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8시간 일하는 싱글맘 슬하→세차장 알바→계약금 670만원에 입단한…노망주가 대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백종인 2024. 4. 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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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Gettyimages(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OSEN=백종인 객원기자] 애스트로스의 올 시즌 출발은 최악이다. 개막전을 시작으로 4게임을 모두 잃었다. 2년 전 월드시리즈 우승팀, AL 서부지구 강호의 면모는 찾아보기 어렵다. 투수진의 문제 탓이다. 에이스 저스틴 벌랜더와 호세 우르퀴디가 부상으로 이탈했다.

어쩔 수 없다. 플랜B가 가동된다. 지난주 감독(조 에스파다)이 투수 한 명을 호출했다. “이봐 로넬, 자네가 월요일 게임(한국시간 2일, 블루제이스전)을 맡아줘. 할 수 있겠지?”

로넬 블랑코(30)가 5선발로 캐스팅된 것이다. 본래 마이너리그에서 시즌을 시작해야 할 처지였다. 선발 경험도 많지 않다. 커리어 통산 202게임 대부분을 불펜에서 보냈다. 그나마 데이나 브라운이 GM(단장)으로 취임한(2023년 1월) 이후 입지가 달라진다. 선발 후보로 분류돼 이닝을 늘려가는 중이다.

감독이 대단한 걸 요구할 리 없다. “5회까지만 버텨주면 돼. 투구수 80~90개 정도는 괜찮지?” 대답은 당연히 “예스”다. 그런데 한 가지를 숨기고 있었다. 그날 둘째 딸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출산 휴가? 그런 건 입에도 올리지 않는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경기 당일이 됐다. 불펜에서 몸풀 때 느낌이 팍 온다. “포수가 바로 앞에 앉아있는 것 같았어요. 공 던지는 게 그렇게 쉬운 적이 없었죠.” 아니나 다를까. 타자들은 추풍낙엽이다. 1회 볼넷 하나가 전부다. 이후로는 1루에 얼씬도 못 한다.

그렇게 8회가 끝났다. 투구수는 어느덧 91개가 됐다. 벌써 한계치를 넘겼다. 투수 코치와 눈이 마주쳤다. 말이 필요 없다. 고개를 끄덕인다. 나머지도 채우겠다는 뜻이다. 왜 아니겠나. 대기록이 코 앞에 있다. (이전까지 블랑코의 최장 투구 이닝은 6회였다. 지난해 두 번 기록했다)

스코어는 이미 10-0이다. 팀의 첫 승은 확정적이다. 아웃 3개면 끝난다. 마지막 타자 블라디미르 게레로의 타구가 2루 쪽으로 구른다. 27번째 아웃이다. 미닛 메이드 파크의 2만 7285명이 모두 일어섰다. 시즌 첫 노히터에 기립 박수를 보낸다. (9이닝 투구수 105개, 2볼넷, 7삼진)

휴스턴 애스트로스 SNS 캡처

도미니카 공화국은 중요한 파이프라인이다. 많은 메이저리그 스타를 배출했다. 때문에 30개 구단 모두가 이곳을 주목한다. 괜찮은 재목이 눈에 띄면, 일단 잡고 본다. 국제 계약이 가능한 16세 생일이 지나면 대부분 유망주는 임자가 나선다는 말이다.

반대의 논리도 성립한다. 그때까지도 외면당하면, 별 볼 일 없는 선수라는 뜻이다.

로넬 블랑코가 그런 경우다. 같이 뛰던 친구들은 하나둘 미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를 주목하는 스카우트는 없었다. 17살, 18살이 돼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때까지는 주로 코너 내야수(1루, 3루), 아니면 외야수였다. 포지션치고는 타력이 너무 달렸다.

보기에 안쓰럽다. 누군가 슬쩍 한마디를 흘린다. “어깨는 괜찮던데, 투수를 한번 해보던가.” 고민할 여유도 없다. 일단 바꾸고 보자. 코치를 졸라 마운드에 섰다. 90마일은 어렵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그의 18살 무렵이다.

