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결속’돼 있는 이곳, 잊어선 안될 ‘생존 신고’

한겨레 2024. 3. 3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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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김금희의 나의 폴라 일지
전혀 다른 일상
펭귄마을 다녀온 뒤 곯아떨어져
‘기지 귀환 보고’ 건너뛰는 실수
셋째날 기지 주변 식물 탐구
카펫처럼 폭신한 이끼밭 발견
세종기지 주변에 형성된 이끼밭. 남극 생태계 최대 포식자인 스쿠아(도둑갈매기)도 이끼를 좋아한다. 김금희 제공

“여기서는 걸을 때 조심해야 해요. 누워 있으면 물개가 꼭 바위처럼 보여서 걷어찰 수도 있거든요.”

“걷어차면 어떻게 되는데요?”

앞지느러미를 딛고 일어난 물개를 보며 내가 물었다. 야생의 물개는 크고 육중했다.

“차인 물개 기분에 따라 다르겠죠. 사람을 안 무서워하고 또 빨라서 죽자고 쫓아올 수도 있고.”

만일 그런 일이 생기면 뛸 수 있을까,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펭귄 마을에 다녀오는 일정만으로 체력이 부치는데 화난 물개가 으르렁거리며 달려온다면? 나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최대한 신중하게 다녀야겠다고 다짐했다.

“근데 진짜 조심해야 하는 건 해표입니다.”

버디는 인근 기지에서 레퍼드(표범)해표(얼룩무늬물범)가 대원을 바다로 물고 들어가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고 했다. 나는 걸음이 빨라졌다. 버디는 자기가 너무 겁을 줬나 싶은지 해표는 물개와 달리 육지에서 아주 느리니까 큰 걱정은 말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해표는 몸 전체를 꿀렁꿀렁 꿀렁꿀렁 하며 기어다니니까.

해표들도 환경과 비슷한 무늬를 가지고 있다. 온순한 생김새인 웨들해표. 극지연구소 제공

크릴 악취? “젓갈 냄새라고 생각하세요!”

처음으로 남극인다운 활동을 하고 기지로 돌아온 나는 바로 침대에 쓰러졌다. 칼바람을 뚫고 자갈 해변을 걷느라 에너지를 바닥까지 썼지만 비로소 남극과의 첫 포옹을 마친 기분이었다. 안도감에 한참을 자다가 저녁식사 시간에 늦고 말았다. 세종기지에서는 6시가 되면 어린이의 낭랑한 목소리로 “벌써 저녁 시간이 되었어요. 하는 일 멈추고 식사하러 오세요. 밥은 먹고 지내요” 하는 공지가 나오는데 그 소리도 나를 깨우지는 못했다. 뒤늦게 눈을 뜬 나는 산발한 머리로 방한 점퍼를 대충 껴입고 연구동에서 나와 식당으로 갔다.

“오셨군요. 방에 전화를 안 받으셔서 궁금했었는데.”

대장님이 나를 반겼다. 잠에서 막 깬 차라 정신이 없던 나는 “잠이 들었습니다” 하고 대답한 뒤 식판에 밥을 담아 앉았다. 그리고 셰프의 손맛에 감탄하며 와구와구 먹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어떤 규칙을 어겼는지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작가님, 펭귄 마을 잘 다녀오셨습니까?”

한국의 가족들과 통화할 때 ‘옆방의 잘생긴 선생님’이라고 나 혼자 지칭하고 있던 탐사팀장이 말을 걸었다. 목소리까지 근사해서 처음 들었을 때 모든 멋진 주인공 역을 도맡아 했던 특정 성우를 떠올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는 다 절여진 배추처럼 피곤하던 터라 나는 좋았다고, 펭귄들을 봤다고만 짧게 대답했다.

“기지 복귀 보고가 없어서 대장님이 걱정하셨더라고요. 저녁 식사 시간이 되니까 애타게 찾으시고 총무님 보내서 확인까지 해보라고 하셨거든요.”

길이 엇갈려서 부르러 온 사람은 만나지 못했고 방 전화는 자느라 못 들었는지 어쨌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당황하고 있는데, 다정한 눈빛과 함께 나중에 슬쩍 잘 다녀왔다고 인사하시면 좋을 것 같다는 조언이 건네졌다.

“아, 아까 식당 들어와서 인사는 했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잘됐네요. 잘하셨어요.”

다시 멋진 미소를 보이며 탐사팀장은 다른 화제로 넘어갔지만 나는 생각에 빠졌다. 왜 당황하고 순간 뭔가를 방어하고 싶어졌는지를, 습관대로 행동하느라 지금 내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는지를. 식판의 밥을 다 먹기도 전에 그분 조언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지 식당에서는 밥을 먹고 나면 각자 식판을 애벌설거지해 식기세척기에 넣어야 했다. 식판을 들고 싱크대 앞으로 가는데 마침 대장님도 서 있었다. 나는 재빨리 기지 복귀 무전 하는 것을 잊어버렸고 오자마자 자느라 전화도 받지 못했으며 결국 걱정을 끼치고 말았다고 사과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펭귄 마을 힘들지는 않으셨어요? 저는 펭귄 마을 냄새 때문에 가기가 쉽지 않거든요.”

