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말 못해요? 그럼 우리가 베트남어 배울게”

영양/강지은 기자 2024. 4. 3.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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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일꾼·이주민 위해, 농어촌 주민들 ‘주경야독’
지난 1일 경북 영양군 다문화지원센터의 베트남어 수업에 참여한 주민들이 책상에 베트남어 알파벳 카드를 깔아놓고 베트남어 공부를 하고 있다. 올해 영양군의 계절 근로자는 1059명이다./강지은 기자

지난 1일 저녁 6시 30분 경북 영양군 다문화지원센터. 주민 11명이 베트남어 공부를 하려 강의실을 찾았다. 이들은 베트남어로 “신짜오(Xin chào·안녕하세요)”라고 외치며 레티항(31) 강사와 인사했다. 강사가 “‘므어’ 글자를 찾아보세요” 하자, 수강생들은 베트남어 알파벳 카드 29개 중 ‘m’ 자를 찾아 집어 들었다.

계절 근로자와 국제결혼으로 농·어촌에 베트남·필리핀 등 외국인이 늘어나면서, 주민들이 외국어 공부에 나서고 있다. 정착한 결혼 이주 여성 일부가 농장을 오가며 통역해 줬지만 한계가 있었고, 불편함을 느낀 주민들은 소통을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2015년 도입 당시 계절 근로자는 19명이었지만, 올해 4만9286명으로 늘었다. 경북 영양의 계절 근로자는 1059명이다. 주민들의 외국어 공부 수요가 늘자 영양군은 지난 2017년부터 베트남어·중국어 수업을 열었다. 처음은 수강생이 적었지만, 최근엔 교실을 가득 채운다고 한다.

그래픽=김현국

이날 영양군 다문화지원센터 베트남어 수업의 수강생 평균 나이는 61세였다. 20년 넘게 고추·상추 농사를 하고 있는 조차연(63)씨는 최근 매년 5명 안팎 베트남 국적 계절 근로자를 받는다. 조씨는 “계절 근로자와 손짓, 발짓으로 소통하는 게 답답해서 베트남어로 직접 대화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달력에 적힌 숫자를 볼 때마다 베트남어로 숫자 표기하는 걸 되새기곤 한다”며 “올해는 월급 줄 때 숫자를 제대로 익혀 걱정 없겠다”고 했다.

1일 베트남어 수업에 참여한 11명의 영양군 주민들. 이들의 평균 연령은 61세다./강지은 기자

결혼한 베트남 아내와 소통하고 싶어 외국어 공부에 나선 주민도 있었다. 작년 6월 베트남 여성과 결혼한 최영채(54)씨는 “아내와 대화하며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아잉 이에우 엠(anh yêu em·사랑해)’인데, 더 다양한 말을 베트남어로 나눠보고 싶다”고 했다. 학교에 늘어난 다문화 동급생을 이해하고 싶다며 부모와 함께 수업을 찾은 딸도 있었다. 정은정(36)씨는 “초등학교 4학년 딸 학급 친구 절반 이상이 엄마가 베트남 출신”이라며 “딸이 친구들끼리 하는 얘기가 궁금하고 베트남 문화를 더 이해하고 싶다고 보채 함께 수업을 듣게 됐다”고 했다. 이날 수업에선 ‘틱(Thích·좋아하다)’이라는 표현을 배웠다. 강사가 “틱 까이 지(thích cai gì·무엇을 좋아해요)?”라고 묻자 한 수강생이 “틱 웡(thích ông·선생님을 좋아해요)!”이라고 베트남어로 답했다.

레티항 강사는 “지난 10년 사이 동네에 베트남 사람들이 상당히 많아졌다”며 “그래서 언어를 가르치면서 동시에 베트남 문화도 어르신들에게 알려주고 있다”고 했다. 그는 “베트남에선 잠옷을 입고 외출해도 되는데, 한국에선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다”며 “이런 부분이 단순 문화적 차이임을 가르쳐 드린다”고 했다. 지난 2012년 한국인과 결혼해 정착한 그는 2019년부터 베트남어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2019년부터 베트남어 수업을 진행한 베트남어 강사 레티항. 레티항씨는 "어릴 적 선생님이 되고 싶었는데, 다문화센터에서 이중언어 강사를 구하며 어릴적 꿈을 이뤘다"고 했다./강지은 기자

주민들이 먼저 베트남어·필리핀어 수업을 개설해 달라는 곳도 있다. 충북 보은군 삼승면 자치위원회는 올해 ‘맞춤형 베트남어 강좌’를 개설했다. 오는 26일까지 열리는 이 강좌는 주민 16명이 수강 중이다. 지역에 외국인 계절 근로자가 유입되자 이들과 소통하고 싶다는 주민들이 지난해 자치위에 건의했다고 한다. 수업은 주 3회 2시간 동안 진행된다. 삼승면 관계자는 “언어는 계속 까먹는데 끝나면 어떡하냐며 수강생들이 수업이 끝나는 걸 아쉬워해 다시 수업을 개최할 계획”이라고 했다.

전남 장성군은 8년 전부터 지역아동센터에 다니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주 2회 2시간씩 베트남어 수업을 진행 중이다. 아동센터 소속 학생은 25명인데, 그중 부모 모두 한국인인 학생은 3학년 여학생 한 명뿐이라고 한다. 장성군 관계자는 “초창기만 해도 ‘한국에 이주했으면, 외국인이 한국말을 배워야 하지’라는 반응이 나왔는데, 수업이 진행될수록 외국어 공부를 통해 문화에 대한 이해도까지 높아져 좋다는 분위기로 바뀌었다”고 했다.

☞계절근로자

파종기·수확기 등에 단기간·집중적으로 일손이 필요한 농·어업 분야에서 합법적으로 외국인을 고용할 수 있는 제도. 계절근로자는 최대 8개월간 우리나라에서 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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