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와 시민의 강화된 ‘역능’, 의료개혁 논의 실마리

한겨레 2024. 4. 4.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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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의 의학과 서사(84)
합당성 책무책임과 환자·시민 참여를 통한 의료개혁
인공지능이 그린 시민 참여에 관한 삽화.

2020년부터 시작된 의사 배출 수에 대한 공굴리기는 지금, 2024년의 무한 갈등까지 왔다. 이 정도 강 대 강 대치면, 이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한 논의를 시작할 법도 한데 그런 말을 듣기는 어렵다. 누구나 ‘의대 증원’만이 지금 결정해야 하는 모든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것은 단지 가장 가시성이 좋은 사안일 뿐이다. 우린 이번 세기, 어떻게 의료 정책을 꾸릴 것인지에 관한 큰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며칠 전 대통령실은 ‘의료개혁’ 관련 협의체를 꾸리고 모형은 경제사회노동위원회와 같은 노사정 협의체를 꾸려 결정을 내리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의료계, 시민단체, 정부가 참여하는 형식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와 의료계의 무한 갈등 사이에서 한편으로 중재하고 한편으론 견제하는 역할로 시민단체 및 소비자단체가 여기에 언급된 것은 무척 반갑지만, 그러려면 이 위원회가 어떻게 운영될지에 관한 진지한 고민이 우선되어야 한다. 당장 경제사회노동위원회만 해도 노사정 대화가 이미 실종되고 자문 역할만 한다는 비판이 제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더 첨예한 갈등이 벌어질 것이 분명한 의료 문제를 위원회에 의료계, 시민단체, 정부만 모아놓는다고 잘 논의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오늘은 아쉽게도 하나의 서사를 가지고 문제를 살피기는 어려울 것 같다. 대신 ‘의료 정책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지금까지 도출되어 온 답 두 가지를 살피려 한다. 하나는 저명한 의료정의론자인 노먼 대니얼스가 제기하고 이후 보건학자 제임스 사빈이 함께 참여하여 발전시킨 ‘합당성 책무책임’(accountability for reasonableness) 모형이다.

의료자원 분배 문제를 놓고 보건의료 정책 결정에서 공정한 결정을 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제시한 이 모형은, 의료 정책 결정이 공지성(publicity), 관련성(relevance), 개정 및 항의(revision and appeal), 강제성(enforcement) 네 가지 구성요소를 반드시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1] 이 조건은 전 세계적으로 보건의료 정책 의사결정을 평가하는 모형에 활용됐다.[2]

다른 하나는 환자 및 시민 참여(patients and public participation) 모형이다. 거대하고 복잡한 의료적 사안들에 대한 결정을 독점하는 것은 전문가들이었으며, 여전히 그렇다. 그러나 현재 상황이 잘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전문가들이라고 모든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리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만 파악해 논의 자리에 나온다. 그렇다면 환자와 시민이라고 논의에 참여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오히려 이들이 현실의 어려움을 더 잘 반영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두 모형을 바탕으로 나는 이제 의대 증원 또는 의료개혁 논의를 전환할 때라고 주장한다. 2000명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정책 결정에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의료계, 환자, 정부가 모여 앉는 자리이고, 그들이 바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절차를 생각해 보는 일이다.

의대 증원은 ‘정의로운 의사 결정’에 기반을 둬야 한다. 지난달 26일 정부와 의료계 관계자들의 의료개혁 간담회가 열린 서울대 의대에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관계자들이 공공의료 확대를 촉구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정의로운 의사결정을 위한 네가지 요소

먼저 합당성 해명책임이라는 표현이 익숙하지 않으신 것이 맞다. 이 절차에 관한 원칙은 제기된 시일로도, 이미 국제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차원으로 보아도 이미 국내에서 어느 정도 논의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이를 인용하는 몇 가지 보고서가 국내에 발표되었을 뿐, 어떤 보건의료 정책 의사결정 절차도 이런 요소를 검토하여 마련된 바 없다. 나 또한 미국에서 의료정의론을 공부하면서 이 내용을 소개받지 못했다면, 아예 있는지도 모르고 지금까지 살아왔을 것이다.

