건의 노동관계법 위반과 2억 600만 원의 임금 체불도 적발했다고 밝혔습니다.


■ 34번의 반성문, 형사 공탁금 1,600만 원…하지만 "사과는 없다"

두 달 넘게 이어진 재판 과정도 지역 사회에선 큰 관심을 모았습니다. 구속 상태를 피하기 위한 고 씨의 '눈물겨운' 노력 때문이었습니다.

고 씨는 재판 시작 직후부터 1심 선고 당일까지 34차례나 반성문을 제출했습니다. 법정에선 술을 끊고 외국인 수감자를 위한 한글 교육 등을 하면서 거듭 반성하고 있다고 눈물로 선처를 호소했습니다.

선고를 앞둔 지난달엔 피해자 4명의 피해 회복을 원한다며 법원에 1,600만 원의 형사 공탁금을 걸기도 했습니다. 공소 사실을 인정하면서 최대한 감형을 노린 걸로 보입니다.

부끄러움은 고 씨 변호인단의 몫이 돼야 할 것 같습니다. 진정한 참회 대신 '양형 전략'에 몰입한 결과 피해자들의 상처만 키우고, 고 씨 입장마저 더 난처하게 만든 셈이기 때문입니다.

축협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고 씨가 법원에 읍소하는 동안, 정작 피해자들을 위한 진정어린 사과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고 '단언'했습니다. 피해자들은 공탁금에 '기만'과 '분노'를 느낀다며 법원에 회수 동의서를 냈습니다. 두 달 넘는 재판 과정 내내 '사과'와 '합의'의 실마리를 전혀 찾지 못한 겁니다.


■ 1심서 징역 10월 실형…"수직 관계가 빚은 '모멸적' 폭력"

증거와 진술을 종합적으로 판단한 법원 판단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은 그제(2일) " 집행유예는 전혀 적절하지 않다"는 단서를 달아 고 씨에게 징역 10개월의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폭행하긴 했지만, 실제 부상 정도는 크지 않은 점 등을 감안해 법조계 일각에서는 집행유예가 선고될 거란 예측이 나온 터였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이런 예상을 뒤엎고 실형이 불가피한 범죄라고 판단했습니다.

1심 판결에서 눈에 띈 대목은, 재판부가 긴 시간을 할애해 조합장이 지역에서 갖는 막강한 권한과 영향력으로 인해 필연적인 위계가 발생한다고 지적하면서 직무 수행이나 직원들과의 관계 설정에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꼬집은 점입니다.

재판부는 피해자들이 수모를 겪고도 저항하지 못한 건 조합장과 직원이란 '수직 관계' 때문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압도적인 위계 아래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폭력'의 특성을 고려할 때 다른 비슷한 범죄에 비해 죄질이 훨씬 좋지 않다고 판단한 겁니다.

재판부가 덧붙인 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단순한 폭력을 넘어 피해자들의 자율권을 침해하고 '모멸감'을 주는 방식으로 범행이 이뤄졌다." -전주지법 남원지원 형사1단독 이원식 판사

일상 속 깊이 남은 '정신적 상처' 역시 간과해선 안 될 '피해'로 본 겁니다. 실제 고 씨에게 괴롭힘을 당한 피해자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치료를 받아도 온전한 극복은 쉽지 않다고 호소합니다.

■ 기약 없는 해임안 의결…'직무 정지'에도 영향력 '막강'

1심 판결에도 축협 직원들의 불안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직무 정지' 상태로 재판받고 구치소에서 지내는 고 씨의 직함은 여전히 '순정축협 조합장'입니다. 앞으로 조합에 복귀할 가능성도 열려있는 겁니다.

금고 이상의 형을 확정받으면 직위를 상실하게 되는데, 고 씨 측은 선고 하루 만인 어제(3일) 항소장을 냈습니다. 형은 최종심까지 가야 확정될 거로 보입니다.

