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카페] 지구 최강 동물 생존력으로 인간 노화 늦춘다

이영완 과학에디터 2024. 4. 1.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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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물곰은 극저온과 고열, 우주 환경도 이겨내
물곰 단백질로 인간 세포 보호, 신진대사 늦춰
냉장 필수 의약품에 넣으면 실온서 장기 보관
지구 최강의 동물로 불리는 물곰이 이끼를 붙잡고 있다. 물곰은 극한 환경도 견뎌 최근 우주 실험에 단골로 이용된다./Eye of Science

섭씨 영하 273도의 극저온이나 물이 끓고도 남을 151도 고열에도 끄떡없는 동물이 있다. 몸길이가 1.5㎜를 넘지 않는 절지동물인 물곰이다. 과학자들이 우주에서도 물곰이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을 찾아냈다. 세포 시간이 남들보다 훨씬 느리다는 것이다. 같은 원리로 인간의 노화를 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실험을 통해 확인됐다.

지구 최강의 동물이 인간의 질병을 극복하고 노화를 억제하는 새로운 길을 열고 있다. 인체 단백질로 만든 바이오 의약품도 물곰 단백질을 이용하면 냉장고 없이 실온에서 장기 보관할 수 있다. 물곰이 사회 인프라가 부족한 저개발국가에 의료 혜택을 가져올 수 있다는 말이다.

◇물곰 극한 생존력을 인간 세포에 부여

토머스 부스비(Thomas Boothby) 미국 와이오밍대 분자생물학과 교수가 이끈 국제 공동 연구진은 최근 국제 학술지 ‘단백질 과학’에 “물곰의 단백질이 인간 세포의 분자 작동 과정을 늦출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에는 영국 브리스톨대, 미국 워싱턴대, 머시드 캘리포니아대, 이탈리아 볼로냐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 연구진도 참여했다.

물곰은 다리 8개로 움직이며 이끼에서 플랑크톤을 잡아먹고 산다. ‘느리게 걷는 동물’이란 뜻의 타디그레이드(tardigrade)라는 이름이 있지만, 물속을 헤엄치는 곰처럼 생겼다고 물곰이라는 별명이 더 유명하다. 물곰은 30년 넘게 물과 먹이 없이도 살 수 있다. 극저온과 고열은 물론, 지구에서 가장 깊은 마리아나 해구(海溝)보다 6배나 높은 수압도 견딘다.

특히 우주에서도 문제가 없다. 대부분 동물은 10~20Gy(그레이) 정도의 방사선량에 목숨을 잃는데, 물곰은 무려 5700그레이를 견딘다. 2007년 유럽우주국(ESA)의 무인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나갔다가 12일 뒤 지구로 귀환했는데, 수분을 제공하자 일부가 살아났다. 2019년 이스라엘이 달에 보낸 무인 우주선에도 물곰이 실렸다.

2019년 이스라엘 달 탐사선 베레시트호에 실은 3000만 페이지 분량에 달하는 인류의 기록을 담은 데이터 저장장치. 그 표면에 물곰 수천마리도 담아 보냈다./아치미션재단

와이오밍대 연구진은 물곰이 극한 환경을 만나면 몸을 공처럼 말고 일종의 가사(假死) 상태에 빠지는 데 주목했다. 이번 연구 결과에 따르면 물곰은 극한 환경에서 세포가 젤처럼 변하고, 신진대사가 느려져 생체 정지 상태라고 불리는 가사 상태로 들어간다.

과학자들은 트레할로스(trehalose)란 당분이 단백질 같은 주요 생체 물질을 보호하기 때문에 물곰이 극한 환경에서 살아남는다고 설명했다. 트레할로스는 물이 없을 때 몸에 얼마 남지 않은 수분도 감싼다. 덕분에 온도가 갑자기 올라가도 수분이 팽창하지 않아 세포를 파괴하지 않는다. 수분이 얼어 세포를 찢는 일도 막는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연구진은 트레할로스가 스트레스에 민감한 생체 물질을 보호하는 한편, ‘CAHS D’란 단백질이 신진대사를 늦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부스비 교스는 물곰의 극한 생존 능력을 인간에 도입할 수 있음을 실험으로 입증했다. 가사 상태를 유도하는 물곰의 CAHS D 단백질을 인간 신장세포에 주입했다. 그러자 인간 세포도 물곰처럼 젤이 형성되고 신진대사가 느려져 환경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있었다.

중요한 사실은 이 모든 과정은 되돌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스트레스 요인이 사라지면 물곰의 젤이 녹고 인간 세포의 신진대사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특정 조건에서만 물곰 단백질을 쓰고, 환경이 좋아지면 다시 원상태로 돌릴 수 있다는 의미이다.

◇단백질 의약품, 세포 저장에 획기적 발전 가능

부스비 교수는 “이번 연구 결과는 세포와 생체 전체에 가사 상태를 유도해 노화를 늦추고 저장성과 안정성을 향상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말했다. 인간 세포가 환경 스트레스를 이겨낸다면 그만큼 노화가 지연된다. 이론적으로는 영화에 나오듯 불치병 환자가 가사 상태로 있다가 의학이 발전한 미래에 깨어나 치료받을 수도 있다.

