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직장 성희롱 상담 ‘직접’ 한다더니…인력도 못 구한 정부

최윤아 기자 2024. 4. 2. 15:1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고용노동부, 고용평등상담실 예산 전액 삭감한 뒤
상담지원관 16명 중 절반 못채워 피해자 지원 공백
지난해 10월 전국가정폭력상담소협의회,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등 569개 여성단체와 시민사회단체, 국회의원 등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관 앞 계단에서 여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지원 예산 142억원을 삭감하기로 한 정부 결정에 대해 전면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지역의 한 민간 고용평등상담실(고평실)에서 일하는 활동가 ㄱ씨는 지난달 황당한 일을 겪었다.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가 지방 고용노동청을 찾았는데 ‘초기 상담은 민간 고평실에서 받으라’는 안내를 받았다며 ㄱ씨가 일하는 고평실로 문의를 해온 것이다. 정작 ㄱ씨가 속한 고평실은 올해 초 고용노동부가 20여년간 해온 민간 고평실 지원 예산을 삭감하면서 운영이 사실상 중단된 상태였다. ㄱ씨는 “고용노동부의 갑작스런 예산 삭감으로 고평실 운영이 중단됐는데, 지방 고용노동청에서는 이 사실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인력이 없어서인지 피해자를 다시 고평실로 보냈더라”며 “올해 이런 사례가 10건 정도 된다”고 말했다.

고용노동부가 올해 전국 19개 민간 고평실 지원 예산(12억1500만원)을 전액 삭감하면서 직장 내 성희롱·성차별 등 피해자 지원 업무에 혼선과 공백이 발생하고 있다. 예산 삭감으로 운영이 어려워진 일부 고평실이 문을 닫았는데, 지방 고용노동청을 통해 직접 피해자 상담 지원을 하겠다던 고용노동부가 석달째 목표한 상담 인력의 절반도 채용하지 못하면서 차질이 빚어지고 있어서다.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양경숙(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일 고용노동부로부터 제출 받은 자료를 보면, 현재 전국 8개 지방 고용노동청에 배치된 ‘고용평등상담지원관’은 총 7명(서울·대전·대구·광주·중부·경기·광주에 각 1명, 3월25일 기준)으로, 고용노동부가 목표한 16명(각 청당 2명)의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 부산 고용노동청에는 아직까지 단 1명도 배치되지 않았다.

고용노동부는 “상담인력을 채용하지 못한 부산은 고용평등전담 근로감독관 등이 상담 업무를 겸임하고 있으며, 올해 초 48개 고용노동(지)청에 배치한 권리구제지원팀 역시 성희롱 피해자 초기 상담을 할 수 있다”며 “피해자 심리 치료 지원 등 민간과 연계해 피해자를 지원할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예정대로 인력 충원이 이뤄진다고 하더라도, 기존 19개 고평실 상담 인력(30여명)에는 미치지 못하는 데다, 그간 쌓아온 20여년의 노하우를 대체하기는 부족하다 지적이 나온다.

고용평등상담지원관은 지방 고용노동청에 배치돼 직장 내 성희롱과 성차별 등의 사안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에게 초기 상담을 해주고, 진정·고소 등 향후 대응 절차를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2000년부터 지난 24년 동안 고평실이 피해자에게 제도 안내와 각종 상담을 제공하고 고용노동부가 고평실 운영 예산의 일부를 보조하는 민·관 협력 방식으로 직장 내 성희롱 ·성차별 등 피해자 지원이 이뤄져왔다. 피해자 입장에선 고용노동청보다 민간 고평실의 진입 장벽이 낮고, 정부는 민간이 보유한 상담 인력과 경험, 성인지 역량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효율적인 체계로 평가 받아왔다.

특히 고평실 상담사는 피해자가 조사 과정에서 근로감독관에게 성차별적 대우나 2차 피해를 입었을 때 전화로 항의하고 조사에 동행하는 등 다방면으로 피해자를 지원해왔다. 오순옥 서울여성노동자회 상담활동가는 “지난해 근로감독관이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에게 ‘이 아줌마야!’라며 책상을 탕탕치고, 핵심 증거를 확인조차 하지 않는 등 매우 부적절하게 조사를 진행해 전화로 경위를 묻고 추후 조사에 동행해 드렸다”며 “바로 며칠 전에도 한 성추행 피해자가 근로감독관으로부터 ‘적극적으로 싫은 내색은 안하셨네요?’ ‘그 전화를 왜 받으셨어요’라고 말하는 등 2차 피해를 입고 고평실로 왔기에 감독관 교체 등 제도를 안내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최수영 서울여성노동자회 상담실장도 “근로감독관이 반드시 확인해야 할 부분이지만 피해자가 직접 전달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되면 의견서를 제출하기도 한다”며 “고용노동청 소속 고용평등상담지원관이 모두 배치된다고 한들, 근로감독관과 같은 기관 소속인데다 상하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 상담지원관이 과연 어느 수준까지 피해자를 지원해 줄 수 있을지 우려스럽다”고 했다.

양경숙 의원은 이에 “지난 20여년간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 등 약자를 보호해온 민간 고평실의 역할을 윤석열 정부가 대신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준비 상황은 미흡하다”며 “더는 피해자 보호에 공백이 발생하지 않도록 전문 상담 인력을 속히 채용하고 그 규모도 확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