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과 파시즘, 민주주의를 어떻게 위협하나

최성만 이화여대 명예교수 2024. 3. 30.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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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어제와 오늘] '정치의 심미화' 대 '예술의 정치화' : 벤야민과 파시즘

문화적으로는 융성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좌우 이념이 충돌한 격변기였던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시대(1918~33) 유대계 지식인이자 비평가 발터 벤야민(1892~1940)은 파시즘과의 대결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그가 청년기부터 품었던 생각은 위기에 처한 유럽문화를 유대정신으로 완성하고 구제하는 일이었다. 애초에 현실정치에 거리를 두고 지적 작업을 펼쳤지만 정치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 자신의 표현대로 '정치적인 것으로의 전환'을 이룬 1920년대 중반부터 그는 초기의 형이상학적·신학적 사유를 역사적 유물론의 사유와 결합한 독특한 사유를 펼친다. 그러나 초기의 글들에 이미 후기에 전유한 유물론적 사유의 맹아들이 다분히 함축되어 있다. 대학에 자리를 잡으려던 계획이 무산된 뒤 글쓰기가 유일한 생존수단이 된 그가 취한 입장은 그 자신의 표현대로 "좌파 아웃사이더의 입장", "문학투쟁의 전략가"였다.

생전에 한 편지글에서 20세기 독일어권의 최고의 비평가로 자처하기도 한 그는 원래 고전적 문학작품들을 해석하는 작업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그 작업은 단순한 문헌학적 주해의 작업이 아니라 현재의 관점에서 작품의 진리내용을 역사철학적-비판적으로 읽어내는 작업이었다. 비범한 사변적 능력과 고도의 문학적 문체가 결합된 많은 비평문을 남긴 벤야민은 나중에 문예학, 예술학, 미학, 철학, 인류학, 사회학, 정치학, 매체이론 등의 분야에서만 아니라 작가, 예술가, 감독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초기 벤야민에게서 비평의 기관은 철학이지만 나중에 글쓰기는 고도의 정치적 실천의 의미를 띤다.

과거 권위적이고 봉건주의적인 틀을 프랑스대혁명을 비롯해 여러 투쟁의 과정을 거치며 형성된 근대 유럽의 시민문화는 19세기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개화하는 과정 속에서 만인에게 풍요를 가져다주는 진보의 순탄한 길을 걸어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시민문화는 계급갈등과 제국주의전쟁을 거치면서 나중에 파시즘으로 발전할 씨앗을 품고 있었다. 급기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를 필두로 생겨나 독일, 스페인, 일본 등으로 확산된 파시즘은 인류의 문화와 생명을 위기로 몰아넣게 된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파시즘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특히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나타난 대중정치와 대중동원에 기초하여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주장하며,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독재정치를 공공연히 주장하는 정치적 행동이자 체제를 가리킨다." 여기서도 암시되듯이 파시즘 체제에서는 권력(기득권)을 강압적으로 독점하려는 엘리트집단(파시스트들)의 탐욕과 정치적 계산만이 아니라 그들의 조작에 포획되고 휘둘리는 '대중'이 핵심 역할을 한다.

보들레르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나 파사주 프로젝트 등 벤야민의 근대성 연구에서 많은 부분이 대중이라는 현상에 쏠려 있다. 그에 따르면 "대중들의 삶은 예전부터 역사의 얼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들이 의식적으로, 그리고 마치 이 얼굴의 안면근육으로서 그 얼굴의 표정을 표현하게 된 것은 전혀 새로운 현상이다." 이 대중이 역사의 무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보들레르의 시대였다. 거리산보자 보들레르에게 이 대중은 시인이 그것을 통해 대도시 파리를 바라본 "움직이는 베일"이었으며 계급이나 신분이 분명하게 규정되지 않은 "무정형(無定形)"의 덩어리였다. 그러나 시인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이 대중은 이 시대가 빚어낸 '가상'과 환영들 중 하나였다. 벤야민은 대중이란 근본적으로 사적 이해관계의 우연을 통한 사적 개인들의 집중화 현상일 따름이고, 또 이처럼 시장에 모여든 소비대중이 바로 전체주의 국가들에 의해 조작되는 대중이라는 점을 꿰뚫어본다.

