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진에 깨진 항아리에서 1천4백억 원어치 술이 쏟아져 나왔다…이백의 술 '젠난춘' [스프]

심영구 기자 2024. 4. 1.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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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와 함께 당나라를 대표하는 시인 이백은 태어난 고향이 어디인지 논란이 많다.

이백은 천하를 주유하면서도 고향인 장요를 잊지 못했다.

이백은 또 다른 술 예찬시 '장진주(將進酒)'까지 지어 후대인에게 '주선(酒仙)'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단지 청대 복원된 이백의 고택 롱서원(隴西院)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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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④] 쓰촨·멘주 (글 : 모종혁 중국문화평론가·재중 중국 전문 기고가)
장요(江油)시 칭롄(靑蓮)진 이백고리(李白故里)의 '월하독작' 석상


두보와 함께 당나라를 대표하는 시인 이백은 태어난 고향이 어디인지 논란이 많다. 중국의 여러 지방정부가 자기 땅에서 출생했다고 우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 기록을 고증해 보면, 이백은 당이 지배했던 서역의 안서도호부 수이예청(碎葉城)에서 태어났다. 수이예청은 지금의 키르기스스탄 토크마크에 해당한다. 그 뒤 4살 때 쓰촨(四川)성 장요(江油)로 이주해서 성장했다.

이백의 호인 청련거사(靑蓮居士)는 이백이 살았던 장요시 칭롄(靑蓮)진에서 따왔다. 이백은 천하를 주유하면서도 고향인 장요를 잊지 못했다.

청나라 때 복원된 이백의 고택인 롱서원(隴西院)

26살 때 양저우(揚州)에서 지은 '정야사(靜夜思)'에 이런 애틋한 마음이 잘 녹아있다. 정야사는 떠난 고향을 그리워하는 나그네의 마음을 잘 표현한 최고의 망향시(望鄕詩)로 손꼽힌다.
 
침상 앞 달빛을 바라보니(牀前看月光)
땅 위에 내린 서리가 아닌가.(疑是地上霜)
머리를 들어 산에 뜬 달을 보라보니(擧頭望山月)
고향 생각에 고개가 숙여지네.(低頭思故鄕)

이백은 한평생을 방랑으로 지냈으나, 자신의 재능을 조정에서 펼치기를 바랐다. 42살에 도사 오균의 천거로 현종의 부름을 받아서 장안(長安)으로 들어갔다.

이백의 고택 롱서원 앞에 세워진 소년 시절을 형상화한 인물상


현종에게 총애를 받았으나 궁정시인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했다. 정치적 야망을 펼칠 수 없어 절망하며 술에 빠져 지냈다. 거침없던 성격의 이백은 결국 조정 대신들의 미움을 사서 쫓겨났다.

잠시 장요로 돌아왔다가 양쯔강(長江)을 통해 천하를 주유했다. 이렇듯 이백은 정치적으로 불우했기에 음주로 인생의 무상함을 달랬다. 수많은 술 예찬시를 남겼는데, '월하독작(月下獨酌)'이 백미로 손꼽힌다.
꽃 사이에 술 한 병 놓고,(花間一壺酒)
벗 없이 혼자 마시노라.(獨酌無相親)
잔 들어 밝은 달을 맞이하니,(舉杯邀明月)

배를 타고 쓰촨성을 벗어나는 청년 시절의 이백을 형상화한 모습
그림자 비추어 세 사람이 되었구나.(對影成三人)
달은 본래 술 마실 줄 모르고,(月旣不解飮)
그림자는 그저 흉내만 내네.(影徒隨我身)
잠시 달을 벗하고 그림자를 거느리고,(暫伴月將影)
이 봄을 마음껏 즐겨보세.(行樂需及春)
내가 노래하니 달도 서성이고,(我歌月徘徊)
내가 춤추니 그림자도 어지럽구나.(我舞影零亂)
취하기 전엔 함께 즐기지만,(醒時同交歡)
취하고 나면 각자 흩어지겠지.(醉後各分散)
영원히 정에 얽매이지 않는 우정을 맺어,(永結無情遊)
아득한 은하수에서 만나기를 기약하세.(相期邈雲漢)

이백고리에 만들어진 '장진주' 시벽과 이백의 중년의 모습

이백은 또 다른 술 예찬시 '장진주(將進酒)'까지 지어 후대인에게 '주선(酒仙)'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이때를 마지막으로 이백은 장요를 다시 찾지 못했다.

오늘날 칭롄진에는 당대의 유적은 하나도 남아 있질 않다. 단지 청대 복원된 이백의 고택 롱서원(隴西院)이 있다. 또한 이백의 시로 석상, 시비, 시벽 등을 세운 태백비림(碑林)이 조성되었다.

장요에서의 젊은 시절 이백의 행적은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일화가 장요에서 70여km가 떨어져 있는 멘주(綿竹)와 관련되어 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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