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 오고 싶어 하는 이상한 나라 대한민국"[서상혁의 팩트프레소]

서상혁 기자 2024. 4. 1.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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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도형 국내 송환에 사기 등 재산 범죄 양형 기준 "지나치게 낮아" 지적
법정형 반도 못 미치는 양형 기준…4월에 '국민 법 감정' 반영될까

[편집자주] 현대 사회를 일컬어 '인포데믹(infodemic)의 시대'라고 합니다. 한번 잘못된 정보가 퍼지기 시작하면 막기가 어렵습니다. 언론이 할 수 있는 일은 수많은 정보 중 '올바른 정보'를 더 많이, 더 자주 공급하는 것이죠. 뉴스1은 '팩트프레소' 코너를 통해 우리 사회에 떠도는 각종 이슈와 논란 중 '사실'만을 에스프레소처럼 고농축으로 추출해 여러분께 전달하겠습니다. 제보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테라·루나' 사태의 핵심 인물인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가 11일(현지시간) 몬테네그로 포드고리차 지방법원에 출석하고 있다. 권 대표는 몬테네그로 법원에 각각 40만유로를 내는 조건으로 보석을 청구했다. 몬테네그로 검찰은 보석 요구에 반대했으며 보석 여부는 결정되지 않았다. ⓒ AFP=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서울=뉴스1) 서상혁 기자 = "권도형은 미국에서 평생 벌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루나·테라 사태의 주범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의 한국행 가능성이 제기된 3월 어느 날. 투자자들 사이에선 이런 한탄이 이어졌습니다. 한국인은 한국에서 재판받는 게 당연한데 아이러니하게도 피해자들은 반발했죠.

법 감정과 판결의 간극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예전부터 있었지만 최근 사기나 펀드 사태 같은 금융·증권범죄 판결에 대한 반발이 특히 강해지는 모습입니다. 오죽하면 서울남부지검이 "법 감정에 어긋나는 낮은 처벌 경향으로 인해 금융·증권범죄는 속칭 '남는 장사'로 인식되고 있다"는 입장을 내는 지경입니다.

사실 법 자체는 약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실제 판결에선 이같은 판례를 찾아보기 어렵죠. 그 이유는 '양형 기준'에 있습니다.

◇ 사기 범죄, 최대 30년 선고할 수 있지만 양형 기준엔 고작 '13년'

양형 기준이란 재판부가 형을 선고하는 데 참고할 가이드라인을 말합니다.

형법상 상해죄의 경우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게 돼 있어 선고할 수 있는 형량의 폭은 매우 다양합니다. 똑같이 사람을 다치게 했어도 누구는 징역 1년을 받고 누구는 5년을 받으면 법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겠죠.

이 때문에 대법원은 양형위원회를 통해 상해의 종류에 따른 형량, 가중·감경 요소 등 '채점표'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양형 기준입니다. 판결문에 등장하는 "진지한 반성" "범죄 수법이 잔혹하다" 등의 문구도 양형 기준에 명시된 '가중·감경' 요소인데요.

주목할 점은 양형 기준과 법정형 사이에 간극이 크다는 점입니다. 루나 투자자들의 공분을 사고 있는 '사기 범죄'를 예로 들어보죠.

형법상 사기죄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습니다. 피해자 한 사람으로부터 얻은 이득액이 5억 원을 넘을 경우 특경법상 사기죄가 적용되는데 이 경우 30년이 상한입니다. 사기죄에 다른 혐의까지 더해진다면 최대 50년까지 감옥에서 살아야 합니다. 법 자체는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한 사람으로부터 얻은 이득액이 50억 원이면 무기징역도 선고될 수도 있지만, 이러한 경우는 많지 않으니 일단 논외로 하겠습니다).

반면 양형기준엔 손해액이 5억원 이상 50억 원 미만 범죄 기본 3~6년을 선고하게 돼 있습니다. 300억 원 이상인 범죄는 6~10년입니다. 다수 피해자 등 가중 요소를 반영해도 최대 8~13년입니다. 법정형 상한과 최대 22년이 차이가 납니다.

사기뿐만이 아닙니다. 솜방망이 처벌의 단골 격인 무고죄의 경우 법정형이 10년 이하의 징역으로 돼 있습니다. 특가법상 무고죄는 3년 이상 3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양형기준상 일반 무고는 6개월~2년, 특가법은 2~4년이 기본입니다.