농협중앙회는 지난달 고 씨에 대한 '해임 요구안'을 의결해 순정축협에 송부했습니다. 고 씨의 범행을 살펴본 결과 조합의 안정적 운영과 신뢰 회복이 어렵다고 판단한 겁니다.

하지만 순정축협 이사회는 해임안 상정과 의결을 계속 미루고 있습니다.

늘어지는 '직무 대리' 체제는 순정축협의 사업과 경영 측면에서도 여러 문제를 낳고 있습니다. 조합원뿐 아니라 직원들의 혼란도 커지고 있습니다. 고 씨는 조합원들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줄 수 있게 선처해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조합 경영에는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축협 직원들은 이 역시 꺾이지 않은 고 씨의 영향력을 보여준 방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고 씨 측근으로 분류되는 임원과 조합원들이 여전히 조합 운영을 주도하고 있어 이후 상황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단 겁니다.

실제 법정에선 고 씨 가족 말고도 그를 지지하는 '열혈 조합원' 여럿이 "힘내세요!"를 외치며 호송차를 붙들고 눈물 흘리거나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또 피해자들과 노동조합은 오히려 일부 조합원에게 포위돼 감시와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혐의 가운데 하나인 스토킹 처벌법 위반은 고 씨와 측근들이 피해자와 가족들을 찾아가 합의를 종용한 걸 말합니다. 법원도 '스토킹'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재판부는 고 씨의 단단한 지역 '유대 관계'가 오히려 피해자들을 향한 '2차 가해'를 불러왔다고 지적했습니다.


■ "권한은 막강하고 견제는 없다"…군림하는 '비위 조합장'

고 씨는 남편과 함께 한우를 키우는 일반 조합원이었다가 조합 감사를 거친 뒤, 2019년 처음 조합장에 당선됐습니다. 초선 때도 '막말 논란'에 휩싸였고 위탁선거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받았지만, 지지세를 기반으로 지난해 무난히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지역에서는 동등한 의결권 1표를 행사하는 조합원이었던 그가 인사권과 운영권을 독점하는 조합장의 '무소불위' 권한에 취해 비상식적인 권위 의식을 키웠을 거라고 해석합니다.

'권력의 맛'이 그만큼 진하기 때문일까요? 하루가 멀다 하고 법원에 반성문을 써낸 고 씨. 노동자들과 '순정축협 폭력 사태'를 심각하게 바라보는 지역 사회가 염원하는 '사표'만은 써낼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시민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킨 조합장의 갑질과 비위 행위는 고 씨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욕설과 폭행, 성희롱 등을 일삼은 혐의를 받는 경남 남해축협 조합장은 어제(3일) 구속돼 구치소에 머물며 수사받는 처지가 됐습니다.

조합장이 농협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받은 데 이어 업무상 횡령 등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전주농협, 입찰방해 혐의로 재판이 진행 중인 군산농협 등 비위 의혹도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장수농협에선 지난해 직장 내 괴롭힘을 호소하던 젊은 직원이 끝내 자살했지만, 조합장은 코 앞인 선거에만 골몰하며 사태 해결을 방관했단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권한은 막강하지만, 견제 수단은 없다." 조합장 비위에 맞서는 소수의 직원과 조합원들이 입 모은 평가입니다.

실제 2020년부터 지난해 상반기 사이 각종 비위로 징계받은 조합장 60여 명 가운데 절반가량은 가장 가벼운 '견책' 처분에 그쳐, 농협중앙회와 지역 조합의 허술한 감독 기능이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이번 사건을 지켜본 많은 사람은 고 씨의 유죄 판결이 '지역 소왕국 황제'로 군림하는 몇몇 조합장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취재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전망은 회의적입니다. '쏠림'과 '비민주성'을 견제하기 위한 촘촘한 입법이 뒤따르지 않는 한 실효성 있는 변화를 가져오긴 어려울 겁니다.

이 기사를 읽는 여러분은 혹시 조합원이신가요? 어떤 의견이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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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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