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료원장에서 보건소장으로… “의사 후배 6명이 따라왔다” [월요 초대석]

이정은 부국장 2024. 3. 31.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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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보건소로 간 ‘이건희 주치의’ 이종철 전 원장
이종철 강남구보건소장이 지난달 28일 보건소에서 동아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11년간 삼성의료원장을 지낸 그는 “병원 운영할 때 (삼성 계열사) 사장들한테 기부 요청을 많이 하고 다녀서 아내한테 ‘대표 거지’로 불리기도 했다”며 “민간에 90% 의존하는 한국의 공공의료를 키우려면 정부가 더 많은 지원을 해야 한다”고 했다. 박형기 기자 oneshot@donga.com
《최장수 삼성의료원장이자 ‘이건희 주치의’였던 이종철 전 원장이 경남 창원의 보건소장으로 자리를 옮긴 건 70세이던 6년 전이었다. “고향에서 마지막 의료활동을 하고 싶다”고 했었다. 그렇게 4년간의 창원살이를 마치고 자유인으로 돌아갔던 그에게 올해 초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강남구보건소장직을 제안받고 ‘의료인생 제3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지난달 중순 새 업무를 시작했다는 이 소장의 사무실에 걸린 일정표 판은 벌써 빽빽했다. 기자와 만난 이 소장은 “임상 의사, 대형병원장과 지방 보건소장의 경험 세 가지를 엮어 공공의료 활성화를 시도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앞에 진행 중인 현실은 ‘의대 증원 2000명’으로 불거진 의료 파행이다. 그는 “이대로 장기화하면 엄청난 의료 퇴보가 일어날 것”이라며 “서로 한 발씩 양보하는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했다. 2시간의 인터뷰 중 상당 시간을 현행 의료 시스템의 한계와 증원을 강행하는 정부 정책의 문제점 지적에 쏟았다.》



―대형병원장에서 지방 보건소로 옮긴 결정은 당시 의료계의 화제였다. 창원시보건소장으로 보낸 4년은 어땠는가.

“푸른 바다가 있는 내 고향에서 돌봄이 필요한 지역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퇴임 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그동안 내가 받은 것들을 갚아야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창원의 첫인상은 보건소 행정이 참 잘돼 있다는 것이었다. 좋은 터전에서 하고팠던 진료를 하면서 굉장히 재미있게 살았다. 나를 보고 후배 6명이 창원으로 내려왔다.”

―지방으로 따라온 후배들에게 책임감을 느끼진 않으셨나.

“환자들이 서울에서 의사가 왔다고 좋아해주니 보람을 느낀다면서 다들 즐겁게 일했다. 어떤 후배는 금방 1년 이상 진료 예약이 찼다. 다른 동료들에게도 권해야겠다고 하더라.”

이종철 강남보건소장. 박형기 기자 oneshot@donga.com
―그래도 생활환경과 업무 변화 등으로 어려움 또한 적지 않았을 것 같다.

“창원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가 ‘서울에 있는 병원 좀 보내주세요’였다. 보건소 의사를 구하기 위해 진료 수당을 100만 원 더 올리자고 했는데 창원시에서 거부당하기도 했다. 초반에는 보건소 사람들이 ‘진료를 하시면 안 된다’고 뜯어말렸다. 보건소 업무 영역에 대한 보건복지부의 규제가 이유였다. 코로나19가 터지고 보건소가 대응 전면에 서게 된 뒤에야 이게 바뀌었다.”

―퇴임 후 개업의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안 하셨나.

“내가 삼성의료원장 할 때 부회장급인데도 삼성 상무보다 월급이 적었다. 그래도 나는 의사로서의 가치, 그걸 알아주는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이 훨씬 커서 몇십 배의 연봉이 진짜 안 부러웠다. 우리 다 똑같이 세끼 먹지 않나. 요즘 출퇴근도 지하철로 한다. 어디에, 무엇에 가치를 두느냐의 문제다.”

―여생을 즐기는 대신 또다시 보건소 일을 시작한 이유가 있나.

“일을 맡아 달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 하나님의 계시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평생 아프셨기 때문에 의사 외에 다른 일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의사라는 일은 나에게 운명이랄까. 소명이다. 주변에서 강남 지역 국회의원 출마를 권유했을 때도 손사래를 쳤다. 언젠가 병원에 와서 강연을 해주셨던 김수환 추기경이 ‘생명 살리는 일을 하는 의사 여러분이 참 부럽다’고 한 말씀을 잊지 못한다.”

―젊은 MZ세대 의사들 중에는 다르게 생각하는 이도 많은 것 같다. 안정적 고소득을 이유로 의대를 선택하는 이도 적잖다.

“참 안타까운데, 지금 젊은 세대들의 생각을 바꾸기는 어려울 거다. 우리 세대와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라떼는 말이야’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 때는 힘든 일을 그냥 하거나 오히려 좋아하기도 했는데, 요즘 세대는 합당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들에게 ‘나 같은 삶도 있다’고 보여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때로 죽음을 마주치기도 하면서 충실히 일하다 보면 의사들은 바뀌고, 성장하게 돼 있다. 이들을 악마화해서는 안 된다.”

