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청진동 ‘소울푸드’의 추억…‘뉴 피맛골’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길 위의 자영업자①]

배윤경 매경닷컴 기자(bykj@mk.co.kr), 이하린 매경닷컴 기자(may@mk.co.kr) 2024. 4. 1.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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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점·약국·안경점·전당포 등 ‘그랑서울 청진상점가’ 직원 수백명 거리로
지난달 30일 서울시 종로구 청진상점가 골목. 주말 점심시간대이지만 일부 가게가 문을 닫아 휑한 느낌이다. [사진 = 배윤경 기자]
서울 종로구 그랑서울의 청진상점가가 사라진다. 정식 명칭보단 ‘뉴(New) 피맛골’로 익숙했던 곳이다.

옛 피맛골 자리에 들어서 각종 전통있는 한식과 트렌디한 프랜차이즈가 공생하던 청진상점가. 이 곳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서민의 피맛골
조선시대 종로는 궁궐과 관가가 가까워 가마나 말을 탄 고관대작 왕례가 잦은 큰길이었다. 하급 관료나 서민들이 큰길을 가다 고관대작을 만나면 길가에 엎드려야 했는데, 이런 일이 빈번하자 이를 번거롭게 여긴 서민들이 아예 큰길 양쪽 뒤편의 좁은 골목을 찾았다.

좁은 골목을 따라 목로주점, 모주집, 장국밥집들이 들어섰고 서민들이 사랑하는 장소가 됐다. 이곳이 바로 말을 피하는 골목, 피맛(避馬)골이다.

뉴 피맛골로 불린 그랑서울 청진상점가. [사진 = 배윤경 기자]
종로에서 가장 서민적인 길이자 맛집이 즐비했던 이 곳은 서울시의 도시환경정비사업, 청진동 재개발 등을 거치며 광화문D타워, 르메이에르종로타워, 타워8, 그랑서울 등에 일부 ‘맛집’ 형태로 들어서 명맥을 이어갔다.

특히, GS건설이 시공한 그랑서울엔 옛 피맛골의 성격을 담아 대형 프랜차이즈나 해외 메뉴 음식점을 최대한 배제한 한식 위주의 식객촌이 피맛골 형태로 생겼다.

시간이 지나며 식객촌이 사라지고 쉐이크쉑버거, 프랜차이즈 카페, 글로벌 음식점 등이 속속 들어섰지만 그랑서울 오픈 당시부터 이 곳을 지킨 한식 ‘터줏대감’들이 있어 이 곳은 청진상점가란 정식 명칙보단 뉴 피맛골이 자연스러웠다.

종로 한복판, 문 닫은 가게 즐비
뉴 피맛골을 품은 그랑서울은 서울지하철 1호선 종각역 1번 출구 바로 앞이다. 5분도 채 걷지 않는다.

지난달 30일 오후 1시께 종각역 인근. 오피스 상권이 무색하게 인근 나들이객으로 역사가 북적였지만, 지하철 출구와 바로 연결돼 있음에도 그랑서울 지하 1층, 청진상점가는 썰렁했다. 가게 대부분이 문을 닫은 탓이다.

그랑서울 청진상점가 문 닫은 가게들. [사진 = 이하린 기자]
드문드문 건물에 들어선 사람들도 어둡고 썰렁한 건물 분위기에 돌아나가기 일쑤였다. “진짜 휑하네”, “여기 뭐하는 데야?” 출입구를 나서며 사람들이 쑥덕이기도 했다.

같은 시간, 도보 3분 거리의 광화문 D타워가 점심 방문객으로 북적인 것과는 상반되는 분위기다. 그랑서울 1동 지하 1층과 1층 일부 가게가 내부까지 다 철거돼 있고, 제법 많은 가게에 영업 종료를 알리는 글귀가 붙었다.

지난달 30일 오후 1시께 서울지하철 1호선 종각역과 연결된 그랑서울 지하 1층 청진상점가 일부. [사진 = 배윤경 기자]
뉴 피맛골, 청진상점가는 곧 사라진다. 그랑서울 1동을 임차해온 GS건설이 이달 말 짐을 싸기 때문이다.

코크렙청진제18호(타워1동) 위탁관리리츠가 제시한 임대차 재계약 비용이 상당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해당 리츠는 국민연금이 최대주주(지분 99%, 코람코자산신탁 1%)로 있다.

“재계약 된다고 했는데” 읍소하는 소상공인
국민연금은 그랑서울 준공 직후인 2014년 1조2000억원의 공적자금을 투입, 리츠를 이용해 코람코자산신탁과 함께 GS건설의 그랑서울을 사들였다. 코람코자산신탁은 타워 1동(10년)과 2동(20년)을 GS건설에 임대했다.

