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어때] 도대체 그는 왜 그랬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

신정선 기자 2024. 4. 4.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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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55번째 레터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입니다. 3일 현재 관객 2만2132명으로 영진위 통합전산망 독립예술영화 1위입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전작 ‘드라이브 마이 카’를 넘을지는 모르겠네요. 전 ‘드라이브 마이 카’보다 이 영화가 훨씬 재밌었습니다. 더 직설적이고 간명한데 마지막에 두뇌를 강타당하는 즐거움까지. 오늘 레터는 그 마지막 부분에 대해 써보려고요. 이 영화는 전체 106분 중 마지막 6분을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영화관을 나오며 “뭐야, 이건?”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하시는 분들이 많죠. 혹시 보실 계획이 있는데 아직 안 보셨다면 보시고 읽어주세요. ‘그렇게 골치 아픈 영화면 어차피 봐도 이해 못할 것 같으니 읽어보고 참고해서 감상하겠다’ 싶으시면 편하게 따라와주시고요.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엔딩에서 관객의 머리에 벼락처럼 질문을 내리꽂는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줄거리는 단순합니다. 도쿄 근교 청명한 시골에 도시의 개발업자들이 나타납니다. 글램핑장을 건설하겠다면서요. 코로나 보조금을 노린 벼락치기 사업이었죠. 업자들은 시골에 유동인구가 늘어나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 아니냐고 설득하지만 주민들은 반대합니다. 그 중엔 주인공 나무꾼과 딸도 있습니다. 사업은 지지부진, 어느 날 딸이 실종됩니다. 찾으러 나선 주인공. 과연 딸은 어디로 갔을까요.

마지막 장면에서 사라진 딸은 주인공에게 발견됩니다. 총을 맞고 피흘리는 사슴에게 다가가려 하고 있었어요. 딸을 발견한 주인공 곁에는 함께 수색에 나섰던 친절한 도시인이 있었습니다. 자, 관객을 놀라게 하는 건 주인공의 다음 행동입니다. 도시인이 급하게 딸을 구하려는 듯 다가가려 하자 갑자기 주인공이 도시인의 목을 조르기 시작합니다. (그가 끝내 절명했는지는 영화가 명확히 말해주지 않는데, 아마 죽은 듯합니다.) 아니 도대체 왜! 주인공은 친절한 도시인을 죽였을까요. 느닷없이 왜! 관객들은 어리둥절하죠.

자, 좀 더 들어가기 전에 딴 작품 먼저. 왜냐구요. 제 생각엔 ‘악은' 엔딩에 대한 답변이 그 작품에 들어있거든요. 어떤 작품이냐, 요즘 화제작인 넷플릭스 시리즈 ‘삼체(3 Body Problem)’입니다. 저는 ‘왕좌의 게임'을 망가뜨린 대역죄인인 연출가 David Benioff와 D.B. Weiss의 신작이라길래 봤습니다. 좋아서? 아뇨. (갑자기 치솟는 혈압을 억누르며) ‘왕게'에서 원작이 없어진 시점부터 돌머리(더 심한 말을 썼다가 수정)가 되면서 수억 시청자를 배신한 두 사람이 완전한 원작을 가지곤 어찌 만드나 보려고요. 쯧쯧, 여전히 비주얼 원툴이더군요. 두 사람 욕을 하자면 3박4일이 부족하니 ‘악은’과 통하는 그 부분만 말씀드릴게요. 전체 8편 중 7편에서 죽음을 앞둔 인물 A가 다른 인물 B에게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농담 하나 듣겠나.

아인슈타인이 죽고 눈을 떠보니 천국이었지. 자기 바이올린도 있었어.

그는 기쁨에 겨웠지. 바이올린을 사랑했거든. 물리학보다 여자보다도 더.

천국에서 연주 실력은 어떨지 무척 알아보고 싶었어.

바이올린을 조율하는데 천사들이 급히 그에게 왔어.

