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 여아 유괴해 살해한 괴물이 된 임신부 [정락인의 사건 속으로]

정락인 객원기자 2024. 3. 31.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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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만원 빚에 쪼들리자 대낮 초등생 납치
몸값 요구한 후 “집에 보내 달라”고 보채자 목 졸라 죽여

(시사저널=정락인 객원기자)

서울 서초구 잠원동의 한 아파트에는 인근 초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박초롱초롱빛나리양(8)이 살았다. 긴 이름은 '별처럼 빛나는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직접 지어줬다. 탤런트나 화가를 꿈꾸던 명랑한 소녀였다.

1997년 8월30일 오후 2시50분쯤 박양은 엄마에게 "학원에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뉴코아백화점(현 뉴코아아울렛) 앞 버스정류장을 지나다가 무심결에 종이 껍데기를 버렸다. 그러자 한 여성이 "왜 길에 그런 것을 버리느냐"며 말을 걸어왔고, 박양은 마침 이 여성이 휴지를 땅에 버리는 것을 보고는 "언니는 왜 버려요"라고 대꾸했다.

이 여성은 빚에 쪼들리며 채무 압박을 받고 있던 8개월 임신부 전현주(28)였다. 전씨는 이날 오후 임신부 옷을 싸게 사기 위해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로 갔다. 이곳저곳 둘러보다 뉴코아백화점으로 이동해 쇼핑을 했고, 백화점 인근의 햄버거 가게에서 콜라를 마신 후 경기도 군포의 친정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다 박양을 만난 것이다.

1997년 9월, 박초롱초롱빛나리양 유괴·살해 사건 범인 전현주가 강남 뉴코아백화점 킴스클럽 앞에서 현장검증에 참여하고 있다. ⓒ연합뉴스

협박전화 후 경찰 수사망 뚫고 잠적

세련된 옷차림의 박양이 부잣집 딸이라고 판단한 전씨는 순간, 박양을 유괴해 부모에게 돈을 뜯어낼 계획을 세운다. 전씨는 얘기를 나누며 박양이 다니는 영어학원까지 같이 간 후 1층 슈퍼에서 아이스크림 한 개를 사주고 학원으로 올려보냈다. 그런 후 학부모를 사칭해 학원에 전화를 걸어 수업이 끝나는 시간을 물어봤다. 약 10분이 지난 후에는 3층 학원으로 올라가서는 "조카를 학원에 보내려 한다"며 상담까지 받고 나왔다.

학원수업이 끝날 때쯤 전씨는 다시 3층으로 가서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박양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전씨는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다가 본색을 드러낸다. 그는 박양에게 "재미있는 곳에 가자"고 꾀었다. 박양이 동의하자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을 간 후 지하철로 갈아탔으나 사람이 너무 많자 다음 역에서 내려 택시를 탔다. 목적지는 관악구 사당동 총신대 사거리에 위치한 건물이었다. 이곳 지하는 전씨의 남편 최아무개씨(32)가 인형극단을 운영하다 소품창고로 쓰는 곳이었다.

오후 5시쯤 건물 앞에 도착했으나 박양이 지하실로 들어가기를 꺼리자 전씨는 "재미있는 인형이 많으니 보여주겠다"며 억지로 끌다시피 지하실로 유인했다. 전씨는 박양의 집 전화번호를 알아낸 후 손과 발을 청테이프로 결박했다.

딸이 돌아올 시간이 넘었는데도 귀가하지 않자 부모는 걱정하기 시작했다. 영어학원에 전화해 보니 "수업 마치고 나갔다"고 했다. 같은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젊은 아줌마랑 갔어요"라고 대답해 유괴라고 직감한다. 곧바로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다. 경찰은 범인에게서 협박전화가 올 것으로 보고 박양의 집 전화기에 녹음기와 발신지 추적장치를 달았다. 오후 6시쯤 초조하게 기다리던 전화 벨이 울렸다. 주변에 있던 경찰은 일제히 전화기 앞으로 모여들었다.

