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칠레 FTA 20년, 농가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다정 기자 2024. 4. 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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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TA 20년 농가들은] 2004년 한·칠레협정 발효후
미국·중국 등과 체결 이어져
포도·감귤산업 등 체질 개선
품종 다변화·고품질화 결실
초대형 협상들 줄줄이 대기
외국산과 경쟁 위해 안간힘
제주 서귀포시 월평동에서 4959㎡(1500평) 규모로 ‘천혜향’과 ‘카라향’을 재배하는 홍동표씨(67)가 수확을 앞둔 ‘카라향’을 살펴보고 있다. 홍씨는 자유무역협정(FTA)이 확대되는 동안 하우스감귤과 ‘한라봉’을 거쳐 ‘천혜향’과 ‘카라향’ 재배에 도전함으로써 활로를 모색했다. 서귀포=심재웅 기자

“암울했죠.”

경북 영천에서 40년 넘게 포도를 재배한 김영광씨(가명)는 20년 전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된 순간을 한마디로 이렇게 기억했다. 많은 농가들이 당시 ‘끝났다’고 생각했단다. 더이상 한국에서 농사를 지어서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다.

시위 현장에 뛰어간 농가도 많았다. 상황이 정말 바뀔 것이라고 생각해서라기보다는 답답함이 컸다. 김씨는 “국가의 식량안보와 국민 먹거리를 담당한다는 자부심, 남들이 농촌을 떠날 때도 ‘땅’을 어떻게 버리고 가느냐는 굳은 의지로 지켜온 내 고향이 개방으로 변화할 수도 있다는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고 회고했다.

포도농가의 암담함은 이후 한우농가에도, 감귤농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2012년 한·미, 2015년 한·중 등 이후로도 FTA가 줄줄이 이어지며 국내 농업 환경을 송두리째 바꿔놨기 때문이다.

제주 서귀포에서 감귤농사를 짓는 홍동표씨(67)는 “FTA 반대 시위에 숱하게 참여했다”며 “미국은 오렌지, 중국은 감귤을 대량 생산하는 나라였기에 이들 과일이 대량 수입되면 국내 감귤산업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란 위기의식이 팽배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집회 참가자들이 삭발을 마다하지 않았고 농산물을 불태우는 일이 예사였다”고 덧붙였다.

강원 정선에서 한우 60여마리를 기르는 신기수씨(가명)도 “버스 타고 다 서울로 올라갔었다. 머리띠 두르고 돌멩이도 던졌다. 농가 다 죽는다고 그랬다”고 회상한다.

하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자유무역의 거대한 강줄기는 힘없는 농민이 돌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제조업과 수출에 의존해 성장해야 하는 나라에서 농업은 늘 후순위였다. 시대는 개방을 요구했고, 담보는 늘 농업의 희생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김씨와 영천의 포도농가들은 진면목을 살피려고 칠레로 향했다. 하지만 더 큰 벽을 마주해야 했다.

“‘레드글로브’라는 품종을 봤어요. 당도가 높고 껍질째 먹는 붉은 포도였죠. 이게 한국에 들어오면 시장을 석권하겠다 싶더라고요.”

실제로 여파는 컸다. 2003년 2만5000㏊였던 포도 재배면적은 2006년 1만9000㏊로 줄었고 생산량도 37만6000t에서 33만t으로 쪼그라들었다. 가격도 폭락했다. 김씨는 “전면·부분 폐원 지원 등 다양한 지방자치단체 사업이 이어졌다”며 “고령농들은 더이상 영농을 계속할 의지를 잃었고, 지원금이라도 줄 때 그만두자는 심정으로 폐원을 결정했다”고 전했다.

한우농가의 현실도 가혹했다. 더이상 버틸 힘이 없는 농가들은 소 팔고 축사를 접었다. 축사규모가 작을수록 그만두는 농가가 많았다. 물 밀듯이 밀려오는 저가 수입육에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소농들이 설 자리를 잃은 것이다.

남은 농가들은 어떻게든 농업으로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특히 제주 감귤농가들은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지역경제가 감귤산업을 주축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다른 업종으로 전환하는 일도 여의찮았기 때문이다. 홍씨는 “FTA로 감귤농사 다 망한다고 해서 다른 일도 알아봤지만, 지역에 큰 기업이나 공장이 없어 결국 농업으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며 “주변 농가들도 ‘사즉생’의 각오로 체질 개선에 나섰다”고 밝혔다.

이들이 선택한 방법은 품종 다변화와 고품질 생산체계였다. 노지감귤이 지배했던 산업은 ‘한라봉’ ‘천혜향’ 같은 만감류 재배가 늘며 변화를 겪었다. 노지감귤농장이 있던 자리에 시설하우스가 빽빽하게 들어섰다.

2000년 1만617t이던 제주 만감류 생산량은 2022년 9만9991t까지 늘었다. 또 ‘레드향’ ‘카라향’ ‘황금향’ 등 새로운 품종이 등장하며 1년 내내 감귤류를 맛볼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됐다. 2004년 6100억원 수준이던 감귤 조수입은 2021년 1조271억원을 기록하며 조수입 ‘1조 시대’를 열었다.

홍씨는 “요즘은 오히려 오렌지를 수출하는 미국 농가들이 한국 감귤을 의식해 품질에 더 신경 쓴다는 말이 들릴 정도”라며 웃음 지었다.

포도농가들도 해법 찾기에 골몰했다. 껍질째 먹을 수 있고 한국사람 입맛에도 맞는 포도를 찾는 방법, 그것만이 살길이었다. 그렇게 ‘샤인머스캣’과 만났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품종을 전환했지만 그게 결국 출구가 됐다. 여전히 수입 포도는 밀려들어오지만 우리 또한 포도를 수출하는 나라가 된 것이다. 최근 동남아시아 일부 국가에선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로 일본산 포도보다 한국산 포도를 더 높은 가격에 받기도 한다.

죽을 힘으로 만들어낸 ‘전화위복’이다.

농민들은 돌이켜보면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것 같다고 한다. “자유무역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맨 앞에서 맞닥뜨리고, 그 소용돌이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쳤으니까요.”

하지만 아직 끝난 이야기가 아니다. 훨씬 더 큰 충격을 안겨줄 수 있는 메가(초대형) FTA 등에 대한 우려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농민들에게는 20년 풍파를 다 겪으며 얻어낸, 몸속 깊이 두껍게 박힌 훈장 같은 ‘굳은살’이 있다. 여전히 값싸고 다양한 외국산 과일의 공세가 거세지만 이 굳은살에 의지해 기꺼이 그들과 경쟁하며 이겨낼 방법을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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