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렬 정신 실종” 이제 일본이 한국 경제를 걱정한다

이인열 기자 2024. 4. 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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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포커스]
‘한국’의 추월을 아파했던 일본이
맹렬 정신 실종, 기술 유출 이유로
이제 한국 경제를 걱정한다
우리는 어떤 대책을 고민 중인가
일러스트=김성규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정말 힘들었다. 돈은 안 벌어지고, 개발도 뜻대로 안 됐다. 회의는 날마다 밤 11시에 했다. 사장과 전무도 참여했다. 당시 기흥은 정말 시골이었다. 너무 늦게 끝나니 매일 밤 회사에서 차량을 준비해줬다. 꼭 버스 2대에 나눠 탔다. 혹시 교통사고가 나면 한꺼번에 우리의 꿈이 사라질 수 있다는 절박감 때문이었다.”

2004년 11월에 작성한 기자의 취재 수첩에 적힌 한 대목이다. 취재원은 당시 삼성전자 차세대연구팀장 김기남 전무. 훗날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에 올랐다.

“삼성이 왜 잘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회의 문화’를 꼽았다. “전무부터 대리까지 누구든 서슴지 않고 반박을 한다. 이런 문화는 처음부터 우리가 생판 모르는 것(반도체 사업)을 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모르는 것을 가장 빨리 하려면 가장 잘하는 사람, 가장 정확히 아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체득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20년 전 취재 수첩을 꺼낸 이유는 지난달 말 일본 경제지 닛케이가 2회에 걸쳐 다룬 ‘삼성과 한국 경제’란 기획 기사 때문이었다. 삼성의 추월을 가장 아파했을 일본이 ‘대기업병’에 걸렸다며 한국을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기사는 “한국의 삼성전자는 최고 경영자의 결단력과 맹렬한 조직력으로 전자업계 거인이 되었지만, 미국의 애플과 대만의 TSMC 추격은 더 거세지고 있다. 중흥을 이끈 선대 회장(이건희)이 키운 사업의 수익은 줄고, 사업 쇄신은 안 됐다. 이재용 회장이 타파에 나섰다”는 내용이다.

최근 고대역폭 메모리(HBM) 생산에서 뒤지고, 스마트폰에서 13년 만에 애플에 세계 1위 자리를 내준 사실을 언급했다. 이어 “10년 동안 삼성전자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거의 제자리지만 일본의 소니그룹과 히타치제작소는 사업 구조를 바꾸고 수익성을 개선해 미국 금융 위기 때 대비 주가를 10배 이상 끌어올렸다”는 자랑을 빼놓지 않았다.

하지만 닛케이 기사의 진짜 핵심은 삼성을 넘은 한국 경제 전반의 문제를 지적하는 대목이었다. 2023년까지 최근 5년간 한국의 반도체, 배터리, OLED, 조선 등에서 해외로 기술 유출은 96건. 유출처는 대부분 중국이며, 이는 빙산의 일각이라고 했다. 승진 경쟁에서 밀린 기술자들이 대거 중국으로 건너가면서 액정 패널 세계 1위인 중국 BOE에는 100명이 넘는 한국인이 일한다고도 했다.

한국의 주력 산업인 디스플레이, 조선, 석유화학, 배터리, 철강 등에서 지금 세계 선두는 모두 중국 기업이며, 중국 제조업과 같은 무대서 싸우면 승산이 없다는 진단도 내놨다.

이런 상황을 지적한 뒤 한국 내부의 ‘맹렬 문화’ 실종을 꼬집었다. 노조가 주된 지지 기반인 문재인 정권에서 법제화된 ‘주 52시간 근무제’ 때문에 일에 대한 태도, 일하는 방식이 크게 바뀌었다고 했다. “일하고 싶다는 젊은 직원에게 퇴근을 독려해야 하고, 정시 퇴근에 익숙해진 직원들 사이엔 ‘시간을 회사에 판다’는 의식이 뿌리내렸다”는 대기업 임원의 한탄을 소개하고 있다.

한국 경제는 이미 수출 주도의 재벌 기업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둔화기에 접어들었다. 게다가 일본보다 심각한 저출생, 고령화에 5000만명 수준의 내수 시장으로 어떻게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우리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지만 때로는 외부의 시선이 자극이 된다. 걱정의 목소리가 나온다는 건 극복의 기회인 동시에 쇠락의 현실화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복수와 증오의 구호만 넘치는 총선 국면에서 느끼는 절망감은 극단의 진영 논리 때문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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