2020년 올림푸스 현미경 사진전에서 미국1위를 차지한 터지드 드카르발로의 '물곰'.여러 가지 형광 색소를 주입하고 현미경으로 사진을 찍었다./Olympus

현실적으로는 인체 단백질로 만든 바이오 의약품 보관에 큰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 실제로 연구진은 지난해 물곰 단백질을 이용해 혈우병 치료 단백질을 냉장하지 않고도 보관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혈우병은 유전적으로 혈액 응고 인자가 부족해 출혈이 멈추지 않는 병이다.

인간 혈액 응고 제8 인자는 혈우병 환자의 출혈을 치료한다. 문제는 혈액 응고 제8 인자는 원래 불안정하다는 점이다. 적정 온도에서 냉장하지 않으면 바로 분해된다. 재난재해 현장이나 저개발국가처럼 냉장 보관 인프라가 없는 곳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와이오밍대 연구진은 2022년 트레할로스 당분과 CAHS D 단백질이 물이 없는 환경에서 물곰의 생체 물질을 보호하는 데 시너지 효과를 낸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연구진은 두 물질을 조절해 혈액 응고 제8 인자를 안정화시켰다. 연구진은 “특히 CAHS D 단백질이 제8 인자를 안정화시키는 데 더 적합했다”며 “해당 단백질로 처리하면 혈우병 치료제를 건조시켜 냉장고 없이도 장기 보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백신이나 항체, 줄기세포, 혈액 제제와 같은 다른 바이오 의약품에도 같은 방법을 적용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형광 단백질로 자외선 차단, DNA 보호 방패도

과학자들은 물곰이 어떻게 지구 최강의 동물이 됐는지 잇따라 밝혀냈다. 인도 과학연구소의 산디프 에스와라파(Sandeep Eswarappa) 박사 연구진은 2020년 영국 왕립학회가 발간하는 국제 학술지 ‘바이올로지 레터스’에 “물곰이 형광 색소를 방패 삼아 치명적인 자외선(UV)에 노출돼도 생존할 수 있다”고 밝혔다.

물곰이 자외선(UV)을 받고 파랗게 빛을 띠는 모습. 피부에 있는 형광 색소가 치명적인 자외선을 무해한 청색광으로 바꾼다./인도 과학연구소

연구진이 실수로 살균용 자외선램프를 끄지 않았는데, 일부 물곰이 자외선을 받고도 죽지 않았다. 자외선램프는 1㎡당 1킬로줄의 자외선을 방출했는데, 이 정도면 박테리아나 선충은 5분 안에 죽는다. 다른 물곰도 15분이면 다 죽었다. 사람도 이 정도 자외선에 15분 노출되면 피부에 손상을 입는다.

반면 적갈색을 띠는 물곰은 같은 양의 자외선을 받고도 모두 살았다. 자외선의 세기를 4배로 높여도 적갈색 물곰은 60% 이상 30일 넘게 생존했다. 특이하게 이 물곰은 자외선을 받으면 파랗게 빛이 났다. 연구진은 물곰의 피부에 있는 형광 색소가 치명적인 자외선을 무해한 청색광으로 바꾼다고 설명했다.

일본 도쿄대 구니에다 다케카주(Kunieda Takekazu) 교수 연구진은 2016년 국제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에 극한의 환경에서 물곰의 DNA를 보호하는 ‘방패’ 단백질을 찾았다고 발표했다. 연구진은 물곰의 DNA를 완전 해독해 ‘Dsup’라는 보호 단백질을 찾아냈다. 방사선을 맞으면 이 단백질이 DNA를 껴안듯 감싸 보호했다.

사람에게도 효과가 있었다. Dsup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를 사람 신장 세포에 넣었더니 방사선으로 인한 세포 손상이 평소의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구니에다 교수는 “미래에 우주여행이나 방사선 치료, 방사선 오염 지역의 작업에서 사람의 몸을 보호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밝혔다.

또 물곰의 DNA에는 유해한 활성산소를 막는 유전자가 16벌이나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다른 동물에서는 이 유전자가 보통 10벌 정도만 있다. 손상된 DNA를 수리하는 유전자도 다른 동물은 1벌밖에 없지만 물곰은 4벌이나 있었다. 먼 미래 심우주로 나가는 우주인은 물곰 단백질과 유전자로 무장할지도 모른다.

참고 자료

Protein Science(2024), DOI: https://doi.org/10.1002/pro.4941

Scientific Reports(2023), DOI: https://doi.org/10.1038/s41598-023-31586-9

Communications Biology(2022), DOI: https://doi.org/10.1038/s42003-022-04015-2

Biology Letters(2020), DOI: https://doi.org/10.1098/rsbl.2020.0391

Nature Communications(2016), DOI: https://doi.org/10.1038/ncomms12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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