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학생들 ‘한국병합’ 잘 몰라…교과서 기술 늘렸으면”

강성만 기자 2024. 4. 2. 18:2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짬] ‘한국병합’ 펴낸 도쿄여대 모리 마유코 교수

1983년생인 모리 마유코 교수는 책에 자신은 “냉전도 한국의 민주화 운동도 기억에 없는 세대”라고 썼다. 모리 마유코 교수 제공

“일본 학생들은 한국병합(1910년)을 일본의 대륙진출 과정의 한걸음으로 배웁니다. 식민지 시기(일제강점기)에 대해서도 토지조사사업, 신사 강제 참배, 창씨개명, 강제연행 정도밖에 안 배워 한국병합 자체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좀 어렵습니다. 통감부(1905년 을사늑약 뒤 설치)와 총독부(1910년 설치)를 구별 못 하는 학생들도 많을 듯해요. 저희는 (일본의) 대륙진출 역사를 공부하면서 전쟁은 안 좋다거나 비참하다는 식으로 배웠죠.”

최근 한국어 번역본 ‘한국병합-논쟁을 넘어, 다시 살핀 대한제국의 궤적’(열린책들)을 낸 모리 마유코(41) 도쿄여대 국제사회학과 부교수에게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빼앗은 한일강제병합에 대해 일본 젊은 세대들은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묻자 나온 답이다.

이 책의 일본어 원서는 그가 2년 전에 ‘주코신서’ 시리즈로 낸 ‘한국병합-대한제국 성립부터 붕괴까지’다. 그의 도쿄대 박사학위 논문 출판물인 ‘조선 외교의 근대:종속 관계에서 대한제국으로’(2017)를 본 출판사에서 대한제국의 역사에 관해 책을 내자고 집필을 의뢰했다고 한다.

올해로 7년째 도쿄여대에서 조선의 정치와 외교를 강의하는 지은이는 이번 책을 이렇게 자평했다. ‘일본인 학자가 1995년 이후 한국병합을 주제로 학술 성과에 근거해 집필한 첫 대중서.’ 그가 말하는 1995년은 1931년생 농업경제학자인 고 운노 후쿠주가 이와나미신서로 ‘한국병합’을 펴낸 해이다.

지난달 27일 전화로 만난 모리 교수는 책에 자신은 “냉전도 한국의 민주화 운동도 기억에 없는 세대”라고 소개했다.

‘한국병합’ 표지.

먼저 왜 30년 가까이 ‘일본인 학자의 한일강제합병 대중서’가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대중서를 쓰려면 학술 연구가 필요한데요. 우선 한국병합이라는 정치 외교사 연구가 (일본에서) 활발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어요. 고종에 대한 안 좋은 인상도 있었고 대한제국은 어차피 망한 나라라는 생각도 작용했죠. 그러다 1990년대 후반에 고종을 개명군주로 평가하는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의 연구가 나오면서 일본에서도 2000년대 들어 (한말의) 정치외교사 연구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 무렵부터 중국사 연구 분야에서도 ‘중화 조공 책봉 체제’에 대한 새로운 연구 성과가 나왔죠.”

그는 책에서 조선과 청·일 외교 관계를 중심으로 대한제국이 어떻게 일본의 식민지로 떨어졌는지 살폈다. 여기에 청일전쟁의 개전 배경이나 19세기 말 중화질서에 대한 1990년대 이후 일본학계의 새로운 연구 성과를 반영했다. 저자에 따르면 중화 질서의 ‘속국’이었으나 내정과 외교는 자주였던 조선은 청일전쟁 이후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일청강화조약)으로 중국의 조공 책봉 질서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하지만 고종이 대한제국을 세워 전제 정치를 지향하며 입헌군주제를 꾀하는 독립협회 세력을 억누르면서 근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결국 내정과 외교의 자주조차 부인되는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는 책에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때 청이 미국 쪽에 “조선은 청의 속국이면서 자주국”이라는 뜻의 ‘속국자주’를 조약문에 넣도록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는 오카모토 다카시 교수의 연구 결과(2004, 일본어책 ‘속국과 자주 사이’ 중)를 반영하기도 했다.

책의 전체 기술은 한말을 바라보는 일본 학계의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강화도조약에서 청일전쟁 직후까지의 시기를 두고 “일본이 군사력을 배경으로 조선을 조약 체제에 의한 근대 국가 관계로 끌어들였다”고 평하거나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출범한 김홍집 정권의 ‘갑오개혁’에 큰 의미를 부여한 점 등이 그렇다.

