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운 시간의 질감을 품은 집 [배정한의 토포필리아]

한겨레 2024. 3. 31.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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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설화수의 집과 오설록 티하우스. 1930년대 한옥과 1960년대 양옥을 잇고 엮은 혼종의 공간이다. 아모레퍼시픽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공원의 위로’ 저자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상업 공간에는 나만의 소중한 시간을 내주기 싫다. 단골 식당이나 동네 카페가 아니라면 제아무리 소문난 ‘핫플’이더라도 두 번 이상 가게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예외는 있는 법. 서울 가회동 ‘북촌 설화수의 집과 오설록 티하우스’(이하 설화수의 집)가 그중 하나다. 갈 때마다 다른 경험을 하고 새로운 발견을 한다. 화장품을 사거나 녹차를 마시지 않아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다. 건물 구석구석을 구경하고 느릿하게 정원을 산책하다 보면 내 집처럼 안온한 느낌이 든다. 눈치 안 보고 넋 놓고 앉아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북한산 자락의 풍광을 누릴 수 있다.

설화수의 집은 1930년대에 지은 한옥과 1966년에 준공한 3층 양옥을 잇고 엮은 혼종의 공간이다. 북촌 가회동에는 20세기 초반의 한옥과 20세기 중후반의 양옥이 뒤섞여 공존한다. 앞뒤로 붙어 있지만 다른 시기, 다른 건축 양식의 두 집을 매입한 아모레퍼시픽은 건축가 최욱(원오원 아키텍스)과 뜻을 모았다. 서울 특유의 주택 유형을 유산으로 보전하면서 한층 섬세하게 다듬고 가꿔 미래 세대에게 남기기로 한 것이다. 궁궐처럼 옛 시간을 박제하는 형식이 아니라 동시대 도시의 일상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에 공간을 여는 방식으로.

건축가는 도시 개발 과정에서 변형된 한옥의 집터와 구조를 복원하면서 기둥과 서까래, 지붕을 그대로 살렸다. 가로 30미터의 긴 노출콘크리트 슬라브 형태가 특징적인 양옥의 외피를 단장하고 내부를 정리하면서 옛 마감재, 창, 문틀, 조명을 업사이클링했다. 투명한 창을 통해 북촌 거리로 활짝 열린 한옥은 주로 전시실과 응접실 기능을 하며 방문객을 환대한다. 새로 가꾼 양옥은 설화수 제품과 오설록 차를 판매하는 상업 공간이면서 동시에 누구에게나 개방된 북촌의 전망대 역할을 한다.

한옥과 양옥 사이 옹벽을 해체하고 새로 넣은 중정이 이질적인 두 공간을 연결한다. 사진 박승진

가장 큰 난제는 양식적으로는 이질적이고 물리적으로는 배타적인 두 집을 연결하는 방법이었다. 가로변 한옥 바로 뒤에 양옥이 맞붙어 있는 형태였지만 그 사이에는 높이 6미터의 축대가 있었다. 건축가의 해법은 축대를 해체해 양옥 기반층의 흙을 파내고 지하층을 새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 지하층과 한옥의 경계 공간에 중정을 넣었다. 이질적인 두 공간이 중정을 통해 물리적으로 연결되고 시각적으로 교류한다. 한옥과 양옥 사이 중정 모퉁이에 남긴 옹벽의 잔해는 단절됐던 두 공간의 옛 시간을 증언하고 있다.

공간을 엮고 시간을 잇는 중정에 이른 봄 흰 꽃을 피우는 매화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조경가 정영선(조경설계 서안)과 박승진(디자인 스튜디오 로사이)은 중정의 디자인 개념을 ‘화이트 가든’이라고 말한다. “흰 매화꽃이 지고 나면 설유화, 노루오줌, 옥잠화가 순서대로 흰 꽃을 피우며 중정을 하얗게 물들입니다. 가을이 되면 흰 벽을 배경으로 붉은 단풍이 도드라집니다.” 한옥과 양옥을 매개하는 매화나무 중정은 계절마다 다른 표정을 지으며 방문객을 머무르게 한다. 중정은 두 집을 하나로 연결할 뿐만 아니라 북촌의 가로 풍경을 끌어들인다.

인스타그램에서 설화수의 집을 검색하면 ‘설화정원’이라는 새 이름을 단 양옥 앞마당 사진이 가장 많이 뜬다. 조경 디자인의 의도는 건축 개념과 마찬가지다. 오래된 주택의 기억과 흔적을 유지하되 세심하게 돌보고 다듬어 더 가치 있는 장소로 만든다는 것. 1960년대부터 이 마당의 주인으로 거주해온 거친 질감의 향나무들과 석물을 그대로 남겼다. 공간 구성의 새 주연은 마당에 그늘을 선물하는 산딸나무들이다. 산딸나무는 초여름에는 흰 꽃으로, 가을에는 붉은 열매로, 늦가을에는 단풍으로 공간에 촉감을 더한다. 산딸나무와 함께 마당의 새 가족으로 초대된 봄의 히어리, 수선화, 무스카리, 채진목, 황매화, 설유화, 물철쭉, 여름의 목수국, 산수국, 물싸리, 그리고 가을의 구절초와 용담이 공감각적 장소 경험을 풍성하게 한다.

북촌 풍경을 독점하던 내밀한 정원이 모두에게 열린 공원이 되었다. 북촌 설화수의 집과 오설록 티하우스. 사진 박승진

오랜 세월 북촌 풍경을 내려다보며 독점하던 내밀한 정원이 이제 모두에게 열린 공원 역할을 한다.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선을 바꿀 때마다 다른 경관이 펼쳐진다. 근대 한옥 양식의 특징을 보전한 백인제 가옥, 개화기 김옥균의 집터이자 경기고등학교의 옛 교정이었던 정독도서관이 설화정원과 어깨를 맞대고 있다. 북촌의 촘촘한 도시 조직과 일상 경관을 조감할 수 있다. 탁 트인 남쪽 원경으로는 남산타워까지 눈에 잡힌다. 한옥과 양옥이 공존하는 혼종의 공간, 북촌 설화수의 집은 두꺼운 시간의 질감을 품고 도시에 말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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