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죽으러 왜 왔더냐", 한식날 통곡하는 김상옥의 모친

2024. 4. 3.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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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묘소 손보고 제사 올리는 민족의 명절 한스런 아들 죽음에 눈물 쏟는 어머니 우이동 손병희 산소엔 봄풀만 푸르러 사후 더러운 오명만은 남기지 말아야

올해 4월 4일은 청명(淸明), 5일은 한식(寒食)이다. 한식은 동지(冬至)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설날과 한식, 그리고 단오, 추석을 큰 명절로 삼았다. 한식에는 불을 쓰지 않고 찬 음식을 먹는 풍속이 있다. 조상 무덤을 보수하고 제사를 올렸다. 100년 전의 한식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오늘이 한식(寒食)'이라는 제목의 1923년 4월 6일자 매일신보 기사다. "오늘이 옛날 진(晋)나라 개자추(介子推)가 면산(綿山)에서 자기 모친과 함께 불에 타서 자살한 날이다. 우리의 가정에서는 이날을 기억하여 한식이라 하고 해마다 이날만 돌아오면 선조의 성묘(省墓)를 하는 것인데, 금년도 역시 변함이 없을 것이라. 산소에는 흰옷 입은 남녀노유(男女老幼)들이 무덤 앞에 제사상을 벌려놓고 혹은 울며 혹은 말할 수 없는 슬픔에 망연히 앉아 선조의 혼령을 위로하는 오늘이 한식날." 기사는 진 문공(文公)과 개자추에서 나온 한식의 유래를 알려주고 있다.

동아일보는 한식을 맞아 한국 근대사에 손꼽히는 두 사람의 묘소를 찾아간 기자의 이야기를 실었다. 한 분은 '경성 피스톨'로 불리는 의열단의 김상옥(金相玉)이요, 또 한 분은 민족지도자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선생이다.

먼저 1924년 4월 8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죽으러 왜 왔더냐, 묘전(墓前)에 통곡하는 김상옥의 모친' 제하의 기사다. "6일 오후에는 먼지 이는 동대문 밖을 걸어 '떡전거리 휘경동'에 가서 북쪽으로 꺾어 구불구불한 길을 얼마간 지나가면 이문안 공동묘지가 나온다. 산길을 한참 올라가면 이곳에는 단신으로 수천 경관과 엿새 동안을 싸워 일시 경성 천지를 진동하던 일대의 모험아(冒險兒) 김상옥이가 말없이 누워있는 곳이다. 한식이 되었다고 넓으니 넓은 공동묘지에는 사람이 뒤덮여 울고불고 야단들이다. (중략) 우리 일행은 김상옥 부인의 인도로 수많은 무덤을 지나가는데, 두어 걸음 더 지나가니 묘표(墓標)도 없는 무덤 하나가 있다. 김상옥의 부인은 '이 산소가 그 산소이야요. 소생 남매가 있어서 남에게 고공(雇工)살이를 하여 그것들을 가르치느라고 산소에 올 사이도 없고 묘표도 세우지 못하여 부끄럽습니다.' 옆에 섰던 김상옥의 모친은 '삼 형제 아들이 이제는 독신(獨身)이 되었습니다. 맏아들은 병으로 죽고, 둘째가 상옥인데 너무 작아서 그랬는지 못나서 그랬는지 그만 그 지경이 되었습니다. 죽던 해에도 몇 해 만에 집이라고 와서 제 집에를 들어 앉지도 못하고 거리로만 다니다가 죽었습니다.' 모친은 눈물을 쏟아내며 털썩 앉더니 목을 놓아 운다. '죽으려고 왔느냐'며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사설(辭說)을 하며 슬프게 운다."

기사는 계속 이어진다. "가슴에 맺힌 한을 풀지 못한 김상옥의 혼령은 지금 어디 가서 있을꼬. 몸이 포수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일시는 예수교 신자도 되었었고 주야(晝夜)로 쇠망치를 들어서 번 돈과 단련한 팔뚝으로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수만 원의 돈을 그 일에 바치고 나중에는 계해년(癸亥年, 1923년) 1월 22일 새벽에 효제동 한 모퉁이에서 빗발 같은 탄환을 받으며 비창(悲愴)한 최후를 이루었다. 아! 가슴에 품은 그 뜻은 어디에다 두고 이제 공동묘지 한 모퉁이 누었느뇨."

다음 날인 4월 9일 동아일보에 '손씨(孫氏) 생일날, 묘전(墓前)에 우는 애인'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린다. "하늘에는 음울한 구름이 잔뜩 끼인 8일 아침에 근세 조선의 역사에 큰 자취를 끼친 손병희 씨 산소에 성묘를 가게 되었다. 동소문을 나서서 푸른 눈 트는 버드나무 아래를 몇 번이나 지나서 벚꽃으로 유명한 우이동에 당도하였다. 북으로 쳐다보면 삼각산 봉오리에는 근심을 띈 봄 구름이 배회하는데 동쪽으로 묵연(默然)히 있는 봉분 하나가 손씨의 산소이다. 살아서 입이 한번 떨어지면 300만 대중이 수화(水火)를 사양치 아니하던 인물도 한 번 죽으니 그의 봉분에는 매년 사람의 근심을 자아내는 봄풀만 푸를 뿐이다. 동행하던 개벽(開闢) 주간 김기전(金起田)씨에게 '선생님이 일찍이 이 산소터를 생전(生前)에 정하셨던가요?' 하니 김씨는 '생전에는 도무지 사후(死後)의 말씀은 아니 하시는 어른이니까 친근한 사람도 사후에 어쩐다는 말씀은 듣지 못 하였습니다'고 한다."

기사는 이어진다. "손씨의 만년(晩年) 애인으로 세상의 이목을 끌던 주취미(朱翠眉)도 성묘를 와서 묘전에 묵묵히 서서 잠깐 묵념을 하더니, 다시 뒤로 돌아가서 흰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흐느껴 운다. 불어오는 봄바람이 그의 머리털을 흔들면 백설(白雪)같은 소복을 스치고 지나간다. 두어 걸음 걸어 봉황각으로 내려가니 주인을 잃은 집은 오직 적적할 뿐이요 손씨가 기거하던 방에도 덧문이 첩첩이 닫혔다. 주취미는 '선생은 매일 밤 10시에 취침하셔서 아침 4시에 일어나서 가만히 묵도(默禱)를 하시고 이후 냇가와 산으로 거니셨지요.' (중략) 기자의 머리에는 그 무서운 눈을 뜨고 은은한 물소리를 들으며 시냇가에 우뚝 선 거인(巨人)의 모양이 보인다. 거인! 과연 일대의 거인이다. 바람 불고 비 오던 조선 근세사는 동학(東學)이 그 반은 차지하리라. 기미(己未) 3월 1일 이래 삼천리의 산하를 진동하던 독립운동도 이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가 가장 유력한 중심이 되었다. 이 깃발을 쥐고 선두에 나선 이는 손씨 그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전에 사랑하던 우이동에서 봉황각을 내려다 보며 길이 잠들고 오직 물소리 새소리만 연년세세(年年歲歲)히 변치 아니한다. (후략)"

사후(死後)에 후손들이 이런 추모와 기억을 하는 것을 망자(亡者)들은 과연 알까, 모를까. 설사 그들이 모른다고 해도 100년이 흐른 후 그 이름이라도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그나마 위안을 받는다. 한식 날, 차가운 음식은 아니더라도 차가운 물이라도 한 잔 마시고 정신이라도 바짝 차려야겠다. 세상이 기억하는 아름다운 이름은 못 남기더라도 더러운 오명(汚名)만은 남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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