경찰의 신호에 따라 벨이 세 번 울리자 박양의 어머니가 수화기를 들었다. 전현주였다. 그는 "나리네 집이죠, 나리는 잘 있어요"라는 말만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발신지 추적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1차 협박전화를 건 전현주는 박양에게 사탕이라고 속여 수면제를 먹였다. 얼마 후 잠에서 깬 박양은 배고픔과 불안에 떨며 계속 울면서 집에 보내 달라고 재촉했다. 화가 난 전씨는 머리 등을 주먹으로 마구 때렸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지 입에 청테이프를 붙이고 목 졸라 살해한다. 시신은 옷을 모두 벗긴 채 등산용 가방에 넣어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아래에 방치했다.

다음 날인 31일 오후 3시52분쯤 전현주는 박양 부모에게 2차 협박전화를 걸었다. "나리를 데리고 있다. 2000만원을 준비해 명동 전철역 남대문 방향 출구 앞에 있는 8층 건물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이번에는 구체적인 액수와 돈을 들고 나올 장소까지 지정했다. 발신지는 중구 명동의 한 공중전화였다. 경찰이 현장으로 출동했으나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다.

두 번의 전화에도 용의자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한 경찰은 이번에는 만반의 대비를 하고 전화를 기다렸다. 같은 날 밤 9시3분쯤 전현주는 박양의 집에 세 번째 협박전화를 걸었다. 발신지가 명동의 한 커피숍으로 찍혔다.

경찰은 박양의 어머니에게 "최대한 시간을 끌라"고 당부하고 현장을 덮쳤다. 커피숍 주변은 경찰력을 동원해 완전히 봉쇄했다. 출구는 오직 한 곳뿐이었기 때문에, 용의자가 이곳에 있다면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실제 커피숍 안에 있던 손님 13명 중 전현주가 있었다. 경찰은 한 명 한 명 차례대로 신분증 확인과 검문을 실시했다.

만삭 임신부였던 전현주는 "배 속의 아기가 놀라서 배를 차고 있다. 병원에 가야 한다"며 거세게 항의했다. 전씨는 전화로 대학 후배들을 카페로 불러 도움을 요청했다. 얼마 후 이들이 카페로 몰려와 경찰들에게 "애가 잘못되면 당신들이 책임질 거야"며 몰아붙였다.

경찰은 설마 임신부가 유괴범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지문만 채취한 후 돌려보냈다. 전현주는 이렇게 검거 위기에서 극적으로 벗어났다. 그는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더 이상의 협박전화를 걸지 않고 잠수를 탄다. 서울 시내 여관을 전전하며 경찰의 추적을 피해 다녔다.

8세 여아를 납치·살해한 임신부 전현주 ⓒMBC 뉴스 캡처

유괴범 아버지의 결정적인 제보

경찰은 유괴범이 박양 부모를 잘 아는 면식범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수사를 벌였다. 박양의 아버지(44)는 집 근처 상가에 사무실을 두고 인테리어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뚜렷한 범죄 단서가 나오지 않았다.

사건 발생 4일째인 9월3일 경찰은 부모의 동의를 얻어 공개수사로 전환하고 박양의 사진과 용의자의 몽타주가 실린 전단지를 제작해 전국에 배포했다. 또한 카페에 있던 손님들의 지문감식을 의뢰해 놓고 주변 탐문조사를 실시했다.

전현주도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그의 친정집 주변을 탐문했다. 이 모습을 본 전씨 아버지는 뭔가 심상치 않다고 보고 수사본부에 전화해 "왜 경찰이 우리 집 주변을 서성이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내 딸이 9월1일 가출해 연락이 안 된다"고 말했다. 경찰은 얼마 후 전현주의 부모를 만나 협박전화 음성을 들려주고 "내 딸의 목소리가 맞다"는 대답을 듣는다. 베일에 가려졌던 범인의 윤곽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경찰은 박양 유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전현주를 특정하고 수사력을 집중했다. 전씨 부모집 전화에도 발신지 추적기를 달았다. 9월11일 밤 11시10분쯤 전현주는 부모에게 전화를 걸었고, 발신지는 불광동의 한 여관이었다.

이에 따라 경찰은 전씨가 여관을 전전하며 은신 중이라고 보고 서울 시내 전 여관에 대한 탐문수사를 벌인 끝에 12일 오전 관악구 신림동의 한 여관에서 전씨를 검거하는 데 성공한다. 사건 발생 13일 만이었다. 전씨는 오랜 도피생활에 지친 듯 머리가 헝클어지고 어깨가 축 늘어진 채 탈진 상태였으며, 검은색 원피스형 임신복을 입고 있었다. 전현주의 진술에 따라 박양의 시신도 찾아냈다. 얼굴은 부패되고 목에는 손자국이 벌겋게 남아있었으며 온몸이 부은 상태였다.