나도 악명 높은 펭귄 마을 냄새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아무리 펭귄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줄행랑을 치게 만든다는 펭귄의 똥과 먹이와 진흙이 합쳐져 햇빛 좋은 날이면 왕성한 화학 작용을 일으키면서 생성되는 그 악취를. 하지만 나는 그 냄새가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날이 흐려서이기도 했고 이상한 말이지만 워낙 젓갈을 좋아하는 편이기 때문이었다. 펭귄들 먹이가 크릴이라 내게 그 냄새는 푹 곰삭은 새우젓이나 토하젓처럼 느껴졌다.

“저는 완전 괜찮았습니다. 젓갈 냄새 같던데요? 대장님도 앞으로는 젓갈 냄새라고 생각하세요!”

이제 남극에 온 지 이틀밖에 되지 않은, 유독 스몰 토크에 취약한 나는 20년간 극지에서 활동한 월동대장에게 이런 정신없는 조언을 하고 말았다. 다행히 그분은 “오호, 그러셨군요!” 했고 다음에는 내 말대로 노력해보겠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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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차에 절감한 ‘공동생활’

그날 밤 방으로 돌아가 맞은편 위버반도를 망원경으로 바라보았다. 앞으로 쓸 남극 소설의 주무대로 생각하고 있는 곳이었다. 내가 오고 싶은 곳은 남극이었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킹조지섬이었고 세종기지였고 그리고 위버반도였다. 위버반도는 세종기지에서 바다를 5분 정도 건너가야 있었다.

눈으로는 망원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머리로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왜 뭔가가 석연찮은지를. 그런 끝에 인정해야 했는데, 나는 나 역시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주고 실수하고 잘못하는 인간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여태까지 해온 생활 패턴대로 남극 생활을 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도 했다. 남극은 인간이 원래 있을 수 없는 장소였고 기지는 엄밀히 말해 초대받지 않은 방문객들이 모여 있는 일종의 피난 시설이었으니까. 이틀만 경험했는데도 이곳은 추웠고 바람은 강했고 간 적 없는 험한 길을 걸어야 했고 외출을 위해서는 늘 한 사람이 더 필요했다. 내가 어디에서 뭘 하는지 누군가는 알고 있어야 했고 내 생활은 모두와 완전히 결속되어 있었다. 익명 속에서 시간을 보내며 종일 한 말이란 “아이스라떼 한잔 주세요”뿐인 일상과는 전혀 다른 생활이 펼쳐진 것이다. 나는 그날의 다이어리에 “공동생활”이라고 적고 “사람들은 지금 나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썼다. 그러니까 나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오해가 쌓이지 않게 그때그때 적극적으로 내 마음을 설명해야 한다고. 그 점을 깨우쳐준 옆방 선생님은 남극에서 만난 첫번째 은인이었다.

다음날 아침 한층 상승한 나의 친화력을 발휘하려고 일찍 일어났지만 안타깝게도 토요일이라 자율 배식을 하는 날이었다. 주말에는 셰프의 휴식을 위해 각자 알아서 자유 시간에 아침을 해결했다. 식당에는 각종 반조리식품과 반찬, 라면, 온실에서 키워낸 푸성귀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상추, 치커리, 로메인 같은 채소를 남극에서 먹을 수 있는 건 연구동 뒤 컨테이너에 만들어놓은 스마트팜 덕분이었다.

세종기지 온실에선 신선한 채소가 자라고 있다. 김금희 제공

이틀 전 둘러본 온실 트레이에는 흙이 아니라 양액에 심은 식물들이 엘이디(LED) 광선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식물을 좋아하는 나는 남극에서 채소를 수확하는 영광을 경험해보고 싶었지만 육지에서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으므로 꾹 참았다. 혹시라도 잘못돼 대원들이 신선한 채소도 못 먹고 괴혈병에 걸리면 어쩌나 싶었기 때문이다. 인스턴트 컵밥과 채소샐러드 조합으로 아침을 먹은 나는 복장을 갖추고 랩실로 내려갔다. 엘(L) 박사는 놀랍게도 내 이름표를 단 연두색 배낭까지 미리 준비해둔 상태였다.

‘즈려밟지’ 않으려 조심조심

우리는 차를 타고 연구 장소로 이동하기로 했다. 계단을 내려가 보니 거기에는 다 낡은 에스유브이(SUV) 한 대가 서 있었다. 기지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그 차는 모서리모서리마다 붉은 녹이 슬어 있었고 차체 마감재가 떨어져 나가 험지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차처럼 보였다. 차 안에는 어느 탑승자가 내던지고 간 플라스틱 통이 나뒹굴고 있었다. 안전벨트가 있기는 했지만 늘어나 있어서 과연 이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의심스러웠다. 물론 차 자체가 그렇게 오래된 것은 아니었고, 차가 이동하는 거리라고 해봤자 몇 킬로미터 안팎이었다. 도로는커녕 차로 갈 수 있는 길 자체가 없었으니까. 다만 남극의 칼바람과 눈, 추위에 시달리다 보니 폐차 직전처럼 보이는 것뿐이었다.

