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군인들, 용산에 몰려 살며 장사…상인들과 갈등 치달았다는데 [서울지리지]

배한철 기자(hcbae@mk.co.kr) 2024. 3. 30.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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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이후 한양은 ‘군인도시’
군 관련 인구 5만명 이상 거주
군대 장교(19세기말~20세기초). 한국민속박물관(헤르만 산더 기증사진).
“비록 기력과 정신이 지쳤지만 수성(守成)의 뜻은 저 넓고 푸른 하늘에 바탕을 두고 있으니, 설혹 이런 일이 있다면 내가 먼저 기운을 내어 성 위의 담에 올라가 백성을 위로할 것이다. 만일 근거없는 의논으로 인하여 그 지키는 바가 흔들린다면 이는 다만 우리 백성들을 속이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이것은 내 마음을 속이는 것이니…” -<영조실록> 1751년(영조 27) 음력(이하 음력) 9월 11일 기사

조선 제21대 영조(재위 1724~1776)의 이른바 ‘수성윤음(守城綸音)’ 선포다. “어떤 일이 있어도 국왕이 앞장서 도성을 지키겠다”는 결의에 찬 다짐이다.

조선은 전쟁만 터지면 국왕이 먼저 도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도성은 쑥대밭이 되기를 반복했다. 제14대 선조(재위 1567~1608)는 1592년(선조 25) 4월 28일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쳤던 총사령관 신립이 왜군에게 허무하게 무너졌다는 급보를 받자 한밤중에 서둘러 도성을 빠져나갔다. 적은 도성에 무혈입성했고 한양은 경복궁을 비롯해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 폐허가 됐다.

1636년(인조 14) 12월, 이번에는 청나라가 기병부대를 선두로 한양으로 바로 진격해오자 국왕은 또다시 도망간다. 제16대 인조(재위 1623~1649)는 남한산성에서 45일간을 버티다가 삼전도로 나가 청태종에게 무릎 꿇고 항복했다. 앞서 인조는 1624년(인조 2) 이괄의 반란군이 서울로 쳐들어오자 공주까지 도주하기도 했다.

인구, 경제사회 역량 한양에 집중···영조, “한양 끝까지 사수” 수성윤음 선포
군복 입은 장교(19세기말~20세기초). 통영시립박물관.
18세기 이후 여건이 확 달라진다. 한양의 주민이 급증하고 국가의 경제사회적 역량이 도성에 집중되면서 더 이상 한양을 포기해서는 왕조 자체의 유지가 힘들어지게 된다. 이같은 현실 인식이 도성사수를 천명한 수성윤음의 배경이었던 것이다. 도성 중심의 방어체제 구축은 나라의 군대를 중앙군 중심으로 편성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도성을 방어하는 중앙군은 훈련도감(訓鍊都監·또는 훈국),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 3개의 군대로 이뤄졌다. 이 세 군대를 삼군영(三軍營) 또는 삼군문(三軍門)이라고 했다.

훈련도감은 임진왜란이 한창인 1593년(선조 26) 10월 탄생했다. 한양이 개전 20일만에 속수무책으로 함락되면서 조선의 국방체제 전반에 문제점이 드러났다. 일본군은 오랜 내전으로 전쟁 경험이 풍부한 데다 조총까지 갖고 있었다. 농사를 병행하는 병농일치 구조하의 조선군은 일본군에 상대가 되지못했다. 훈련도감은 명나라의 명장이자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운 척계광이 고안한 ‘절강병법’을 모방했다. 임진왜란 당시 명군은 절강병법으로 평양성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바 있다.

포수(砲手·총병), 사수(射手·활병), 살수(殺手·창검병)의 전문기술을 가진 삼수병(三手兵)으로 구성됐다. 국가재정에서 급료를 받는 직업군인으로 지방의 기민(飢民)이 우선 뽑혔다. 애초 임시부대였지만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한양에 상주하며 중앙군의 핵심이 됐다. 훈련도감은 시대별로 변동이 있지만 대체로 5000명의 상비군을 유지했다.

덕수궁 앞 고종 출궁 행렬(대한제국). 국립민속박물관
덕수궁 앞 고종 출궁 행렬(대한제국). 국립민속박물관(헤르만 산더 기증사진)
훈련도감 시작으로 어영청, 금위영 등 삼군영 창설해 국왕 호위와 도성 방어
훈련도감 단독의 궁성·도성 수비체제는 1623년(인조 1) 3월 인조반정 과정에서 헛점이 노출된다. 1000명의 반정군은 도성 안으로 들어와 창덕궁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다. 훈련대장 이흥립이 반정군과 내통하고 있어서였다. 훈련도감 군권의 향배에 따라 정권 명운이 갈릴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되면서 집권 서인세력은 궁성 숙위와 국왕 호위를 담당하는 새로운 군영, 즉 어영청 설립을 추진한다. 어영청은 1623년(인조 1) 창설됐다. 훈련도감은 급여를 받는 모병들이지만 어영청은 지방에서 교대로 번상(番上)하는 번상병, 즉 의무병 체제로 운영됐다. 1652년(효종 3) 이후 어영군은 연중 1000씩 한양에 올라와 근무했다.
화성능행도(일부).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화성 현륭원에 행차하는 모습. 조선 국왕의 행렬 규모를 파악할 수 있는 그림이다. [국립고궁박물]
금위영은 1682년(숙종 8) 한양수비를 보강하고 훈련도감으로 인한 재정부담을 줄이기 위해 설립됐다. 금위영은 2000명 규모로 역시 모두 번상하는 의무병으로 채워졌다. 어영청과 금위영은 의무제로 창설됐지만, 번상병들이 각종 토목공사에 동원되자 기피자가 속출했다. 번상병 체제로 운영되던 두 군영도 급료병을 고용하면서 차츰 훈련도감처럼 상비군화 한다.