사건 당시 박양의 초등학교 같은 반 친구들이 박양을 찾는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다. ⓒ조선일보
사망 후에는 박양의 책 상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연합뉴스

딸 출산 후 남편이 해외입양 보내

경찰은 전현주를 상대로 범행동기 등을 집중 추궁했다. 전씨는 줄기차게 공범이 있다는 주장을 폈다. 남편의 극단 사무실 임대광고를 보고 찾아온 성명 불상의 남자 2명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이후 폭행범들이 당시의 장면을 담은 필름과 사진을 보이며 "가족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박양의 유괴 사건에 끌려들어갔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전씨가 체포된 여관에서는 그가 남편 앞으로 쓴 편지가 발견됐다. 여기에도 경찰에 진술한 동일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경찰은 "실제 벌어진 일처럼 표현이 생생하고 구체적이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공범들의 인상착의 등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결국 전현주는 "내가 꾸며낸 내용"이라며 거짓임을 시인한다. 대질에 나선 남편에게도 "당신과 가족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거짓 상황을 꾸몄다"고 털어놓았다.

경찰은 전씨가 검거에 대비해 시나리오를 만든 것으로 판단했다. 가상 공범을 만들어 자신의 형량을 줄여보려는 꼼수였다는 것이다. 전씨는 전문가들에게 '연극성 성격장애' 진단을 받았다. 경찰은 이 사건을 빚독촉에 시달리던 전현주의 단독범행이라고 결론 내렸다.

전씨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약취유인 살해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검찰은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구형했으나 1심과 항소심 재판부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일시적인 경제적 궁핍을 모면하기 위해 어린 생명을 앗아간 범행은 극형에 처해 마땅하지만 우발적인 범행인 데다 피고인의 나이와 경력 등을 고려해볼 때 원심 형량은 적당하다"고 밝혔다. 전씨는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원심 판결에 문제가 없다며 기각했다.

같은 해 10월 전현주는 경찰병원에서 딸을 출산했다. 아이는 남편이 데려간 후 미국으로 입양된 것으로 알려졌다. 전현주는 현재 청주여자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피해자인 박양의 시신은 부모가 생일 선물로 준비한 곰 인형과 함께 한 줌의 재로 변했다. 유해는 가족과 함께 휴가를 떠났던 대천해수욕장에 뿌려졌다.

■유괴살해범 전현주는 누구

유복하게 자랐으나 결혼 후 생활고에 시달리다 파멸

전현주는 육군 대령 출신의 아버지와 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 전씨는 1990년에 예편한 후 내무부를 거쳐 산하 단체의 요직을 맡고 있었다. 전현주는 직업군인이던 아버지를 따라 전국 각지를 옮겨 다니며 유년기를 보냈고,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어릴 적부터 유복하게 자랐으며 바이올린과 피아노, 미술학원에 다닐 정도로 예술에도 소질이 있었다. 고교 생활기록부에도 '명랑하고 책임감이 있으며 미술에 재능이 있다'고 적혀있었다. 성적은 중간 정도였다.

전씨는 의사나 문필가를 꿈꿨으나 재수 끝에 4년제 대학 무역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때 전공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학생운동에 가담해 총학생회 간부를 지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취업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응급구조학을 공부하겠다며 미국 유학을 떠났지만 얼마 못 버티고 돌아왔다.

1995년 서울의 한 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재입학했다. 이곳에서도 총학생회 간부로 활동하며 연극을 하던 최씨를 만난다. 전씨는 최씨와 사귀면서 학업은 뒷전이었고, 결국 수업일수와 학점이 모자라 제적당했다.

전씨 부모는 딸이 최씨를 만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가난하고 직업이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모의 반대에도 전씨는 임신 3개월인 상태로 1997년 2월 최씨와 결혼한다.

신길동 지하 단칸방에 신혼살림을 차렸으나 최씨의 인형극단이 실패하면서 수천만원의 빚을 지는 등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린다. 여기에 전씨는 허영심과 사치, 낭비벽이 심한 탓에 생활력이 없었다. 생활고와 빚독촉에 시달리자 결국 파멸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전씨 아버지는 사건 이후 직장에 사직서를 내고 퇴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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