뭐하는 건가.

연주하려고요.

관두게, 신께서 싫어하실거야, 색소폰 연주자시거든.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멈췄어.

그런데 높은 곳에서 색소폰 연주가 들려와.

아인슈타인은 생각했지. 신과 함께 연주하겠어, 우리 합주는 근사할거야.

그러고는 그 곡을 연주하기 시작하자 색소폰 연주가 멈추고 신이 나타났어.

그는 아인슈타인에게 다가와 불알을 뻥 찼어.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바이올린도 박살내버렸어.

아인슈타인이 묵사발된 불알을 쥐고 바닥에 누워 몸부림치는데 한 천사가 와서 말했지.

우리가 경고했잖나.

신의 연주에 끼어들지 말라니까.(“Never play with God.”)

Never play with God. 네, 저는 이 문장의 근원적인 의미가 ‘악은’의 엔딩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요. ‘삼체’가 우주의 섭리를 바탕에 두고 있기에 가능한 거죠. ‘악은’은 배경을 숲으로 옮겨와 풀어낸 거고요. 하마구치 감독이 삼체를 보고 만들진 않았겠지만, 우주, 대자연, 그 안의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상통하는 얘기가 아닐까 합니다. 신의 뜻에 개입하지 말라. (‘삼체’ 버전=아인슈타인도 박살났다) 대자연의 균형을 깨뜨리지 말라. (‘악은’ 버전=죽는다) 때론 대가가 따르게 될지니. 그런 얘기 아닐까 싶어요.

위에 말씀드린 ‘균형’은 이 영화의 키워드 중 하나인데, 대사에서 매우 직접적으로 노출됩니다. (친절한 하마구치씨) 주인공이 글램핑업자들의 사업설명회에서 사업을 반대하며 말해요. “문제는 균형이야. 정도가 지나치면 균형이 깨져.” 그가 도시인을 살해한 행위도 ‘균형’의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위태해져 버린 균형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죠. 왜냐, 그는 임무를 부여받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이 마을의 심부름꾼”이라고 해요. 여기서 가장 눈에 띈 부분 중 하나는 주인공의 반말이었습니다. 정말 대놓고 아무한테나 반말을 해요. 왜 그럴까요? 그는 이 마을의 심부름꾼이기에 앞서 마을을 둘러싼 이 대자연의 심부름꾼이라서 그런 거 아닐까요. 심부름꾼이며 일부이며 때론 합체화되는 그 자체. 대자연의 시선에선 누구도 상하가 없습니다. 신분도 없고요. 그러니 다 반말의 대상이죠.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도입부 롱테이크 장면. 과연 우리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일까, 그들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일까.

해답을 더 들여다보기 위해 우리는 영화의 맨앞으로 가야합니다. 위의 사진 보이시나요. 영화는 시작하고 약 4분간 롱테이크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듯한 위의 장면을 길게 보여줍니다. 그런데 전 이 장면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거, 내가 나무를 올려다보는 게 아니고, 나무가 나를 내려다보는 거 같은 걸?’ 오래 바라보다 저의 결론은? ‘우리는 우리가 숲을 바라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숲이 우리를 바라보는 것이다.’ 전 지금도 이 스틸사진을 보면 제가 나무의 시선에 관통당하는 느낌이 들어요. 뭔가 잘못한 것을 고백해야할 것 같고(아, 아직도 기사를 잘 쓰지 못하는 기자입니다, 반성하겠습니다, 숲의 신이시여!), 발걸음 하나도 조심스럽게 내딛어야 할 거 같고요.