훈련도감은 경희궁 흥화문 밖(종로 신문로1가 57)에 본영이 있었고 중부·북부를 수비했다. 금위영은 돈화문 밖(운니동 98-5)에 본영을 뒀고 서부를 지켰다. 어영청은 본영이 종묘 외대문 밖(인의동 112-2)에 위치했고 동부·남부를 관할했다. 삼군영은 본영 외에 여러 분영과 창고(무기고, 군량고), 훈련장을 보유했다. 삼군영은 역할은 근본적으로 거의 동일했다. 최정예 군대로서 군사훈련, 전쟁수행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담당했고, 평화시에는 국왕의 호위와 궁궐 숙위, 한양도성의 수축과 북한산성 축성, 도성의 방어, 치안을 위한 도성 내외의 순라, 준천, 금송(禁松·벌채 단속) 등 한양도시 유지를 위한 각종 노역에 동원됐다.

지방에서 교대로 올라와 근무, 가족과 함께 정착하며 차츰 급료 받는 상비군으로 변화
삼군영은 여러 반란사건에서 존재감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1728년(영조 4) 일어난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군대가 삼군영이다. 당시 동원된 군사는 훈련도감 392명, 금위영 1065명, 어영청 572명이었다. 평택 진위에서 마병의 맹활약으로 반란군을 소탕했다. 훈련도감 마병이 기록한 <난리가(亂離歌)>는 “철갑을 두르고 날쌘 말과 함께 선봉에 서서 돌격하는 마병들의 힘찬 위세에 적들이 오합지졸로 되어 모두 흩어졌다. 적장을 생포하고 적군을 무찌르니 주검이 산을 이루고 피가 흘러 강이 되었다”고 했다. 1811년(순조 11)의 홍경래의 난도 삼군영이 토벌했다. 홍경래 군이 농성 중인 정주성의 땅 밑을 파고 화약 1800근(1t)을 터뜨려 성을 함락시켰다. <순조실록> 1812년(순조 12) 4월 27일 기사는 “생포한 남녀 2983명 중 여자 842명, 10세 이하 남자 224명은 방면했다. 이들을 제외한 1917명은 … 모두 진 앞에서 효수했다”고 했다. 실록은 “관군은 한 사람의 사상자도 없다”고 했다.
신식군인들(20세기초) 국립민속박물관(헤르만 산더 기증사진)
조선시대 국왕은 여러 의례를 위해 행행(幸行)을 자주 했다. 이때도 삼군영이 시위했다. 행행규모가 가장 컸던 것은 1691년(숙종 17) 김포 장릉(원종릉·숙종의 고조부) 능행이었다. 훈련도감을 중심으로 보군 6400명, 마병 1000명을 포함해 시위 백관, 차비군(잡무 병졸) 등 인력이 1만명에 달했다.

17세기 중엽이후 한양인구는 획기적인 변화를 맞는다. 실록 등의 공식 통계에 의하면, 1428년(세종 10) 10만9372명이던 서울 인구는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3만9931명으로 급감했다가 1669년(현종 10) 19만4030명으로 다시 크게 증가했다. 이후 조선말까지 19만~20만명 수준을 유지한다. 인구조사 역량이 부족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실제 인구는 이보다 많았을 것이다. 최근 연구를 종합하면, 17세기 후반~18세기 초 25만명, 18세기 중후반 30만명, 19세기 초중반 34만명 정도로 추된다.

인구증가는 공물을 특산물 대신 쌀과 포(布)로 납부케 하는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이 주된 원인이었다. 대동법이 삼남지역까지 확대되면서 1657년(효종 8)부터 호남과 영남의 대동창이 차례로 용산에 들어섰다. 이에 따라 한양에서 유통되는 상품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경강변이 상업중심지로 변모했다. 봉건적 권력의 구속에서 이탈한 인구가 경강변으로 몰려들었고 상인, 수공업자와 임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과 직업이 등장했다. <정조실록> 1781년(정조 5) 11월 1일 기사는 “서울의 백성들은 농사를 짓는 업이 없어 각사(各司)의 아전이나 말단직이 되는 이외에는 싼 것을 사다가 비싸게 파는 것으로 이익을 남겨 생활하는 사람이 열에 8~9명”이라고 했다. 18세기 후반 한양인구를 30만명으로 볼때 25만명이 상업 인구인 셈이다.