그는 대한제국은 왜 근대 자주국가로 나아가지 못하고 패망했냐는 물음에 “아무래도 고종의 정치가 걸린다”고 답했다. “일본 사료를 보면 고종은 일단 조약을 맺어도 명분이 있다면 나중에 그걸 무효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음을 엿볼 수 있어요. 여기에 더해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잘 길러지지 못한 점도 있었죠. 고종은 나라(종묘사직)를 지키려고 하는데 당시 황제를 지키려는 움직임은 한반도 전체에서 그다지 보이지 않아요.” 그는 “(대한제국 시기)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를 지향했는데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조선에서) 공화제를 지향하는 움직임이 큰 걸 보면 대한제국 지식인들 사이에 일본보다 다양한 정치 지향이 있었던 것 아닌가 생각한다”며 “그 점이 국민 통합을 어렵게 하지 않았나 본다”고도 했다. “고종은 중국 황제를 모델로 하고 서구 열강의 황제상도 참고해 대한제국을 독자적인 황제 중심 국가로 만들려 했고, 또 대한제국 시기에 갑오개혁과 독립협회 활동 덕에 도시 중심의 국민 형성이 어느 정도 성공했어요. 이 두 가지 방향은 대한제국이 자주적인 근대국가로 발전할 근거가 될 만한 일이었으나 후자는 고종이, 전자는 일본이 없앴죠.”

2년 전 일본어로 낸 책 번역 출간 “일본 학자가 쓴 한일병합 대중서는
1995년 운노 후쿠주 교수 이후 처음
‘조공책봉 질서’ 등 이후 연구 반영”


“병합 서술량, 한일 교과서 큰 차이
한국은 ‘2차한일조약’을 ‘늑약’으로
가르친다는 걸 일본 학생들이 알면
두 나라 미래세대 교류에 도움될 것”


2010년부터 2년 동안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 박사 과정에서 공부하기도 한 모리 교수는 자신의 연구가 한국과 일본의 역사 화해에 기여하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어떻게 역사화해가 가능하냐는 물음에 그는 “일본 사람이 가진 역사 지식이 한국사람과 같지 않다는 점을 먼저 말하고 싶다”고 했다. “한국 고교 역사 교과서의 한국병합 과정과 식민지 시대 서술은 약 140쪽인 반면 일본 교과서의 한국병합 서술은 2쪽에 불과해요. 일본 교과서는 1945년 이전 근대사 서술에서 메이지유신 성공과 1941년 태평양 전쟁과 1945년 핵폭탄 피해를 중요하게 다룹니다. 이는 현재 일본의 (전쟁을 포기하는) 헌법 9조와 이어지기 때문이죠.”

그는 현 일본 역사교육 체계에서 교사가 1910년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을 다루기는 쉽지 않다면서 이런 바람을 나타냈다. “일본 교과서에 작은 박스 형식으로라도 제2차 한일조약(을사늑약)이나 한국병합을 한국에서 어떻게 배우고 있는지 서술해주면 좋겠어요. 일본 교과서는 현재 2차 한일조약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한성에 한국 외교권을 통할할 통감부를 두고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이 되었다’는 정도로만 기술합니다. 한국 교과서는 1쪽 분량인데요. 현재 한일 관계의 가장 큰 문제가 이 조약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입니다. 한국에선 이 조약이 무효라 이에 기반한 병합도 무효라고 봅니다. 하지만 일본은 강요된 조약이지만 합법이라고 보죠. 일본 학생들은 이 조약에 이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상상도 못 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 조약을 ‘을사늑약’이라고 배운다는 걸 알면 미래세대 교류에 도움이 될 겁니다. 늑약이란 말이 강제로 부당하게 맺은 조약이란 뜻이잖아요.” 그는 이어 “일본인들이 한국과 한국인을 나눠 생각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 한국인을 직접 만나야 한다”고도 했다.

‘한국병합’ 일본어 책 표지.

을사늑약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듣고 싶다고 하자 모리 교수는 “(조약 체결 과정에 대한) 한국 쪽 사료가 없어 판단이 어렵다”며 덧붙였다. “일본 쪽 사료를 보면 이토가 조약 체결을 위해 고종을 강압적으로 밀어붙입니다. 고종이 한 나라의 황제인데 이토가 왜 그토록 강압적으로 압박할 수 있었는지 배경과 의도가 잘 이해가 되지 않은 측면이 있습니다. 한국 쪽 사료가 있다면 이해에 도움이 될 텐데요.”

그는 고교 시절인 2000년에 6·15 남북정상회담을 보며 한반도 통일에 관심을 갖게 된 게 결과적으로 한국 근대사 연구로 이어졌다고 했다. “대학도 국제관계 및 지역연구 전공으로 들어가 학부 논문은 한국이 통일되었던 19세기 말 시기를 공부해 유길준과 후쿠자와 유키치 사상을 비교해 썼죠.”

앞으로 연구 계획을 두고는 “한국병합을 세계사 속에서 연구하고 싶다. 구체적으로 하와이와 류큐(오키나와) 병합 과정과의 비교 연구에 관심이 있다”고 밝혔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