먼저 왜 이런 절차적 접근이 나왔는지 생각해 보자. 멀리 갈 필요 없이, 의대 증원 2000명이다. 정부는 이것이 여러 연구에 근거하여 추산되었으며 당장 늘리지 않으면 10년 뒤 한국 의료에 큰 타격이 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의료계는 그 근거라는 보고서들도 2000명 증원을 요청한 바 없으며, 의료 인력 추계를 적정 근거로 다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누구의 말이 맞는가? 현재로썬 알 수 없다. 증원된 의사 수가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말 그대로 10년 뒤다. 그전에는 미래에 대한 여러 가정을 놓고 추측해 볼 따름이다. 이때 어떤 가정을 세우느냐에 따라 어느 편의 말이 맞는지가 달라지는데, 가정은 말 그대로 가정, 분명치 않은 것을 임시로 정한 조건일 뿐이다. 가정의 옳고 그름을 말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어떤 이론이나 관점이 옳다고 말한 가정들을 놓고 타당성이나 적절성을 비교하는 것은 어렵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누구의 말이 맞는지 따지는 방법이 아니라, 어떤 의사결정을 내렸을 때 그 결정이 지녀야 할 요소에 관한 검토다.

우리는 바른 의사결정을 통해 내린 결론은 충분히 따를 만하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다. 이때, 합당성 해명책임에 따르면 정의로운 의사결정은 다음 네 가지 조건을 지킨다.

첫째, 그 결정의 근거는 전적으로 투명해야 한다(공지성). 둘째, 당사자 모두가 관련이 있다고 동의한 이유에 결정은 근거해야 한다(관련성). 셋째, 결정은 새로운 증거와 논증에 비추어 개선될 수 있어야 한다(개정 및 항의). 넷째, 위 세 조건의 집행 가능성이 확보되어야 한다(강제성).

이들 조건은 그 결정이 합법적이며 공정할 것을 보장한다. 모두에게 투명한 근거이기에, 사람들은 결정이 합당한지 스스로 따져볼 수 있다. 당사자들이 관련 있다고 인정한 이유를 검토하기에, 사람들은 이 문제에서 정말 따져야 할 것을 분간할 수 있다. 단번의 결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개정에 계속 열려 있기에, 혹시라도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된 이들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들 조건(공지성, 관련성, 개정 및 항의를 말하는 것이지 해당 결정이 아니다!)이 강제되므로 위에 살핀 이유가 결정에서 달성될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 따라서 이 조건 아래 내려진 결정은 바르다고 합당성 해명책임은 말한다.

합당성 해명책임의 네 조건들

지금의 문제도 이 조건들을 기준으로 그리 어렵지 않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왜 의료계는 정부 안을 부정하는가? 그 결정이 투명하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관련 있지 않은 근거가 반영되었기에, 의사결정 과정에서 의료계를 배제했기 때문에 그렇다. 왜 시민은 현안에서 정부도, 의료계도 비판하는가? 정부와 의료계가 다른 계산을 하고 있으며, 정작 환자의 고통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네 조건은 적어도 우리가 모여 앉기 위해,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른 결정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이다. 아직 갈등은 끝나지 않았으므로, 이런 주문은 아직 이를 수도 있다. 그러나 책임과 공과를 서로에게 떠넘기고 상대방을 악마화하기만 하는 것을 넘어서려면, 갈등 다음을 준비하려면 지금부터 이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지금 갈등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정책을 결정하기 위해 결정의 조건들을 마련하는 것 말이다.

정책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다음, 환자 및 시민 참여를 생각해 보자. 보건의료 자체도, 그를 구현하기 위한 정책도 결국 그 실현은 환자와 시민의 몸을 대상으로 하기에 이들을 의사결정 과정에서 빼놓는 것은 이상할뿐더러 정당성을 확보하기가 무척 어려워진다.

그러나 환자와 시민은 보건의료에서 언제나 수동적인 위치에 있는 것으로 상정되었으며, 이들은 정보 비대칭 속에서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이들로 가정되어 왔다. 실제로도 보건의료적 상황의 복잡다단함은 환자와 시민이 논의에 참여하는 것 자체를 봉쇄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코로나19에서 시민의 견해가 방역 정책에서 배제된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일반인이 근시안적이고 이기적인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가정으로 정당화되었다.[3]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렇지 않도록 지원하는 절차적 방침에 기초하여 접근하면 될 일이다.

