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함은 기본, 폐품도 예술로 만든 ‘色의 마술사’

허윤희 기자 2024. 4. 3.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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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회 이중섭미술상 김봉태

남들이 다 단색화로 갈 때도 그는 묵묵히 제 길을 걸었다. 강렬한 원색과 기하학적 형태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화가 김봉태(87). 한국 추상미술 1세대를 대표하는 그가 올해 36회 ‘이중섭 미술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역대 최고령 수상자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1세대 추상화가 김봉태가 서울 평창동 자택에 걸린 회화 '축적' 시리즈(2013) 앞에 앉아있다. /고운호 기자

서울 평창동 작업실 겸 자택에서 만난 작가는 “2012년 이중섭 미술상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인연이 있는데, 이 나이에 상을 받으니 좋다”며 웃었다. “상이라는 게 이렇게 용기를 주네요. 내가 하는 작업에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구나, 확인받은 기분입니다.”

이우환·윤명로·김종학·방혜자 등이 서울대 회화과 입학 동기다. 196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20년 넘게 LA에서 작업하며 기하학적 조형을 실험했다.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 특별전에서 이 시기 ‘그림자 연작’을 볼 수 있다. 2차원의 기하학적 형태를 그림자를 통해 3차원 입체로 확장한 1970년대 작업이다. 1986년 덕성여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다시 한국에 정착했다.

지난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렸다. 미술관은 “당시 한국 미술계를 주도한 모노크롬 화법을 따르지 않고 조형의 본질을 원색의 색채와 기하학적 형태 작업을 통해 추구해왔다는 점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소개했다. 작가는 “오랫동안 한국을 떠나 있다가 돌아오니 다들 단색화를 하고 있더라. 특히 나와 가까운 작가들이 많았지만, 내가 하던 작업을 바꾸면서 따라갈 길은 아니었다”고 했다.

회화 같은 조각, 조각 같은 회화가 특징이다. 원색이면서도 오묘한 효과를 내기 때문에 ‘색의 마술사’라고도 불린다. “어릴 때부터 컬러의 경이로움에 매료됐다”는 그는 인터뷰 내내 컬러 예찬론을 펼쳤다. “유화를 배우기 전부터 반 고흐나 마티스 같은 화려한 색채에 끌렸지요. 우리가 옷을 입어도, 경치를 봐도 색이 먼저 강하게 다가오잖아요. 컬러가 먼저, 그다음이 형태예요.”

펼쳐진 상자를 그린 '댄싱 박스'(2010). /작가 제공

최근엔 버려진 상자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하고 있다. “늘 다른 것, 새로운 걸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뭐가 튀어나와야 하는데 안 나왔다”며 “어느 날 집에 오는 길에 보니 골목에 버려진 박스가 너저분하게 쌓여 있더라. 마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같았다”고 했다. “인간들도 상자처럼 고정된 틀에 갇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틀을 깨고 자유를 발산하려는 인간의 몸부림을 표현하고 싶었나 봅니다.”

집에 있는 박스는 버리지 않고 죄다 모은다. 계단 위에서 떨어뜨려 일그러진 형태 그대로 사진을 찍은 뒤 드로잉을 하고, 구성을 변형해가며 작업을 한다. “박스라는 게 우리가 먹고, 입고, 쓰고 남은 흔적들이죠. 세워놓은 박스가 자꾸 쓰러지니까 ‘댄싱 박스’라는 이름의 시리즈가 시작됐고, 지금은 ‘펼쳐진 박스’ ‘플라잉 박스’로 계속 진화하고 있어요.”

어떤 작가로 기억되길 바라냐고 묻자 그는 단박에 “컬러리스트”라고 답했다. “내게 검은 옷은 장례식 갈 때나 입는 옷”이라며 “부정적인 것, 죽음, 어둠이 싫다. 사람들이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면서 새로운 희망을 갖도록 밝고 역동적인 작품을 하고 싶다”고 했다.

지금도 매일 아침 눈뜨면 작업실로 가는 현역이다. 다음 달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인전도 앞두고 있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게 좋았고 아마 죽을 때까지 그릴 것”이라고 했다. “내 안에 무엇이 많이 있을 텐데, 얼마만큼 어떻게 들어 있는지 모르니까 죽을 때까지 찾아보는 거죠. 나는 아직도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겠고, 내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겠거든. 그러니까 끝까지 하는 거예요.”

☞서양화가 김봉태

1960년 국전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며 ‘60년 미술가협회’를 결성했고, 1962년에는 ‘악튀엘’ 창립에 가담하며 박서보·김창열·윤명로 등과 함께 추상 회화를 주창하는 앵포르멜 운동을 펼쳤다. 1960년대부터 미국 LA에서 활동하며 동·서양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기하학적 형태를 실험했다. 1986년 덕성여대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에 정착했다.

서울 평창동 작업실에 앉아있는 서양화가 김봉태. /고운호 기자

[심사평] 버려진 상자에도 활기 불어넣어… 중섭을 닮은 ‘창조의 열망’

김봉태의 60년 화업은 변화 없음에서 변화를 모색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그의 화면의 근간은 구조적이면서도 경쾌한 표현을 동반한 것으로 이어졌다. 흔히 말하는 기하학적 추상의 패턴을 지속시키면서 풍부한 내면을 가꾸어온 것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중섭과 김봉태는 새로운 소재의 발견과 이를 창조적 영역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닮았다는 사실이다. 이중섭이 피란 시절 버려진 담뱃갑 은지를 바탕으로 한 작업과 김봉태가 근래에 버려진 종이 상자를 바탕으로 하는 작품은 그 발상에서나 구현의 이채로움에 있어 서로 연결된다.

이중섭의 은지화는 가장 독창적인 영역일 뿐 아니라 헤어진 가족과의 만남이라는 절절한 심회를 구현해냈다는 점에서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김봉태의 종이 상자들은 같은 버려진 폐품이란 점에서 또 다른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버려진 빈 상자가 김봉태에 의해 새로운 삶을 얻게 됐다. 버려진 종이 상자를 펴서 춤추는 모양을 재현시킴으로써 물건을 싼다는 본래의 기능을 벗어나 순수한 창조물로 되살아난 것이다. 창조의 열망, 희열이 넘친다는 점에서 이들의 예술은 어떤 공통점을 지향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창작의 힘을 발견하게 된다.

제36회 이중섭미술상 심사위원회 강승완·김찬동·오광수·조은정·진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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