―의료 파행 사태가 한 달을 넘어서면서 전국 의대 교수들이 사직서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

“상황이 장기화하면 의료계에 굉장한 퇴보가 일어날 거다. 당장 학회들이 멈춰 서니 거기에 써야 할 논문들이 다 중단돼 버린다. 의대 교수들이 정말로 손을 놔버리면 오래 못 간다. 우리나라는 분명한 의료전달 체계를 갖고 있고, 3차 진료기관에서 봐야 하는 중증 환자들이 존재한다. 교수들이 전공의를 데리고 해 온 이런 업무가 중단되면 어떻게 되겠나. 중소병원들이 대신할 수 있다고 하는 건 턱도 없는 소리다.”

인터뷰 초점이 의료 파행으로 넘어가자 인자하던 노(老)의사의 눈빛은 점차 매서운 보건 행정 전문가로 변해갔다. “이대로면 정말 환자들이 죽어 나가게 될 수 있다”고 경고하는 그의 목소리 톤은 어느새 높아져 있었다.

이종철 강남보건소장. 박형기 기자 oneshot@donga.com
―정부와 의료계 모두 ‘2000명 증원’이라는 숫자 앞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데….

“병원 경영도 11년을 해보고 나서야 이제 좀 알겠다는 느낌이었다. 얼마가 적정한 증원 규모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아마 없을 거다. 환자가 늘어나는 고령화만큼 심각한 게 인구 자체가 줄어드는 초저출산 문제 아닌가. TV에 나오는 정부 고위 당국자들 중에 의사가 한 명이라도 있나. 의대 증원의 낙수효과만 기대하고 하루아침에 2000명을 늘리려고 하니까 이런 고통이 오는 게 아닌가. 이건 누가 이기고 지느냐 하는 게임이 아니다. 서로 한 발씩 양보하는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도 의대 증원을 지지하는 여론이 높다. 의사들에 대한 국민의 불신도 상당하다.

“의사들도 그동안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는지 반성해 봐야 한다. 일부가 ‘피안성’(피부과 안과 성형외과)에 쏠리는 것도 잘못됐다. 다만 의료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가난한 환자들도 치료해야 하는 사회주의적 성격이 있지만, 한편으로 의료 자체가 굉장히 많은 돈을 창출해낸다. 어느 한쪽만 부각되면 결국 양쪽 모두 힘들어진다.”

―서울 소재 의대에 한 명도 배분하지 않았는데, 비수도권에 몰아준 증원 조치가 지방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나.

“증원이 결정된 지역 의대 상당수가 서울의 대형병원을 수련 병원으로 두고 있는 곳들이다. 합치면 1000명쯤 되던데, 결국 증원 규모의 절반이 다시 서울 및 수도권으로 올라오게 될 것이다. 정말 지역 의료를 살리고 싶으면 그 지역에 남아서 살 사람만 뽑고, 그에 맞는 대우를 해줘야 한다. 일본에 연수 갔을 때 보니 도쿄 암센터보다 외곽 보건소에서 일할 때 보수가 더 많더라. 의사들이 돌아가면서 거기로 일하러 가는 것을 보았다. 필수의료 인력 확보도 해법이 다르지 않다.”

―결국 건강보험 재정이 늘어나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건강보험 재원만 갖고 해결하려니까 안 된다는 거다. 왜 국가 예산은 안 쓰나. 의료는 공공성이 있기 때문에 국가가 부담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진료만 해도 환자 머릿수로 수익이 계산되는 현재 민간 병원 시스템에서는 환자를 보는 시간이 1명당 3분 정도밖에 안 된다. 외국 병원에서 통상 초진이 15분, 재진이 10분인 것과 너무 다르다. 병원장으로 있을 때 ‘이러다가 오진이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늘 불안해하며 마음을 졸였다.”

2021년 이종철 당시 창원보건소장(오른쪽)이 허성무 창원시장과 함께 코로나19 상황 관련해서 브리핑을 하고 있다.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한 의료 시스템 강화 필요성을 강조해 오셨는데, 이런 시도가 도움이 될까.

“웨어러블 의료기기와 첨단 장비를 사용해 질병을 조기 발견하고 치료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한 시대다. 인공지능(AI)을 이용해서 병동 가동률을 예측한다거나 환자들의 데이터를 관리하는 식으로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그렇게 해야 환자들과 눈과 눈을 맞댈 시간이 생기지 않겠는가. 1분이라도 더 대화하고 웃기도 할 수 있지 않겠나.”

―공공의료 투자와 발전은 어떤 식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보나.

“우리나라는 의료의 90%가 민간에 의존하는 구조다. 공공의료가 20∼30%는 돼야 하는데 지금 10%밖에 안 되는 것이다. 전공의 수련 비용만 해도 국가가 아닌 병원이 내고 있다. 전공의들에게 적은 급여로 더 많은 일을 시키게 되는 이유다. 응급실 뺑뺑이 문제의 경우 미국의 ‘어전트 케어 센터(UCC)’처럼 상급종합병원과 1차 병원의 중간단계 응급실 시스템을 검토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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