1930년대 벤야민은 단지 매체기술이 발달하면서 고급예술이 퇴조하고 대중문화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계급적 실체가 모호한 비정치적 '소비대중'이 전체주의 국가가 주조하는 정치적 '민족공동체'라는 이데올로기에 흡수되는 역사적 현실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계급과 대중을 분리해 생각하는 태도를 비판하면서 "변증법적 사유는 결코 대중 개념을 포기하고 그것을 계급 개념으로 대체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럴 경우 계급의 생성과 계급 속에서 일어나는 과정들을 서술할 도구들 중의 하나를 탈취하는 셈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영화관에서 바로 그와 같은 무정형의 대중들에게서 계급의식이 촉진되거나 손상되는 과정을 추적하기도 하고 혁명 상황에서 소시민의 단단한 덩어리가 느슨하게 해체되면서 연대가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하기도 한다. 벤야민의 구상은 바로 "정치를 심미화"하는 전체주의 국가, 대중에게 '표현'할 권리만을 부여한 채 신체와 정신을 눈멀게 하는 파시즘 체제에 맞서 이 대중이 스스로 깨어나고 자각하게끔 하는 "예술의 정치화"를 위한 전략을 세우는 일이었다.

여러 혁명과 전쟁을 치르면서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들이 자리를 잡아가게 된 20세기 유럽에서 어떻게 반인륜적이고 야만적인 파시즘이 가능했을까? 오늘날 전쟁의 혹독한 대가를 치른 뒤 전체주의 국가는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전체주의적 권력이 사라졌다고 볼 수 없다.(한나 아렌트) 전승된 공론장이 붕괴되어가면서 타인종, 타민족, 타문화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상식을 넘어 확산될 조짐을 보이며 새로운 제국주의가 펼쳐지는 듯이 보이는 오늘날 위의 물음은 여전히 유효할 뿐만 아니라 변화된 역사적-문화적 조건 속에서 심층적으로 탐구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신)자유주의 체제 일상 속에서 전체주의는 계속 은밀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영화를 비롯해 새로운 매체와 기술들은 대중과 개인을 지금까지처럼 '문화산업'의 논리로 포획하는 데 기여하는가 하면 민주화의 방향으로 각성시키는 데 기여하는 양날의 칼로서 진화를 계속해가고 있다. 대중은 대중대로 기술의 긍정적 기능의 도움으로 민주적으로 깨어나는가 하면 다른 한편 자본의 논리가 조장하는 과도한 경쟁 체제 속에서 집단적 편집증의 증상을 보이며 파시즘적 권력이 프로파간다적으로 이용하는 대중조작에 여전히 취약한 면도 보인다.

이 대중조작의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타문화, 타인종 등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기 위해 인종주의, 민족주의가 포퓰리즘적으로 동원되고 개인의 인권을 중시하고 세계시민주의를 지향하는 민주주의적 질서와 가치들이 훼손되며 폭력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위험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필자는 이런 맥락에서 벤야민이 파시즘과 대결하며 펼친 성찰들이 우리에게 여러 유익한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새로운 파시즘이라고 부르든 전체주의라고 부르든 오늘날 한국사회도 이런 위험한 면모를 다분히 보이고 있다. 대중은 계몽(각성)과 우민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긴장된 변증법적 진화 과정 속에 있다. 일찍이 인권과 민주주의를 성취해온 선진국들뿐만 아니라 뒤늦게 지난한 투쟁과정을 거치며 민주주의를 일구어 온 우리에게도 그 가치와 질서는 언제든 훼손되고 철회될 수 있음을 명심하고 시민의식을 키워야 할 것이다.

▲최성만 이화여대 명예교수 ⓒ필자 제공

(이 글을 쓴 최성만 교수는 이화여자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2022년 2월에 정년 퇴직했다. 벤야민, 아도르노, 미메시스, 해체론 관련 논문들이 다수 있으며, 2007년부터 <발터 벤야민 선집>(길, 총 15권 중 12권 출간) 기획과 번역을 주도하고 있다. 이 기획은 공공선 거버넌스(원장 강치원)에서 기획했다. 편집자)

[최성만 이화여대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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