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가 천하를 평안케 하리라…뜻밖의 '동파육'도 그러하니 [스프]

심영구 기자 2024. 4. 4.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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솥은 깨끗이 씻고 물은 조금 넣으며,(淨洗鐺, 少著水) 땔감에 불은 붙이나 연기가 나지 않는다.

스스로 익기를 기다려 재촉하지 않으니,(待他自熟莫催他) 불을 지피고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익혀진다.

부자는 먹으려 하지 않고,(貴者不肯吃) 가난한 이는 요리할 줄 모르니,(貧者不解煮) 아침 일찍 일어나 두 대접에 가득 채워 놓고,(早晨起來打兩碗) 배불리 먹으니 그대는 신경 쓰지 말게나.

 싫증을 잘 내어 글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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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⑤] 쓰촨·메이산 (글 : 모종혁 중국문화평론가·재중 중국 전문 기고가)
단골식당에서 평소 먹는 동파육
솥은 깨끗이 씻고 물은 조금 넣으며,(淨洗鐺, 少著水)
땔감에 불은 붙이나 연기가 나지 않는다.(柴頭罨煙焰不起)
스스로 익기를 기다려 재촉하지 않으니,(待他自熟莫催他)
불을 지피고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익혀진다.(火候足時他自美)
황저우의 좋은 돼지고기는(黄州好猪肉)
값은 진흙처럼 싸다.(價賤如泥土)
부자는 먹으려 하지 않고,(貴者不肯吃)
가난한 이는 요리할 줄 모르니,(貧者不解煮)
아침 일찍 일어나 두 대접에 가득 채워 놓고,(早晨起來打兩碗)
배불리 먹으니 그대는 신경 쓰지 말게나.(餓得自家君莫管)

쓰촨성의 한 농촌 시장에서 돼지고기를 판매하는 구역

이 시는 북송대의 대문호 소동파의 '저육송(猪肉頌)'이다. 소동파는 정치가, 시인, 학자로 명성을 떨쳤으나 미식가로도 유명했다. 그의 시에서 요리와 술이 자주 등장한다.

'저육송'은 '동파육(東坡肉)'의 제조법과 배경에 대해서 읊은 시로 지금도 회자된다. 본래 동파육은 중국에서 보편적인 요리인 훙샤오러우(紅燒肉)를 기반으로 한다.

훙샤오러우는 돼지고기의 삼겹살을 잘게 썬 뒤 여러 조미료와 향신료를 넣어 오래 찐 요리다. 삼겹살의 크기, 넣는 조미료와 향신료 등은 지방마다 달라서 조리법이 천차만별이다.

소동파가 태어나고 자랐던 쓰촨(四川) 성 메이산(眉山) 시의 생가 입구


동파육은 이를 항저우(杭州)식으로 변형한 것이다. 그런데 '저육송'에서는 황저우(黄州)의 이야기를 읊고 있다. 황주는 후베이(湖北) 성 황강(黃岡) 시 황저우구를 가리킨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 그 내막은 소동파의 인생 역정에 숨어있다.

소동파의 아버지는 쓰촨(四川) 성 메이산(眉山)이 고향인 소순이다. 소순은 청소년기에는 철이 없었다. 싫증을 잘 내어 글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다. 스무 살이 넘어서 반성하고 공부에 매진했다. 이 기간인 1036년에 소동파가 태어났다. 첫아들을 가진 뒤 글공부에 더욱 열성을 다했다.

소동파와 소철이 어머니와 함께 즐겁게 보낸 어린 시절을 재연한 모습


그리고 3년 뒤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소순은 자식들이 평생 잘 지내기 바랐다. 그래서 큰아들은 식(軾)으로, 둘째 아들은 철(轍)로 지었다. 소식은 소동파의 본명이다. 소순은 산문에 이름의 유래를 설명했다.

"'식'은 '수레 앞턱의 가로막이 나무'다. 바퀴, 바퀴살, 덮개, 뒤턱나무 등은 수레에게 없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가로막이 나무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소순은 큰아들이 거친 세상에서 홀로 진실을 지키며 어울리지 못하고 화를 입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화를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식'이라고 지었다.

소순과 소동파, 소철이 생가에서 생활하며 떠 마신 우물


"'철'은 '수레바퀴 자국'이다. 비록 모든 수레는 바퀴 자국을 남기지만, 수레의 공덕을 얘기할 때는 그 자국을 들먹이지 않는다. 또한 수레가 뒤집혀도 바퀴 자국에는 화가 못 미친다."

둘째 아들은 별다른 변고 없이 잘 살기를 기원했다. 이렇듯 형제 이름에는 아버지의 세심한 사랑이 숨어 있다. 소순은 과거에 응시하는 두 아들을 데리고 40대에 수도로 갔다.

그때 구양수를 만나 시문을 인정받았다. 또한 재상의 추천을 받아 벼슬에 올랐다. 소동파와 소철도 진사에 급제했다. 따라서 3부자는 '당송팔대가'로 발돋움했다.

젊은 시절 함께 시를 논하는 소동파와 소철 형제를 재연한 모습


소동파가 출사했던 시기에 황제 신종은 왕안석의 건의를 받아들여 신법을 시행했다. 소동파는 왕안석을 추종하는 신법당의 위선과 탐욕에 신물이 나서 이를 반대했다.

그로 인해 1071년부터 소동파는 지방관으로 발령이 나서 곳곳을 전전했다. 1077년에는 쉬저우(徐州)의 주지사가 되었는데, 부임해서 얼마 안 되어 홍수가 났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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