‘악은’에선 이렇게 관객이 시선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되는 장면이 여럿 나옵니다. 간혹 KTX 역방향 좌석을 타고 풍경을 바라보듯 전도된 앵글도 보이죠. 그럴 땐 멀어지는 게 우리가 아니고 자연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 세계의 주인공이라 으스대지만 과연 그럴까요. 대자연의 응시 앞에 곧바로 해체되는 한낱 무력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 면에서 도입부 롱테이크는 참 적절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자, 마지막 장면을 다시 보면, 사슴이 궁금해집니다. 친절한 도시인이 살해당한 건 그렇다치고, 피 흘리는 사슴은 뭐고, 갑자기 어디로 사라진 거야? 이런 궁금증이 들 수 있죠. 이 지점에서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눈에는 아직도 나무꾼 부녀가 사람으로 보이시나요?”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주인공 부녀. 그럼 사슴은 어디로 갈까? 라는 영화의 질문에 답을 주는 인물들이다.

이 대목에서 영화 중간에 주인공이 사업을 추진하려는 도시인들에게 던진 질문을 떠올려봐 주세요. “그럼, 사슴은 어디로 갈까?” 이때의 사슴은 균형의 저울에 올라와 있는 무게추입니다. 균형이 깨지기 시작하는 위태한 지점이 되면 저울이 기울면서 평온이 깨지고, 사슴은 갈 곳을 잃습니다. 그걸 막으려던 게 주인공의 행위입니다. 그건 이성이나 인과관계의 영역이 아니고 자연의 뜻에 따른 섭리의 영역이죠. 균형을 복원하려는 행동이지 가해와 피해의 관계가 아닙니다.

그럼 잠시 보이던 두 마리 사슴은 어디로 사라졌느냐고요. 안 사라졌어요. 거기 보이시잖아요. 주인공과 딸. 두 사람, 아니 두 사슴입니다. 좀전까지 보였던 두 마리 사슴의 이미지 전이(轉移)가 일어났다고 보시면 쉬우실 거에요. 중간에 이런 대사가 나와요. 도시인이 “사슴이 사람을 해쳐요?”라고 묻자 나무꾼이 답해요. “야생 사슴은 그렇지 않아. 있다면 빗맞은 사슴이나 그 아비, 어미야.” 네, 마을의 심부름꾼이자 대자연의 대리인, 또 사슴 아비인 주인공은 총을 맞고 피흘리는 사슴, 아니 딸을 안고 달려갑니다. 집으로 아니고 숲으로.

영화 제일 끝엔 헐떡이는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리고 그 소리를 무심히 감싸는 밤의 숲을 오래 보여줍니다. 마침내 어딘가 도착한 듯 멈춘 발자국 소리. 균형을 찾아 달리던 사슴은 그렇게 밤의 숲에 안기며 영화가 끝납니다.

여기까지, 어디까지나 저의 해석이니 여러분은 여러분의 해석으로 여러분만의 영화를 만드시면 되겠지요. 하마구치 감독이 끝부분에 질문을 강하게 던지려고 그전까지 매우 친절한 장치를 많이 넣어뒀기 때문에 얼마든지 재밌게 보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사족으로 제목. 하마구치 감독 왈, “자연에는 선과 악, 그리고 정의가 없다. 악은 어디에든 존재하지만 이러한 통념에 카운터 펀치를 날리고 싶었다”고 하네요. 너무 예상 그대로여서 재미가 없죠? 그만큼 젠체하지 않고 정공법으로 만든 작품인 것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해석은 관객의 몫. 얼마든지 여러분의 버전으로 만드시면 되겠습니다. 문학이든 영화든 미술이든, 모든 작품은 창작자를 떠나면 수용자에 의해 얼마든지 재창조되는 거니까요. 이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하마구치의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것입니다.

아, 모자 얘기도 해야되는데! 딸이 마지막에 사슴한테 다가갈 때 모자를 벗잖아요. 전 그것도 왜 그럴까 나름대로 해답을 찾아봤거든요. ^^;; ‘악은’은 그만큼 여러 해석의 지점이 있는 영화라 재밌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너무 길어져서, 여러분이 지루하실 듯. 다음 레터에서 살짝 말씀드리던지 할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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