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 디지털화폐는 과연 필요한가

한겨레 2024. 4. 3.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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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리포트] 임일섭의 화폐를 다시 생각하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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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년간 화폐와 금융의 영역에서 뜨거운 화두 중의 하나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다. 최근 시비디시 옹호론은 다양한 논거를 내세우고 있지만, 초기에 시비디시 논의를 촉발한 계기는 블록체인 기술의 활용 가능성에 대한 모색이었다. 때마침 부상한 핀테크 열풍과 더불어 블록체인 기술은 금융 혁신에 대한 막대한 잠재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됐다. 한 걸음 나아가 이 기술을 활용해 중앙은행 화폐를 혁신해보려는 시도가 시비디시 도입론의 배경이었다. 이는 논의의 초기인 2017년, 국제결제은행(BIS)의 보고서가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entral Bank Digital Currency)가 아니라 ‘중앙은행 암호화폐’(Central Bank Crypto Currency)라는 표현을 쓴 것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이후 블록체인 기술의 활용도에 대한 회의론이 점증했고, 더불어 시비시시가 아닌 시비디시라는 표현이 자리 잡게 됐다. 이처럼 애당초 시비디시 논의가 최신 기술의 활용 가능성 모색이라는 차원에서 시작되다 보니, 그 기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편익은 과연 무엇이냐는 질문도 꾸준히 제기되었다. 이러한 관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 시비디시는 ‘문제를 찾고 있는 해법’(solution in search of a problem)이라는 표현이다. 일반적으로는 기존 제도의 문제점이나 미흡한 점을 먼저 지적하고, 그 해결방안을 찾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시비디시 논의는 거꾸로 진행된 측면이 있다. 중앙은행 화폐의 디지털화라는 ‘해법’이 먼저 제시되고, 이 해법이 무슨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인가를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진행됐다는 얘기다. 수년간 논의를 거쳐 대체로 합의에 도달한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이는 현 통화제도에서 화폐의 두 가지 용도, 즉 일상적 지급수단(범용 혹은 소매용)으로서의 화폐, 그리고 최종 결제자산(기관용 혹은 도매용)으로서의 화폐에 각각 대응한다. 일단 두 번째 문제부터 보자.

기관용 시비디시의 역할과 의의

전자상거래 확산과 더불어 비대면 지급결제의 안전성과 효율성이 중요해졌고, 팬데믹 위기 당시 재난지원금 지급에서도 경험했듯이 사용처와 사용 기간이 제한된 화폐의 유용함이 부각됐다. 그러나 그동안 활용된 에스크로 서비스나 전자 바우처 등은 복잡한 거래 과정으로 인해 비효율적이었다. 이 비효율성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법’이 새로운 중앙은행 디지털화폐, 즉 기관용 시비디시다.

에스크로 서비스나 바우처 기능을 보다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대체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급수단인 예금이 스마트계약을 활용한 프로그램이 내장된 화폐, 즉 예금 토큰으로 대체돼야 한다. 그리고 이 예금 토큰을 이용한 거래가 최종 결제되기 위해 분산원장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결제자산, 즉 기관용 시비디시가 필요하다. 이 새로운 시스템은 민간화폐가 지급수단으로 사용되고, 중앙은행 화폐가 결제자산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이중통화제도의 틀을 유지하지만, 예금토큰이라는 새로운 지급수단과 기관용 시비디시라는 새로운 결제자산으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새롭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현재의 결제자산인 중앙은행 준비금은 이미 디지털화돼 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기관용 시비디시가 기존의 중앙은행 화폐와 차별화되는 지점은, 준비금 관리 기술에 있다. 예금 토큰이라는 지급수단이 반드시 기관용 시비디시라는 새로운 결제자산이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지만, 어찌 됐든 이는 본질적으로 기술적인 문제다. 사용자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예금 토큰의 유용성이지, 그 결제가 이루어지는 시스템의 기반 기술이 아니다. 은행 고객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신속하고도 편리한 자금관리와 이체일 뿐, 거래은행의 전산시스템이 기반을 두는 운영체제의 기술적 특성은 이른바 ‘백 엔드’ 영역의 문제다. 또한 화폐의 중요한 속성 중의 하나가 보편적 수용성(general acceptance)임을 상기한다면, 특정 유형의 거래를 위해 보편적 수용성을 의도적으로 훼손하는 예금 토큰의 유용성도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범용 시비디시의 필요성?…ECB의 설명

이제 시비디시 논란의 핵심인 첫 번째 문제, 즉 범용(소매용) 화폐로서의 시비디시를 살펴보자. 범용 시비디시라는 ‘해법’이 해결하려는 ‘문제’는 다양하다. 마이너스 금리 등 통화정책 수단의 실효성 제고, 불법거래 차단과 감시, 나아가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대응 등등. 여기에는 현금의 폐지, 프라이버시 침해 가능성 등과 관련된 쟁점들도 섞여 있는데, 지면의 제약상 스테이블코인 문제만 간단히 언급한다.