양형 기준을 따르는 건 의무가 아닙니다. 양형기준을 넘어서 선고할 수도 있죠. 다만 양형 기준을 따르지 않으려면 합당한 이유를 판결문에 써야 합니다. 상급법원에서 '양형 부당'을 이유로 파기하는 경우도 있죠. 양형기준을 일탈하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집니다.

양형위에 따르면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전체 법원의 양형기준 준수율은 91.1%에 달합니다. 지금의 문제는 '판결과 법 감정의 괴리'보다는 '양형 기준과 법 감정의 괴리'가 더 어울리는 말입니다.

◇양형 기준 만들 때 과거 데이터 70~80% 반영…약한 형량 이유 있었다

양형 기준상 형량이 법 감정과 괴리가 큰 이유는 무엇일까요. 양형 기준을 정하는 과정에 답이 있습니다.

양형위원회에 따르면 형량 범위는 과거 피고인에게 선고했던 판례 등을 담은 '종전 양형 실무'의 70~ 80%를 반영해 정해집니다. 과거 사례를 바탕으로 양형기준을 만들다 보니 지금의 법 감정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죠.

전문가들은 사기 등 재산범죄나 요즘 잇따라 터지고 있는 금융·증권범죄에서 이같은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설명합니다. 과거와 지금의 범죄 양상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죠.

과거의 사기 범죄 양상은 소위 '먹튀' 같이 단순했다면, 지금은 스캠 코인이나 프로그램을 이용한 주가 조작 등 구조가 매우 복잡해졌습니다. 수천억 원 피해는 우스울 정도이죠. 하지만 사기범죄 양형 기준 형량 범위는 2011년 만들어진 이후 13년 동안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과거 사례를 기준으로 한 양형 기준에 따르다 보니 법 감정과 간극이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법적 안정성 중요하지만…"약한 양형 기준 사기 범죄 부추겨" 지적도

과거 데이터가 중요한 이유는 '법적 안정성'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법이 급격하게 바뀌어버리면 사회가 혼란해지기 때문입니다. 법적 안정성은 '법학개론'에 나오는 기본 원칙입니다. 더군다나 법 감정은 '여론'이라는 점에서 매번 옳진 않죠.

하지만 법 감정과 판결이 지나치게 어긋날 경우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루나 투자자 사례처럼 시민들이 법을 신뢰하지 않게 되는 것이죠.

특히 사기 등 재산범죄나 금융범죄같이 막대한 피해를 낳고 있는 범죄에 대해선 기본 형량의 '밴드'를 상향해 엄격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범죄 억제율은 '엄격한 처벌'에 비례해 올라가기 마련이죠.

이창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전체적으로 한국의 양형 기준은 약하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사기의 경우 형량이 약하다 보니 범죄자에게 '한탕하고 조금 고생한다'는 인식을 주게 된다"며 "약한 양형이 오히려 범죄를 부추긴다고도 볼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양형 기준 중 가중요소를 손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조재빈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과거에 비해 사기나 금융범죄의 규모가 굉장히 커진 반면, 범죄 억제력은 약해진 상태"라고 평가하며 "피해 규모에 맞게 양형기준상 가중 요소를 더 세분화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양형 기준만 바꾸면 될까요? 양형 기준은 법의 테두리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가장 확실한 건 법을 개정하는 것이죠.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도 N번방 사태 이후 국회가 성폭력처벌법을 개정하면서 만들어졌습니다.

◇'법 감정'도 양형위 움직일 수 있다…4월 말 사기 범죄 수정안 논의

양형 기준에서 주요한 지표는 과거 데이터이지만 '법 감정'도 분명한 고려 요소입니다. 언론계와 노동계·여성단체·시민단체 관계자가 양형위원회 자문 위원으로 선임되고, 양형위원회를 열기 전에 공청회를 진행하는 것도 여론을 살피기 위함이죠.

양형위원회는 이달 29일 사기범죄에 관한 양형기준 수정안을 논의합니다. 이번 회의가 흠집 난 사법부의 신뢰를 회복할 계기가 되길 기대합니다.

hyuk@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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