심지어 이런 보건의료 정책 결정에서 환자 및 시민 참여는 오랜 선언과 지지의 역사도 지니고 있다. 1978년 역사적인 세계보건기구의 알마아타 선언(Declaration of Alma-Ata)은 시민이 보건의료 계획과 수행에 개인적, 집합적으로 참여할 권리와 의무를 지님을 명시했으며, 이후 여러 국제 선언과 단체들의 주장은 이를 강화해 왔다.[4]

1978년 알마아타 선언은 ‘모두를 위한 건강’(Health For All)을 촉구하며 건강권과 일차의료의 중요성을 선언한 최초의 국제 합의다. 출처: 전미건강기구/세계보건기구

무엇보다, 어떤 정책의 인정은 당사자에게서 나온다

보건의료 정책의 윤리적 근거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제안자도, 대상자도 모두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정책은 윤리적인 지반을 얻는다. 다시 말해 환자와 시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보건의료 정책이어야 정책은 윤리적이다. 아무리 남들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도, 당사자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을 좋다고 말해선 안 된다. 여기에는 유일한 조건이 있다. 당사자가 합리적인 판단이 가능하다는 것 말이다. 어린아이가 싫어한다고 해서 부모가 하지 않으면 문제가 되는 일들이 있는 법이다.

전통적인 가정은 환자와 시민을 어린아이로 생각하고 있다. 물론 보건의료의 특수성 때문에 마냥 이들은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선언만 할 수도 없다. 환자와 시민도 합리적이고 합당한 판단을 내리려면, 적어도 그들이 마주한 문제와 의사결정 상황을 정리하고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다.

환자와 시민의 참여가 해결의 열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교육과 역능강화(empowerment)다. 환자와 시민은 보건의료의 문제들과 관련하여 직접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움과 지원을 요청할 수 있어야 하고, 그들이 자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 자원과 정보를 요청할 때 활용할 수 있는 형태로 환자와 시민에게 주어져야 한다. 목소리가 크고 자신의 이익을 명확히 하는 전문가와 공무원과는 별도의 논의 자리를 환자와 시민에게 제공할 필요도 있다.

아쉽게도 우리에겐 그런 자원도, 정보도 아직 충분치 않다. 물론 몇 가지 예가 있다. 여러 단체와 선생님들의 활동이 있었고, 뛰어난 책들도 여러 권 나왔다. 소소하지만, 벌써 몇년째 계속 쓰고 있는 이 칼럼 같은 경우 보건의료의 문제들에 대한 시민의 역능강화를 위해 지금까지 써 왔다. 하지만 제도적인 뒷받침이 없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보건의료 시민 역능강화는 어려움이 많다.

예가 없는 것은 아니다. 2010년, 국민보험공단은 보험 항목을 변경하는 과정에서 건강보험 보장성 시민위원회를 운영한 바 있다.[5] 최근 연구 사업을 진행 중인 공유 의사결정(shared decision-making), 환자와 의료진이 함께 의료적 문제를 결정하는 모형은 환자 역능강화가 선행될 때만 가능하다. 의사결정이 환자와 의료진의 공동 작업이 되려면 환자와 의료진이 동등한 위치에 서야 하고, 이는 환자의 힘과 가능성을 강화하고 지원하는 것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최근 보건의료계 전반에서 강조되고 있는 환자 중심 진료(patient-centered care)와 가치 기반 의료(value-based medicine)를 현장에서 구현할 방법도 이것이다. 그러나 건강보험 보장성 시민위원회는 지속되지 못했다. 공유 의사결정은 이제 시작 단계다. 안타깝게도 의약분업 논의 과정에서 시민사회가 배제된 이후, 보건의료 관련 논의에서 시민의 참여는 약화한 상태로 현재에 이르렀다.[6]

그렇다면 지금이 환자 및 시민 역능강화를 진지하게 고민할 적기일 수 있다. 의대 증원을 포함한 의료개혁을 논의하기 위해 환자와 시민의 능동적인 참여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위한 제도 마련을 지금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만 고령화, 저출생, 수도권 과밀화, 의료산업에의 과도한 집중, 관료적 의료인과 소비적 환자의 대치, 의료 전달체계의 붕괴와 건강보험 지속가능성의 위기 등 산적한 의료의 문제 앞에서 남의 답이 아닌 우리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Daniels, N. (2000). Accountability for reasonableness: Establishing a fair process for priority setting is easier than agreeing on principles. BMJ. Vol. 321.

Daniels, N., Sabin J. (2008). Accountability for reasonableness: An update. BMJ. Vol. 337.

Williamson, L. (2014). Patient and citizen participation in Health: The need for improved ethical support. American Journal of Bioethics. Vol. 14, No. 6.

World Health Organization (1978). Declaration of Alma-Ata. Regional Office for Europe.

권순만, 유명순, 오주환, 김수정, 전보영(2012). 보건의료 정책 의사결정과 시민참여: 『건강보험 보장성 시민위원회』의 사례. 보건행정학회지. 제22권 제4호.

박윤재(2021). 한국현대의료사.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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