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분간 출렁이는 도저한 슬픔의 강···창극 ‘리어’[리뷰]

백승찬 기자 2024. 3. 31.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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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꾼들의 탁월한 기량
서양 서사·전통 창작 기법 조화
4월 7일까지 국립극장에서
창극 ‘리어’에서 리어가 막내딸 코딜리어의 시신 앞에서 슬픔에 빠져 있다. 국립극장 제공

<리어왕>은 셰익스피어 비극 중에서도 가장 처절한 작품으로 꼽힌다. 믿었던 두 딸에게 배신당한 뒤 광기에 사로잡혀 광야를 헤매는 늙은 리어의 모습은 삶의 비극성을 함축한다.

국립창극단의 창극 <리어>가 29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개막했다. 2년 전 초연해 ‘객석 점유율 99%’를 기록하며 호평받은 작품의 재연이다. 연출·안무 정영두, 극작 배삼식, 작창·음악감독 한승석, 작곡 정재일 등 해당 분야 최고 수준 창작진의 협업으로도 관심을 모았다.

첫째 딸 거너릴, 둘째 딸 리건의 아첨에 속은 리어가 말로 애정 표현을 못 하는 셋째 딸 코딜리어를 내치는 익숙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충직한 신하 글로스터가 둘째 아들의 음모에 속아 첫째 아들을 오해하는 대목도 그대로다. 리어가 미친 뒤, 글로스터가 두 눈을 잃은 뒤에야 진실을 깨닫는다는 흐름도 같다. 배삼식은 원작 줄거리에 큰 변형을 주는 대신, ‘천지불인’(天地不仁·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다)이라는 노자의 철학을 끌어들여 세상사의 잔혹함을 말한다. 원작을 가족 내 권력 다툼으로 발생한 비극으로 해석하지 않고, 손에 쥔 한 줌 권력이 영원한 줄 아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들춰내며, 알량한 지위를 벗겨내면 ‘그림자’ 뿐인 사회적 인간의 조건을 직시했다.

창극 ‘리어’에서 리어(김준수)와 광대(민은경). 국립극장 제공

판소리 특유의 흥겨움은 이 처절한 비극을 그나마 견딜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소리꾼들의 재기로 인해 <리어>는 도저한 비극의 밑바닥으로 나선형 그리며 가라앉는 대신, 질식할 듯한 슬픔 속 숨 쉴 구멍 같은 해학을 선보인다.

서양 비극의 서사와 한국적 창작 기법이 이음새 찾기 어렵게 엮였다. 음악을 들으며 양악기와 국악기의 파트를 굳이 구분하게 되지 않았다. 소리꾼들은 유려한 래퍼이자 목청 좋은 가수인 동시 열정적인 배우였다. 위엄 있는 왕이었다가 우스꽝스러운 광인이 되고 결국 비탄에 빠진 아비로 결말나는 김준수(리어)는 그가 왜 ‘창극 간판 스타’인지 초연에 이어 다시 증명했다. 글로스터 역으로 무게를 잡은 유태평양, 극과 극의 캐릭터인 코딜리어와 광대를 동시에 연기한 민은경도 흠잡을 데 없었다.

무대 가운데를 강처럼 흐르는 물은 초반엔 튀어 오르는 물방울로 시각적 자극을 주었다가, 후반엔 스틱스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뜻하는 추상성까지 획득한다. 어스름한 실루엣의 리어가 코딜리어의 시신을 든 채 물을 가르며 걸어오는 종반부 장면은 장관이다.

휴식시간 15분을 포함해 공연시간이 190분에 달하지만, 무대를 향한 집중력이 유지된다. 창극 <리어>는 4월 7일까지 공연한다.

창극 ‘리어’는 무대 가운데 흐르는 물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국립극장 제공

백승찬 선임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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