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지방선거 ‘야당 부활’…주요 지역서 에르도안 ‘참패’

김상준 기자(kim.sangjun@mk.co.kr) 2024. 4. 1.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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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권, 5개 주요 도시에서 여당에 승리
“에르도안 집권 이후 최대의 참패”
에르도안 패배 인정하면서도 “전환점”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 수성 성공
에르도안의 대항마로 입지 더욱 굳혀
작년 대선 후 분열한 야권 결집 가능성

레제프 타이이안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의 ‘종신집권’ 계획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31일(현지시간)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이스탄불과 수도 앙카라 등 5개 주요 도시에서 야당이 모두 승기를 쥐면서다. 특히 에르도안 대통령의 강력한 라이벌로 떠오른 에크렘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이 수성에 성공해 대권까지 추진력이 생겼다.

1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에크렘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의 지지자들이 그의 시장 선거 승리 소식에 기뻐하고 있다. [사진=로이터연합]
주요 도시에서 ‘야당 부활’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튀르키예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구인 이스탄불의 시장 선거에서 제1야당인 공화인민당(CHP) 소속 이마모을루 시장이 개표율 92.92% 기준 50.92% 득표율로 사실상 당선됐다. 집권여당 정의개발당(AKP) 소속 무라트 쿠름 전 환경부 장관(40.05%)을 10%포인트 이상 차이로 따돌렸다.

이마모을루 시장은 개표가 96% 이상 진행된 시점에서 승리를 선언했다. 그는 이스탄불에 모인 수천 명이 지지자들 앞에서 “쿠룸 전 장관과의 표 차이가 100만표 이상이다”라며 “국민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 패배한다”고 말했다. 승리 연설 도중 일부 지지자들은 에르도안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기도 했다.

수도 앙카라에서도 야당은 수성에 성공했다. CHP 소속 만수르 야바스 앙카라 시장은 개표가 46.4% 진행된 가운데 58.6% 득표율로, AKP 후보(33.5%)를 압도하자 승리를 선언했다. 앙카라 시장도 수천 명의 지지자 앞에서 “선거는 끝났다”며 “우리는 계속 앙카라를 섬기겠다”고 말했다.

튀르키예 현지 매체들은 야권이 주요 5개 도시에서 모두 승리한다고 전망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이스탄불과 앙카라뿐 아니라 북부 산업도시인 부르사에서도 AKP는 시장직을 잃었다. 주요 항구도시인 이즈미르, 관광도시인 안탈리아 시장 선거에서도 AKP는 패배할 전망이다. 전체적으로 19개 핵심 지역에서 야권이 부활한다는 분석이다.

현재까지 CHP가 승리하고 있는 지역은 81개 지역 가운데 36개다. CHP의 전국 득표율은 37%로, AKP의 득표율 보다 1%포인트 높다. 35년만에 CHP가 전국 득표율에서 AKP를 처음으로 앞섰다. 이스탄불 보가지치 대학의 교수인 메르트 아르슬라날프는 “에르도안이 2022년 권력을 장악한 이래 가장 심각한 선거 패배”라고 평가했다.

로이터는 “튀르키예의 약진하는 야당이 주요 지방선거에서 에르도안을 세게 때렸다”고 분석했다. AP통신은 “야당이 지방선거에서 압승하며 에르도안은 타격을 입었다”고 보도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에르도안이 제1야당에게 충격패를 당했다”고 전했다. 지난해 5월 대선과 총선에서 패배한 야권이 예상보다 더욱 선전했다는 평가들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신속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앙카라에 위치한 AKP 중앙당사에서 그는 “우리는 당연히 국민의 결정을 존중한다. 불행히도 우리는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끝이 아니라, 전환점이다”라며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고, 계속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레제프 타이이안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 [사진=로이터연합]
“먹고 살기 너무 힘들다” 튀르키예 시민들, 정권 심판
야권의 주요 승리 원인은 경제라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해 5월 에르도안 대통령은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의 ‘경제 개선’ 약속을 당시에는 국민들이 믿었지만, 이후 높은 물가가 쉽게 잡히지 않고 임금 역시 낮은 수준이 유지됐다. 이에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한 유권자들이 등을 돌린 모양새다.