훈련중인 신식군대(대한제국). 국립민속박물관.
여기에 더해 삼군영의 상비군화도 인구증가에 상당부분 기여를 했을 것으로 분석된다. 서울에 주둔하는 삼군영의 군사는 훈련도감 5000명, 어영청 1000명, 금위영 2000명 등 1만명 가량이었다. 가족을 포함하면 5만명이 군인 관련 인구로 분류된다. 복무의 댓가로 받는 급료는 훈련도감의 경우 매월 쌀 9말(1말=18.039ℓ), 1년에 군포 9필(1필=12.12m)이었다. 그나마 흉년으로 국가재정이 악화되면 급료를 반만 내주는 일이 허다했고, 군포지급도 불안정했다. 급료는 품팔이 노동자 임금과 비슷한 수준이었으며 그들의 사회적 처지는 도시빈민과 다를 바 없었다.
가난한 군인들, 남산·한강변에 움막짓고 생활, 정부는 이들의 생계 위해 장사 허용
조선후기 한성부는 인구증가로 주택가격 앙등과 주택부족 현상이 만연했다. 군병들은 집값이 싼 경강 변이나 동대문 밖 왕십리 등지에 집단 거주했고, 집을 마련하지 못한 군병들은 만리동고개, 아현고개, 서빙고, 남산 기슭 등지를 불법 개간해 움막을 짓고 살았다. <승정원일기> 1734년(영조 10) 8월 10일 기사는 “옛날에는 군병들이 종로 길가의 행랑채에 살았다. … 지금은 성 밖의 약현(藥峴·중구 만리동), 우수(禹水·용산 후암동), 병현(餠峴·서대문 대현동), 아현, 왕십리, 안가동(安家洞), 삼강(三江·용산, 마포 한강변)에 대부분 거주한다”고 했다.

군병들이 급여만으로 가족을 부양하지 못하자 조정에서는 이들에게 상업활동을 허가한다. 1675년(숙종 원년), 짚신, 전립(氈笠·병졸 모자), 담배, 담뱃대, 망건, 갓끈 등 군병들이 스스로 제조한 물건이나 손에 지닐 수 있는 수지물(手持物)에 한해 자유로운 판매를 허용하는 ‘을사사목(乙巳事目)’을 제정해 군병의 시전편입을 공식 허용한다. 수지물의 범위가 모호해 군병들과 관허상인인 시전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비변사가 서울시전의 상소와 조치를 기록한 <시폐(市弊)>는 “군병 및 여러 궁가와 세가의 사나운 하인들이 벌이는 난전이 점점 심해져 시전의 생업을 모조리 빼앗으므로 혹 군병 및 세가의 하인을 붙잡아서 법사에 신고하더라도 그들이 군문과 세가에 호소하여 상인들을 잡아가면서 결박, 구타, 공갈함이 헤아릴 수 없으니…”라고 시전상인의 호소를 전한다.

장군 복식(일제강점기). 국립중앙박물관.
신식군인(대한제국). 부산시립박물관.
삼군영, 한양의 인구증가와 상업발달에 영향, 굴욕적 강화도 조약체결이후 역사속으로···
삼군영 군병 중에서는 천민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미천한 신분으로 권력의 말단에 서자 자신 과시하려는 욕구를 표출했다. 훈련도감의 계령(戒令)은 조사를 사칭해 동리에 폐를 끼치는 것, 술주정하고 돌아다니며 사대부를 모욕하는 것, 부랑배와 사귀어서 노름하기를 좋아하는 것, 공무와 무관하게 마음대로 통행금지를 위반하는 것 등을 처벌조항으로 꼽는다. 위반하면 곤장으로 처벌하거나 강제로 제대시켰다. 어영청과 금위영의 계령도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계령으로 명시할 만큼 군병들이 떼로 몰려다니며 행패를 부리거나, 사대부를 모욕하는 행위를 일삼았고 노름도 많이 했음을 알 수 있다.

수공업 기술이 없는 군병들은 각종 토목공사의 날품팔이 노동이나 한강 변에서 배에 실린 물품을 하역하는 부두노동자로서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다.

삼군영의 존재는 한양의 인구증가, 상업발달 등 조선후기 사회경제사에서 의미가 크다. 1863년 고종즉위 당시 중앙군영의 군병은 1만6000명에 달했지만 노약자가 많고 군기도 해이해져 매우 허약한 상태였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 조약으로 문호개방을 강요당하며 조선은 일본의 우수한 군사력을 절감하고 국방력 강화를 추진한다. 1881년(고종 18) 12월 중앙군제를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으로 통합하고 신식군대를 출범하면서 조선후기 중앙군의 핵심역할을 했던 군영들도 차례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참고문헌>

1. 한양의 삼군영. 서울역사박물관. 2019

2.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난리가(亂離歌). 시폐(市弊)

3. 한양을 지켜라. 서울역사박물관. 2020

4. 19세기 전반기 삼군문의 운영실태. 이수환. 영남대. 2007

5. 조선후기 전술변화와 중앙 군영의 편제 추이. 군사연구 제144집. 노영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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