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 대신 정의 추구, 약자 배려한 ‘학자 군주’ 노무현
한-미FTA 소식에 노 대통령 만나
만류했지만 의지 확고해 실패
반대 글 쓰자 변양균 실장 연락
“청와대서 일했으니 ‘비판 자제’를”
미, 유럽엔 ISD 요구조차 안해
론스타·엘리엇에 거액 배상 빌미
노 대통령, 퇴임 뒤 학자들 초청
장하진·성경륭 등과 집필 계획 논의
“자주 와달라” 했지만 두달 뒤 비보
‘노무현이 꿈꾼 나라’ 묘역에 바쳐
[길을 찾아서] 참여정부 천일야화 60화 에필로그
2005년 7월 나는 청와대를 떠나 대구로 돌아왔다. 청와대에서 일할 때 내 좌우명은 제갈량의 후출사표에 나오는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 나랏일에 전심전력을 다 하고 죽은 뒤에야 멈춘다)였다.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나고 끝없이 회의를 했다. 하루에 8차례 회의를 연 날도 있다. 다른 참모들은 연무관 헬스장이나 수영장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나랏일을 하는데 나 자신을 돌본다는 생각은 내 머리 속에 없었다. 자연히 내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2년반 내내 크고 작은 건강 문제에 시달렸으니 실은 바보였다. 나는 청와대 일이 너무 힘들 때나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 내일 청와대를 그만두고 대구에 내려가는 상상을 하며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다(이 노래는 일본 유학 시절 윤동주 시인의 애창곡이었다). 그러면 기분이 좋아져 스르르 잠이 잘 왔다. 이제 드디어 고향에 돌아왔다. 대통령 정책특보 직함은 유지했으나 아무 할 일이 없었다.
그러던 중 2006년 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소문이 들려 이창동, 문성근, 안희정, 정태인과 함께 청와대에 들어가 노 대통령을 만류했으나 실패했다. 대통령의 의지는 이미 확고했고, 우리들의 반대 논리는 아직 엉성한 수준이었다. 그 뒤 우리도 자유무역협정을 열심히 공부했다. 정태인 비서관은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반대 강연을 수백회 했다. 나는 신문에 반대 글을 쓰는 정도였다. 그 무렵 박봉흠, 변양균 정책실장이 좀 보자고 해서 만났더니 청와대에서 일한 사람으로서 정부 정책 비판을 자제해달라는 부탁을 아주 점잖게 했다. 그러나 나는 청와대 떠날 때 밖에 나가서도 비판할 건 비판하겠다고 공언한 처지였다.
우리들이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반대한 이유는 이렇다. 관세가 폐지되더라도 전자, 조선, 철강 등 한국의 주력 수출품은 이미 무관세라 한국이 얻을 이익은 없다. 관세 인하로 이익 보는 분야는 섬유, 자동차인데, 섬유는 ‘원산지 규정’이라는 복마전이 있어 이익을 보기 어려운 구조다. 유일한 잠재이익이 자동차인데 그것마저 막판 협상에서 한국이 크게 양보했다. 그 대신 ‘투자자-국가 소송제’(ISD)라는 괴물이 등장한다. 한국에 투자한 미국 기업이 한국의 어떤 법률이나 제도 때문에 손해 봤다고 국제투자분쟁조정센터에 제소할 수 있고, 여기서 패소하면 거액을 배상해줘야 하는 제도다. 유럽은 이 제도를 요구하지 않는데, 미국은 요구한다. 실제 이 제도 때문에 한국이 거액을 배상하는 사건이 지금까지 두 건(론스타, 엘리엇) 발생했다. 금액도 금액이지만 이 조항 때문에 한국 관료들이 정책 입안시 미리 위축되어 정책 주권이 위협받는다는 것이 더 근본적 문제다. 미국은 한-미 자유무역협정 직전 오스트레일리아(호주)와 맺은 자유무역협정에서 호주의 요청을 받아들여 투자자-국가 소송제를 빼주었다. 그런데도 한국의 교섭 당국은 이걸 빼지 못했으니 ‘오호! 통재라’. 우리의 반대 논리의 핵심은 바로 투자자-국가 소송제였다. 그 무렵 노 대통령이 “그래도 이정우, 정태인이 애국자야”라고 말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노 대통령은 옹졸하지 않았다.
그 뒤 청와대와 왕래가 없다가 참여정부 막바지에 대통령, 내각, 수석들이 참석하는 참여정부 5년 평가 학술행사(영빈관)에 가서 기조발제를 했다. 또 그 무렵 나는 “참여정부의 빛나는 노을”이라는 글을 언론에 투고했다. 오래전 참여정부가 사방에서 뭇매를 맞을 때는 ‘참여정부는 구름에 싸인 달’이어서 언젠가는 사람들이 진가를 알아줄 날이 올 거라는 글을 청와대 브리핑에 올린 적도 있다. 참여정부가 끝날 무렵 어느 날 연락을 받고 청와대 관저에 가서 노 대통령, 성경륭 정책실장과 점심을 먹고 차를 한잔 했다. 대통령이 용건을 꺼내지 않아 궁금해서 내가 물었다. “오늘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하셨는지요?” “아, 그냥 고마워서 밥 한번 먹자고 한 겁니다. 요즘 밖에서 도와주는 사람은 이 교수 밖에 없어서….” 대통령이 외로워 보였다.