첫 연구 활동을 떠나는 차 안에서의 엠과 엘 박사. 한달 동안 일상을 함께한 의리의 팀이었다. 김금희 제공

엠(M)이 운전을 맡았고 엘 박사는 차 안에서 앞으로 우리가 연구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지역을 설명해주었다. 연구소에서는 ‘KGL1’, ‘KGL2’ 하는 식으로 세종기지 주변에 번호를 매겨두었는데 어느 날 내가 어떤 약자냐고 묻자 놀랍게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케이지(KG)는 킹조지일 테고 엘(L)은 뭐지?” 과학자들조차 서로 되물었다.

“킹조지 롱 텀 이콜로지컬 프로그램.”

우리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홍 선생이 차분하게 알려주었다. 알고 보니 그는 그렇게 섹터를 나눠 명명한 당사자였다.

“한국말로는 킹조지섬 장기 생태 모니터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음악의 아버지가 바흐라면 세종기지의 아버지는 정말 홍 선생님이시네요.”

엠이 또 비유를 써가며 감탄했다. 엠은 연구소로 자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지금껏 하던 연구와 극지를 연계해 앞으로의 연구 계획을 설계하고 있는 중이었다. 엠 박사의 주전공은 ‘식물 스트레스’였고 나는 그 연구를 위해 미국에서 공부한 그를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식물들이 겪는 다양한 고통을 위해 자신의 젊음을 바치다니, 그는 식물계의 슈바이처가 아닐까.

하지만 엠 박사는 그런 내 시선을 아주 부담스러워했다. 자기 전공을 이런저런 편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필요 이상으로 감동하거나 감탄하는 누군가를 옆에 두는 게 기지 연구자들에게는 뭔가 좀 어색한 것 같았다. 이론적 과학의 세계에 ‘감정’ 그 자체의 화신인 듯 보이는 이상한 관찰자가 등장한 것이었다.

우리의 첫 목적지는 ‘KGL9’로 분류되는 우주관측동과 체육관 옆이었다. 세종기지 주변은 여름이 되면 다양한 식물들이 번성한다. 그렇다고 갑자기 나무가 일어서거나 숲을 이루는 것은 아니고 바람을 피해 자갈과 바위와 물속을 조용히 덮어가며 남극의 방식으로 ‘만발’한다. 차에서 내려 배낭을 메고 연구 섹터에 도착하자 엘 박사가 식물들 이름을 알려주었다. 대학 강의실에서나 받을 수 있을, 남극 식물에 관한 특별한 과외였다. 남극 ‘식물밭’은 마치 카펫을 깔아놓은 듯 폭신폭신했다. 이끼들 때문이었다.

부드럽게 구부러진 모양의 아름다운 몸체를 가진 낫깃털이끼. 김금희 제공

“저… 작가님 되도록 걔들은 밟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모처럼 발밑의 부드러움을 만끽하고 있던 내게 엘 박사가 말했다. 어렵게 겨울을 이기고 등장한, 동그란 모양의 이끼가 내 등산화 밑에서 짜부라지고 있었다.

“아, 죄송해요. 조심하겠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얼른 옆 바위를 디뎠다.

“얘 이름은 사니오니아 운키나타(Sanionia uncinata), 낫깃털이끼예요. 만져보면 촉촉하고 부드럽죠? 이렇게 앉아서 들여다보면 끝이 낫처럼 구부러져 있고요.”

한올 한올 실처럼 가는 이끼들의 끝은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고 새들의 깃털처럼 줄기를 중심으로 미세한 실가지가 촘촘히 나 있었다. 그렇게 네 사람이 들여다보는 사이 내 코에서는 쉴 새 없이 콧물이 흘러나왔다. 그건 엠 박사도 마찬가지라서 우리는 배낭에서 휴지를 꺼내 닦아냈지만 이끼 관찰을 위해 고개를 숙이자 콧물이 다시 떨어졌다.

“그냥 여기서는 문명인이기를 포기하세요.”

이번이 일곱번째 남극 방문인 엘 박사가 어딘가 체념이 깃든 그러나 온화한 표정으로 조언했다.

“그런데 왜 우리만 콧물이 나는 거예요? 엘 박사님은 안 나잖아요.”

신기하게도 오로지 돌만 디디며 낫깃털이끼 카펫을 통과해가는 엘 박사를 보며 나는 투덜댔다.

“작가님이나 저나 면역이 안 좋아서 그래요. 스트레스 때문이겠죠.”

엠은 극지 연구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스트레스 전문가다운 답을 내놓고는 이따금 발을 잘못 짚어 낫깃털이끼에게 상해 스트레스를 남기면서 앞서 걸어갔다. 나는 아예 휴지를 돌돌 말아 콧구멍을 막고는 두 사람을 열심히 쫓아갔다. 그것이 문명인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최선의 슬기로움이었다.

소설가

단편집 ‘너무 한낮의 연애’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 ‘복자에게’, 에세이 ‘사랑 밖의 모든 말들’ ‘식물적 낙관’ 등을 썼다. 작고 단순하고 환해지기 위해 늘 분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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