앞서 에르도안 대통령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 전 세계 국가들이 지나치게 풀린 유동성을 빨아들이기 위해 기준금리를 너도나도 인상할 때, ‘고금리는 인플레이션을 조장한다’는 특이한 생각에 사로잡혀 ‘나 홀로 금리 인하’를 고집했다. 그 결과 한때 튀르키예의 물가상승률은 80%를 넘기기도 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여전히 70%에 육박하는 인플레이션, 급진적인 통화 긴축 조치로 인한 경제 성장 둔화가 이번 선거 패배의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임금 정체 역시 불만의 한 축이었다. 올브라이트 스톤브리지 그룹 수석 고문인 하칸 아크바스는 “경제가 결정적인 요인”이라며 “국민들이 변화를 요구했다”고 말했다.

2024년 튀르키예 지방선거에서 이스탄불 시장에 또 당선된 에크렘 이마모을루.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에르도안 대항마’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의 당선이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특히 뼈아프다.

이마모을루 시장은 2019년 지방선거에서 당시 AKP ‘2인자’였던 비날리 이을드름 전 총리를 누르고 이스탄불 시장에 당선됐다. AKP가 이스탄불 시장 자리를 야권에 내준 건 20여년만의 일이었다. 이에 AKP는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고, 집권세력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 무효를 결정했다.

하지만 이마모을루 시장은 재선거에서 또다시 당선됐다. 게다가 기존 선거 때보다 더 높은 득표율로 재당선됐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이마모을루 시장은 에르도안 대통령의 강력한 대항마로 급부상했다. 이번 선거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스탄불 시장 후보로 출마한 자당 쿠룸 후보를 적극 지원했는데, 이마모을루 시장이 수성에 성공하면서 입지는 더욱 공고해졌다.

이스탄불이 두 차례 에르도안 대통령의 라이벌을 선택한 점은 정치적으로 의미가 깊다. 이스탄불은 튀르키예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로 꼽힌다. 이스탄불은 튀르키예 전체 인구의 약 20%인 1570만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튀르키예 국내총생산(GDP)에서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경제 중심지다.

이스탄불은 튀르키예의 현재와 미래 정치 지형을 파악할 수 있는 도시라는 평가도 받는다. 이스탄불은 튀르키예를 상징하는 도시답게 다양한 배경과 사상을 가진 유권자들이 몰려든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이스탄불에서의 선거 결과를 통해 향후 튀르키예 전체의 정치적 방향성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을 포함한 튀르키예 정치인들은 “이스탄불에서 지면 선거에서 진다”는 말을 격언처럼 여기는 배경이다. 특히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이스탄불은 자신이 나고 자란 생물학적 고향이자 중앙 정계로 발을 내디딜 수 있게 해준 정치적 토양이었다. 그는 1994년 이스탄불 시장에 당선되면서 유력 정치인으로 부상됐다.

이스탄불 등 주요 도시에서의 승리가 야권 결집으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튀르키예 야권은 지난해 5월 대선과 총선에서 패배한 이후 분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6개 주요 야당은 핵심 지역에서 연합 후보를 내지 않고 각각 후보를 내고 경쟁했다.

한편 에르도안 대통령은 2017년 개헌을 통해 종신 집권의 길을 닦았다. 기존 헌법은 대통령 연임을 한 번만 가능하게 했지만, 그가 도입한 새 헌법에 따라 실시된 2018년 ‘첫 대통령선거’에서는 기존 임기를 집계하지 않았다. 또 임기 중 조기 대선을 실시해 승리하면 추가 5년 임기를 보장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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