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보증 잘못 섰대” 500만원 안고 서울 달려온 75살 아버지

고경주 기자 2024. 4. 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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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피싱 전화 받고 충남 당진서 상경
지구대 도움으로 딸과 재회하고 피해 막아
지난달 26일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은 70대 ㄱ씨가 딸에게 주려고 충남 당진에서 서울까지 들고 온 현금 500만원. ‘서울경찰’ 유튜브 갈무리

“아빠, 나 보증을 잘못 섰어. 당장 돈 안 갚으면 나한테 해코지한대.”

지난달 26일 오전 충남 당진시에 사는 ㄱ(75)씨는 전화를 받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우리 딸’이라고 저장된 번호 너머로 딸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ㄱ씨의 딸은 “보증을 잘못 서서 빚 2000만원에 이자 700만원이 붙어 총 2700만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전화는 딸의 목소리를 흉내 낸 ‘보이스피싱’이었지만 이 사실을 모른 ㄱ씨는 현금 500만원을 품에 안고 당진에서 딸이 살고 있는 서울 용산구 후암동까지 달려왔다.

문제는 ㄱ씨가 딸의 정확한 집 주소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서울까지 오면서 딸에게 여러 번 전화를 걸어봤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ㄱ씨의 휴대전화는 ‘악성 앱’에도 감염된 상태라, 보이스피싱 조직이 원격으로 딸과의 전화 연결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딸이 납치를 당했다고 생각한 ㄱ씨는 거리를 헤매다 결국 이날 오후 1시20분께 근처 지구대에 도움을 청했다.

1일 유튜브 채널 ‘서울경찰’에 올라온 영상을 보면, 머리가 하얗게 센 ㄱ씨가 다급하게 서울 용산경찰서 용중지구대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담겨 있다.

ㄱ씨는 “딸을 만나야 하는데 정확한 주소지를 모르겠다”며 경찰관에 도움을 청했고, 얼굴이 허옇게 질린 채 횡설수설하는 ㄱ씨의 이야기를 들은 경찰은 보이스피싱을 의심했다. 경찰관 휴대전화를 이용해 ㄱ씨의 딸에게 전화를 걸자 ㄱ씨의 딸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ㄱ씨의 딸은 “보증을 서거나 위험에 처한 일이 전혀 없다고 했다”고 했지만 ㄱ씨는 딸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곧바로 믿지 못했다. ㄱ씨의 딸 역시 “우리 아버지가 왜 서울에서 경찰과 함께 있냐”며 의아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오해는 근처에 있던 ㄱ씨의 딸이 지구대에 도착하면서 풀렸다. 한달음에 당진서 서울까지 올라온 아버지를 본 딸은 “아빠 내가 그럴(보증을 설) 사람 아닌 거 알잖아”라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ㄱ씨는 딸을 직접 만나고 나서야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불안감을 떨칠 수 있었다. 이후 경찰은 ㄱ씨와 딸에게 휴대전화를 초기화하거나 악성 앱을 삭제하는 방법 등을 안내하기도 했다.

지난달 26일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고 충남 당진에서 서울까지 현금 500만원을 들고 상경한 70대 ㄱ씨가 서울 용산경찰서 용중지구대에서 무사히 딸을 만난 장면. ‘서울경찰’ 유튜브 갈무리

용중지구대 관계자는 2일 한겨레에 “딸 번호로 전화가 와 울먹이며 ‘아빠’라고 부르면 누구라도 가슴이 철렁할 수밖에 없다”며 “만약 어르신 주변에 누구라도 있어서 그 사람의 전화를 빌려 딸에게 전화해 보았다면 더 빨리 해결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ㄱ씨의 경우, 악성 앱 주소가 포함된 문자 메시지를 전송해 악성 앱을 설치하게 하거나 전화 통화를 유도해 금융정보·개인정보를 탈취하는 문자사기(스미싱)와 보이스피싱이 결합된 사례로 볼 수 있다.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관계자는 이날 “보이스피싱 범죄가 진화하며 스미싱과 결합된 사례들까지 나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악성 앱을 설치해 실행할 경우 범죄자들이 휴대폰을 원격조종할 수 있다”며 “이를 통해 전화번호부를 조작해 가족으로 저장된 번호로 전화를 걸거나, 통화 발신 자체를 차단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 관계자는 “휴대전화 속 개인정보 등을 활용해 금융 앱에서 예금을 전액 이체하거나, 피해자 명의로 소액 대출을 받을 수도 있으니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한국인터넷진흥원에서 안내하는 보이스피싱·스미싱 예방법 및 대처방법이다.

■ 보이스피싱·스미싱 예방법

① 주민등록증, 여권, 주민등록등본, 신용카드 번호, 금융기관 일회용 비밀번호 생성기(OTP) 번호 등 민감정보가 포함된 사진이나 메모를 휴대전화에 보관하지 않는다.

② ‘원 유아이’(One UI) 6.0 이상이 탑재된 삼성 스마트폰을 사용한다면 ‘보안 위험 자동 차단’ 기능을 활용해 출처가 불분명한 앱이 설치되지 않도록 설정해둔다.

③ 본인 모르게 개통된 휴대전화를 조회하거나 추가 개통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명의도용방지서비스’(www.msafer.or.kr) 누리집에서 가입사실 현황조회 또는 가입제한 서비스 등을 이용할 수 있다.

보이스피싱·스미싱 대처방법

① 이미 악성 앱이 설치됐다면, 모바일 백신 앱을 활용해 악성 앱을 삭제하고, 데이터를 백업한 뒤 휴대전화를 초기화한다.

② 자금 이체 등의 피해가 발생했다면 금융회사 콜센터 또는 금융감독원 콜센터(1332)로 전화해 지급정지를 요청하고 피해 구제를 신청한다.

고경주 기자 go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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