그때부터 주변 시선이 조금씩 달라진다. 여기저기서 입질이 온다. 도미니카에 아카데미를 차린 몇몇 구단에서 오디션 기회가 생겼다. 가장 먼저 뉴욕 메츠가 불렀다. 며칠간 테스트를 받았지만,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이어 뉴욕 양키스에서도 연락이 왔다.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탬파베이 레이스에서도 기회를 줬다. 그러나 매번 마찬가지다. “미안하게 됐다”, “나중에 보자”. 그런 얘기에 돌아서야 했다.

그렇게 22살 생일을 넘겼다.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국제 담당 스카우트 책임자가 새로 부임했다. 오즈 오캄포라는 인물이다(현재 마이애미 말린스 부단장). 그는 독특한 정책을 펼쳤다. 저인망 방식이다. ‘일단 싼 값에 많이 데려다 놓자’는 전략이다.

블랑코에게도 제안이 왔다. 계약금이 겨우 5000달러(약 670만 원)였다. 그게 어딘가. 감지덕지다. 덥석 받아들였다. 프램버 발데스, 크리스티안 하비에르도 당시 이런 식으로 입단했다. 둘에게는 각각 1만 달러(약 1360만 원)의 사이닝 보너스가 지급됐다. 이들은 후에 애스트로스의 선발 투수로 성장했다.

[사진] ⓒGettyimages(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10대 후반이면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적어도 도미니카에서는 그렇다. 말했다시피 유망주라면 16세 생일이 되기 무섭다. 곧바로 메이저리그 팀과 그럴싸한 계약을 성사시킨다.

그런 면에서 블랑코는 특별한 케이스다. 22살에야 간신히 일자리를 찾았다. 남들 같으면 진작에 포기할 나이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어머니 때문이다.

어머니 마리아는 싱글맘이다. 미혼모로 세 자녀를 혼자 키워냈다. 산티아고에서 작은 커피점을 운영했다. 말이 좋아 커피숍이다. 노점이나 다름없는 허름한 곳이다. 음료와 간단한 음식을 함께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영업시간이 살인적이다. 새벽 4시면 출근해 가게 문을 연다. 그렇게 오후 2시까지 점심 장사를 마친다. 그리고 1시간 브레이크 타임을 갖는다. 저녁 장사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오후 3시에 재개된 영업은 밤 11시까지 계속된다. 하루에 18시간씩 일한다는 얘기다.

그런 어머니가 얼마나 안쓰럽겠나. 아이들도 힘을 보태야 한다. 블랑코도 마찬가지다. 오전에는 내내 야구장에서 공과 씨름한다. 그리고 오후가 되면 여기저기 알바를 뛴다. 가장 오래 한 것이 세차장 일이다. 체력 훈련이 필요 없다. 1~2시간이면 땀투성이가 되는 중노동이다.

그걸 지켜봤던 스카우트의 기억이다. “말이 세차장이다. 미국처럼 기계가 해주는 방식이 아니다. 모두 사람의 힘으로 닦아야 한다. 끔찍한 곳이다.” (대기록에 성공한 뒤 블랑코의 인터뷰 때다. “지금 타고 다니는 게 토요타 4러너라는 SUV다. 쉬는 날이면 내가 직접 차를 닦는다”며 웃는다.)

사는 게 팍팍하다. 야구에 매달리는 것도 지긋지긋하다. 그 무렵 블랑코라고 왜 안 그렇겠나. “다 때려치우고, 돈이나 벌래.” 철없는 투정도 어머니는 익숙하다. 그럴 때마다 아들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따뜻하지만 단호한 한마디를 건넨다. “Para 'delante(파라 델란테)”. “멈추지 말고 계속 앞으로 가거라”는 뜻의 스페인 말이다.

어제(한국시간 2일) 대기록이 나온 직후다. 마운드에서 환호하던 블랑코가 관중석 어딘가를 가리킨다. 어머니 마리아가 지켜보고 있는 곳이었다.

휴스턴 애스트로스 SNS 캡처

/ goorada@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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