2008년 2월25일 퇴임식 날 대통령과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서울역에서 특별열차를 타고 봉하로 내려갔다. 지방으로 내려가는 최초의 전임 대통령이라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서경석 목사가 조선족 교회 교인들을 대거 이끌고 서울역에 와서 노 대통령 환송 플래카드를 흔드는 장면은 보기에 훈훈했다. 특별열차 안에서 노 대통령은 모든 칸을 돌면서 같이 일한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했다. 노 대통령은 밀양역 광장에 내려 연설을 했다. 독립투사 김원봉이 해방 후 수십년 만에 귀향했을 때 밀양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환영했다고 하는데, 이날도 밀양역 광장을 인파가 가득 메웠다. 봉하 마을에 도착해서는 “야, 기분 좋다!”고 외쳤다. ‘노무현과’에 속하는 정치인이 있다며 청중 속에 있던 유시민 전 복지부 장관을 연단 위로 불러올려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그때는 밝은 미래가 펼쳐질 것처럼 보였다.
노 대통령이 국가 경영에 관한 책을 같이 쓰자고 학자들을 불러 2009년 2월21일(토)과 3월21일(토) 성경륭, 최병선, 김용익, 송기도, 이병완, 장하진, 조기숙, 김은경, 김창호, 김수현, 김성환, 윤태영과 함께 봉하에 내려갔다. 이날 종일 책 집필 계획을 세우던 게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이야. 노 대통령이 나에게 물었다. “이 교수, 차비 대줄 테니 자주 좀 오세요. 요새 서울, 대구 어디 있어요?” “왔다 갔다 합니다.” “사람이 왔다 갔다 하면 안 되는데.” 옆의 권양숙 여사도 웃고 모두 웃었다. 저녁 먹고 서재에 모여 차 한잔 할 때다. 노 대통령 손이 계속 앞에 놓인 강냉이 뻥튀기에 갔다. 권 여사가 보다 못해 입을 열었다. “손님들한테는 권하지도 않고 혼자서 계속 드시면 어떻게 해요.” “뭐 별로 권할만한 음식이 못 돼서.” 좌중의 폭소가 터졌다. 노 대통령은 여전히 유머가 많았다. 그때 노 대통령은 오직 책 읽고, 책 쓸 생각밖에 없어 보였다. 그 뒤 사태는 급전직하, 두달 뒤 2009년 5월23일 아침 대통령 서거 비보를 들었다. 유서에 나오는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는 구절이 내 머리를 때렸다(이듬해 노 대통령의 최후 염원이었던 책 ‘노무현이 꿈꾼 나라’(이정우 외 38인 공저, 동녘, 2010)를 출간해 봉하 묘역에 바쳤다).
장례식 날 나는 한겨레신문에 추도문 ‘학자 군주 노무현을 그리며’를 썼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익보다 정의를 추구했다. 맹자가 양나라 혜왕을 찾아가자 혜왕이 물었다. “선생께서 불원천리 찾아오셨으니 우리나라에 큰 이익을 주시겠지요?” 맹자가 답했다. “왕께서는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의가 있을 뿐입니다(王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그렇다. 노무현은 평생 이익 대신 정의를, 약자에 대한 배려를 앞세웠다. 늘 손해 보고 지는 길을 갔다.
노무현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말실수와 학벌을 든다. 노 대통령은 자신을 학벌사회, 연고사회의 바다에 떠 있는 외로운 돛단배에 비유한 적이 있다. 노 대통령은 가난 탓에 학벌은 낮았으나 책을 많이 읽어 학식이 높았다. 학자 군주였다. 조선 왕조 5백년 27명의 왕 중에 학자 군주는 단연 세종과 정조다. 세종, 정조는 독서광이었고, 집현전, 규장각을 설치해 학자들과 대화했다. 노 대통령도 독서를 좋아했고, 위원회를 설치해 학자들과 대화했다. 정책을 만들 때도 눈앞의 인기보다 논리적 타당성과 진정 국민을 위한 정책인지를 따졌다.
시간 여유가 생길 때 노 대통령의 화제는 역사였다. 동서양 여러 나라 역사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질문하는 일이 많았다. 중국 최고의 명군으로 불리는 당 태종은 자신이 세 개의 거울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얼굴 보는 거울, 직언하는 신하 위징, 그리고 역사였다. 위징이 죽었을 때 태종은 거울을 하나 잃었다며 슬피 울었다. 노 대통령은 끊임없이 역사를 되돌아보려고 노력한 점에서 당 태종과 비슷하다. 직언을 잘 수용한 점도 비슷하다. “요즘 청와대에 위징이 너무 많아 일하기 힘들어”라고 농담하던 노 대통령이었다. 역대 대통령 중 단연 최고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대통령 밑에서 일한 나는 행운아였다. 지금도 문득문득 그때 일이 생각나고, 노무현 대통령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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