문제는, GS건설이 1동 계약 기간이 끝나 짐을 싸면서 전대한 가게들도 일말의 재계약 희망없이 나가야 하는 처지가 됐다는 점이다. 가게들은 읍소하는 처지가 됐다.

계약 기간이 끝나감에도 가게들의 답답한 속사정은 뭘까.

청진상점가에 입점한 가게들. 50곳이 넘는 점포가 모여 있다. [사진 = 배윤경 기자]
청진상점가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A씨는 “계약 당시 ‘국민연금이랑 대기업이 운영하는 곳인데 나가라 하겠냐. 10년 이상 오래 오래 장사하고 우리도 계속 관리 잘하겠다. 계약 끝나도 연장 가능하다’고 했다. 많은 점주가 들었다”며 “여기서 장사한지 3~4년밖에 안 된 가게들도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라. 누가 3~4년만 영업하려 이 종로 한복판을 들어오겠나”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가게 주인 B씨 역시 “가게를 해보면 알겠지만 초반은 대출도 많고 마이너스(-)다. 몇 년 정도 적자를 감수해야 조금씩 이익을 보기 시작하는데, 코로나 사태를 지나 조금 (사정이) 피려 하니 나가라는 것”이라며 “무조건 재계약을 해달라는 게 아니다. 입점 조건만이라도 듣고 조건이 맞으면 인테리어를 다시 해서라도 들어오고 싶다는 건데, 계약 기간이 끝날 때까지 만나주지도 않고 날짜 맞춰 나가라고만 한다. GS건설과 코람코 측 둘다 ‘저쪽이랑 얘기하라’며 떠넘기기만 했다”고 사정했다.

그랑서울 청진상점가 문 닫은 가게들. [사진 = 이하린 기자]
지난달로 계약이 끝난 가게들은 지난주 합의서에 서명해 그나마 ‘운영 기간’을 벌었다. 합의서에는 이달까지 영업하는 대신 특정 날짜까지 폐업신고를 하고, 이번 일을 외부에 누설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수천만원에 달하는 원상복구 비용도 일부 차감해 주겠다며 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점주 C씨는 “사인을 안 하면 당장 가게를 뺀다는데 누가 안 하겠나. 다들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했다)”이라며 “어떤 가게엔 ‘새벽에 강제집행해 본 적도 있다. 강제집행한 창고이용료까지 다 받았다. 처음이 힘들지 그 다음은 쉽다’고 엄포를 놨다고 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임시휴업 안내가 걸린 그랑서울 청진상점가 가게. [사진 = 배윤경 기자]
점주들에 따르면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도 그랑서울은 단 한 번의 임대료 인하도 없었다. 최대 수천만원에 달하는 월세 또는 수수료를 가게들은 빚을 져가며 감당했다. 그랑서울의 ‘세’는 국내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짐싸는 직원만 수백명”…길 위의 자영업자
그랑서울 1층에는 SPC그룹의 쉐이크쉑버거 종각점이 자리해 있다. 바로 앞 커피숍은 이미 나갔고 다른 가게들 역시 조만간 짐을 빼야 하는 상황이지만 쉐이크쉑버거는 이번 철거 대상이 아니다.

GS건설과 SPC그룹의 계약서엔 ‘연장 옵션’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인근 점포와는 ‘다른 계약’에 쉐이크쉑버거는 이번에 자리를 지킬 수 있게 됐다.

청진상점가의 D씨는 “우리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SPC그룹은 왜 해줬냐’고 점주가 따졌더니 ‘우리가 왜 똑같이 해줘야 하냐’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며 “이건 대기업의 소상공인 죽이기”라고 참담해 했다.

뉴 피맛골로 불리는 그랑서울 1동 청진상점가. [사진 = 이하린 기자]
GS건설은 “사안 확인 중”이라는 입장이다.

코람코자산신탁 측도 난감하게 됐다. 그랑서울 1동 리모델링을 앞둔 코람코자산신탁은 “GS건설과 입주 가게간 계약서나 오간 대화 내용은 알지 못한다”면서도 “공사가 끝나면 기존 가게도 차별없이 임대 신청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법률사무소 번화의 박세선 변호사는 “국민연금이 해당 건물의 실질적 소유주로서 전대차계약을 임대차계약으로 전환해 승계하는 방식으로 입주한 전차인을 보호하는 것도 고려해봄직하다”고 전했다.

그랑서울 1동 청진상점가에만 50군데가 넘는 가게가 운영 중이다. 종로구청 등 소유자가 다른 몇 군데 점포를 뺀 음식점, 약국, 안경점 모두는 이달까지만 영업이 가능하다. 가게당 직원이 3명이라고만 쳐도 2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일터를 잃는다.

점주 E씨는 “어떻게 일군 가겐데, 제발 대화라도 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읍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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