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군인들, 용산에 몰려 살며 장사…상인들과 갈등 치달았다는데 [서울지리지]
군 관련 인구 5만명 이상 거주
조선 제21대 영조(재위 1724~1776)의 이른바 ‘수성윤음(守城綸音)’ 선포다. “어떤 일이 있어도 국왕이 앞장서 도성을 지키겠다”는 결의에 찬 다짐이다.
조선은 전쟁만 터지면 국왕이 먼저 도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도성은 쑥대밭이 되기를 반복했다. 제14대 선조(재위 1567~1608)는 1592년(선조 25) 4월 28일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쳤던 총사령관 신립이 왜군에게 허무하게 무너졌다는 급보를 받자 한밤중에 서둘러 도성을 빠져나갔다. 적은 도성에 무혈입성했고 한양은 경복궁을 비롯해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 폐허가 됐다.
1636년(인조 14) 12월, 이번에는 청나라가 기병부대를 선두로 한양으로 바로 진격해오자 국왕은 또다시 도망간다. 제16대 인조(재위 1623~1649)는 남한산성에서 45일간을 버티다가 삼전도로 나가 청태종에게 무릎 꿇고 항복했다. 앞서 인조는 1624년(인조 2) 이괄의 반란군이 서울로 쳐들어오자 공주까지 도주하기도 했다.
훈련도감은 임진왜란이 한창인 1593년(선조 26) 10월 탄생했다. 한양이 개전 20일만에 속수무책으로 함락되면서 조선의 국방체제 전반에 문제점이 드러났다. 일본군은 오랜 내전으로 전쟁 경험이 풍부한 데다 조총까지 갖고 있었다. 농사를 병행하는 병농일치 구조하의 조선군은 일본군에 상대가 되지못했다. 훈련도감은 명나라의 명장이자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운 척계광이 고안한 ‘절강병법’을 모방했다. 임진왜란 당시 명군은 절강병법으로 평양성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바 있다.
포수(砲手·총병), 사수(射手·활병), 살수(殺手·창검병)의 전문기술을 가진 삼수병(三手兵)으로 구성됐다. 국가재정에서 급료를 받는 직업군인으로 지방의 기민(飢民)이 우선 뽑혔다. 애초 임시부대였지만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한양에 상주하며 중앙군의 핵심이 됐다. 훈련도감은 시대별로 변동이 있지만 대체로 5000명의 상비군을 유지했다.
훈련도감은 경희궁 흥화문 밖(종로 신문로1가 57)에 본영이 있었고 중부·북부를 수비했다. 금위영은 돈화문 밖(운니동 98-5)에 본영을 뒀고 서부를 지켰다. 어영청은 본영이 종묘 외대문 밖(인의동 112-2)에 위치했고 동부·남부를 관할했다. 삼군영은 본영 외에 여러 분영과 창고(무기고, 군량고), 훈련장을 보유했다. 삼군영은 역할은 근본적으로 거의 동일했다. 최정예 군대로서 군사훈련, 전쟁수행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담당했고, 평화시에는 국왕의 호위와 궁궐 숙위, 한양도성의 수축과 북한산성 축성, 도성의 방어, 치안을 위한 도성 내외의 순라, 준천, 금송(禁松·벌채 단속) 등 한양도시 유지를 위한 각종 노역에 동원됐다.
17세기 중엽이후 한양인구는 획기적인 변화를 맞는다. 실록 등의 공식 통계에 의하면, 1428년(세종 10) 10만9372명이던 서울 인구는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3만9931명으로 급감했다가 1669년(현종 10) 19만4030명으로 다시 크게 증가했다. 이후 조선말까지 19만~20만명 수준을 유지한다. 인구조사 역량이 부족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실제 인구는 이보다 많았을 것이다. 최근 연구를 종합하면, 17세기 후반~18세기 초 25만명, 18세기 중후반 30만명, 19세기 초중반 34만명 정도로 추된다.
인구증가는 공물을 특산물 대신 쌀과 포(布)로 납부케 하는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이 주된 원인이었다. 대동법이 삼남지역까지 확대되면서 1657년(효종 8)부터 호남과 영남의 대동창이 차례로 용산에 들어섰다. 이에 따라 한양에서 유통되는 상품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경강변이 상업중심지로 변모했다. 봉건적 권력의 구속에서 이탈한 인구가 경강변으로 몰려들었고 상인, 수공업자와 임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과 직업이 등장했다. <정조실록> 1781년(정조 5) 11월 1일 기사는 “서울의 백성들은 농사를 짓는 업이 없어 각사(各司)의 아전이나 말단직이 되는 이외에는 싼 것을 사다가 비싸게 파는 것으로 이익을 남겨 생활하는 사람이 열에 8~9명”이라고 했다. 18세기 후반 한양인구를 30만명으로 볼때 25만명이 상업 인구인 셈이다.
군병들이 급여만으로 가족을 부양하지 못하자 조정에서는 이들에게 상업활동을 허가한다. 1675년(숙종 원년), 짚신, 전립(氈笠·병졸 모자), 담배, 담뱃대, 망건, 갓끈 등 군병들이 스스로 제조한 물건이나 손에 지닐 수 있는 수지물(手持物)에 한해 자유로운 판매를 허용하는 ‘을사사목(乙巳事目)’을 제정해 군병의 시전편입을 공식 허용한다. 수지물의 범위가 모호해 군병들과 관허상인인 시전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비변사가 서울시전의 상소와 조치를 기록한 <시폐(市弊)>는 “군병 및 여러 궁가와 세가의 사나운 하인들이 벌이는 난전이 점점 심해져 시전의 생업을 모조리 빼앗으므로 혹 군병 및 세가의 하인을 붙잡아서 법사에 신고하더라도 그들이 군문과 세가에 호소하여 상인들을 잡아가면서 결박, 구타, 공갈함이 헤아릴 수 없으니…”라고 시전상인의 호소를 전한다.
수공업 기술이 없는 군병들은 각종 토목공사의 날품팔이 노동이나 한강 변에서 배에 실린 물품을 하역하는 부두노동자로서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다.
삼군영의 존재는 한양의 인구증가, 상업발달 등 조선후기 사회경제사에서 의미가 크다. 1863년 고종즉위 당시 중앙군영의 군병은 1만6000명에 달했지만 노약자가 많고 군기도 해이해져 매우 허약한 상태였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 조약으로 문호개방을 강요당하며 조선은 일본의 우수한 군사력을 절감하고 국방력 강화를 추진한다. 1881년(고종 18) 12월 중앙군제를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으로 통합하고 신식군대를 출범하면서 조선후기 중앙군의 핵심역할을 했던 군영들도 차례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참고문헌>
1. 한양의 삼군영. 서울역사박물관. 2019
2.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난리가(亂離歌). 시폐(市弊)
3. 한양을 지켜라. 서울역사박물관. 2020
4. 19세기 전반기 삼군문의 운영실태. 이수환. 영남대. 2007
5. 조선후기 전술변화와 중앙 군영의 편제 추이. 군사연구 제144집. 노영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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