민간화폐로서의 스테이블코인(기존 화폐 가치에 연동되는 암호화폐)이 안정성을 갖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와 경쟁하는 새로운 화폐의 도입이 아니라 기존의 이중통화제도로의 편입, 즉 규제와 감독이다. 만약 그 규제가 스테이블코인의 지급준비금을 전액 중앙은행에 예치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라면, 이는 스테이블코인을 범용 시비디시로 만드는 것과 동일해진다. 이른바 ‘합성 시비디시’(Synthetic CBDC)가 그것이다. 여기서 스테이블코인 발행자는 중앙은행 업무의 대리인에 불과하다. 범용 시비디시가 왜 필요하냐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주요국 중앙은행 중에서 범용 시비디시 도입을 꾸준히 준비해온 곳은 유럽중앙은행이다. 유럽중앙은행의 ‘디지털 유로’ 논의를 주도하는 울리히 빈트자일(Ulrich Bindseil)에 따르면, 범용 시비디시 도입은 혁명적인 변화가 아니다. 오히려 기술 변화에 부응하면서 기존 체제의 구조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다. 그가 말하는 기존 체제는 2계층(two-layer) 통화제도인데, 이 제도의 핵심은 범용 지급수단으로서 공공화폐와 민간화폐의 ‘공존’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디지털화 진전에 따라 현금 사용이 줄면서, 민간화폐만 지급수단으로 사용될 우려가 커지고 있고, 이는 그동안 잘 작동해온 2계층 통화제도의 훼손을 의미한다. 그래서 기존 통화제도의 보존을 위해 범용 시비디시가 필요하다는 게 그의 논리다. 그리고 범용 시비디시가 은행예금을 대체할 우려, 즉 ‘탈중개화’ 가능성에 대해서는 범용 시비디시의 인당 보유량 제한 등을 해법으로 제시한다. 디지털 유로의 목표는 은행 예금의 대체가 아니라 기존 현금의 대체이기 때문이다.

결국 관건은 지급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공급 주체

여기서 관건은 현존 통화제도에 대한 이해다. 그동안 필자의 기고문을 꾸준히 읽어온 독자라면, 빈트자일의 2계층 통화제도가 필자가 언급해온 이중(two-tiered) 통화제도와 미묘하게 다름을 눈치챘을 것이다. 빈트자일의 2계층 통화제도에서는 공공화폐와 민간화폐 모두가 지급수단으로 기능하며 공존하지만, 필자의 이중통화제도에서는 민간화폐가 지급수단으로 기능하고, 공공화폐가 결제자산으로 역할한다. 후자에서는 지급수단으로서 공공화폐(현금)의 역할이 없다.

필자가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현재의 이중통화제도는 다수의 민간은행이 은행권을 발행하고 예금을 취급하던 시절, 민간화폐의 신용위험을 해결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믿을만한 민간은행의 화폐를 결제자산으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형성됐다. 그리고 그 믿을만한 민간은행이 중앙은행으로 진화했다. 이 과정에서 지급수단의 공급과 결제자산의 제공이라는 두 기능은 점차 분리됐고, 각각 민간은행과 중앙은행의 역할이 되었다. 물론 민간의 시장경제가 덜 발전한 나라에서 정부와 공기업이 시장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처럼, 은행제도가 덜 발달했거나 민간 지급수단의 인프라가 부족한 나라에서는 중앙은행 화폐인 현금이 지급수단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민간화폐 공급이 부족하거나 사용이 불편하지 않은 나라에서, 공공화폐가 지급수단으로서의 역할을 분담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이것이 현대 이중통화제도의 작동원리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공공화폐의 기본 역할이 결제자산이라고 하더라도, 민간화폐의 안정성은 공공화폐로의 교환 가능성을 의미하므로, 디지털화된 세상에서도 민간에게 제공될 수 있는 공공화폐가 있어야 한다는 반론이 그것이다. 그러나 현대 화폐제도에서 민간화폐의 안정성, 액면가를 보장하는 것은 공공화폐로의 교환이 아니라 예금보험의 역할이다. 지난해 말 기준 우리나라의 현금통화 잔액은 166조원으로, 단기 결제성 예금 잔액 1027조원의 16%에 불과하다. 현대 통화제도는 예금의 현금으로의 교환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예금의 현금으로의 교환 가능성을 공적 기구가 보증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교환할 필요성이 없도록 한다.

그래도 여전히 의문이 남을 것이다. 지급수단의 공급을 민간이 전담하는 통화제도는 과연 바람직한가? 숱한 자산 버블의 형성과 붕괴, 금융위기와 뱅크런의 경험은 현 화폐제도의 근본적인 결함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범용 시비디시의 급진적 판본인 주권화폐론의 문제 제기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거론된 근본적인 개혁 요구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배경으로 한다. 이것이 다음의 주제다. (위 내용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필자가 소속된 기관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임일섭 예금보험공사 예금보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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