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빚은 협곡에 사람이 낸 길을 걸었다 [ESC]

한겨레 2024. 3. 3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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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의 걷다 보면 대만의 자연
3천m 봉우리 27개 ‘타로코공원’
4년 넘게 길 만들며 264명 희생
국토 70%가 산…자연은 대륙급
아리산 지구, 차밭·천년목 ‘장관’
대만 타로코국립공원의 구곡동 길. 협곡에 길을 내는 데 264명이 희생됐다.

그야말로 심산유곡이었다. 산은 깊고 물은 그윽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 좁은 대리석 협곡이 끝없이 이어졌다. 험준한 바위 절벽은 내 머리 위까지 내려와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웠다. 발밑으로는 질 좋은 옥을 갈아 넣은 듯 푸른 물이 흘렀다. 고개를 들면 날카롭게 기세를 세운 산들이 어깨를 맞대고 서있었다. 작은 섬인 줄 알았는데, 자연은 대륙의 스케일이구나.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함께 온 이들 모두 풍경에 취해 걸음이 느렸다. 이 길에는 두 개의 힘이 깃들어 있었다. 자연의 힘과 인간의 힘. 이 협곡에 가해진 자연의 힘을 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간단하다. 충돌하는 두 판의 압력으로 인해 땅이 융기했고, 풍화작용과 강물의 침식력이 아열대 폭우와 결합해 바위와 산을 깎아냈다. 물과 바람의 힘만으로 이토록 가파르고 좁은 협곡이 탄생하다니 도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이 필요했던 걸까. 길어야 100년을 사는 나로서는 가늠조차 되지 않는 아득한 시간이다. 바위의 주름 하나하나가 기나긴 세월을 증명한다. 자연의 힘으로 생겨난 이 협곡에 길을 내기 위해 이번에는 인간이 힘을 모았다. 이 길을 내다가 264명이 희생되었다고 했다. 그럴 만도 했다. 이토록 깊은 산을 곡괭이로 깎아가며 4년 반에 걸쳐 길을 만들었으니. 생명이 스러진 자리가 길이 되어 우리를 이끌고 있었다.

동굴 들어가니 ‘물 커텐’이

석달 만에 다시 찾아온 대만. 이번에는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 차를 빌려 다니는 여정이었다. 대만의 자연을 들여다보기 위해 타로코 협곡까지 내려온 터였다. 대만 동쪽 태평양에 접한 타로코국립공원의 면적은 9만2천㏊. 남북으로 36㎞, 동서로 42㎞ 길이다. 해발 2천m가 넘는 산이 공원 면적의 절반을 차지하는데, ‘대만 100대 봉우리’에 등재된 봉우리 중 27개(모두 3천m 이상)를 품었다. 이 작은 나라에 3천m 넘는 산이 268개라니 믿기 힘들었는데 눈앞의 첩첩산중을 보니 좀 가늠이 되었다. 타로코(太魯閣)라는 이름은 대만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선주민 트루쿠(Truku) 부족의 이름에서 따왔다. 이 경이로운 땅에 오랫동안 깃들어 살아온 부족이 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우리는 먼저 샤카당 트레일로 향했다. 샤카당강을 따라 타로코 부족이 살고 있는 선주민 보호 구역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입구에는 선주민들이 ‘생계 유지를 위해 오토바이로 물품을 운반하며 지나다닐 수 있다, 불편을 끼쳐 죄송하다, 오전 8시, 오후 12시~1시, 4시 이후에 물품을 운송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그 글을 읽다 보니 한자로 된 사자성어가 생각났다. 적반하장.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그들이야말로 관광객으로 인한 불편을 감수해야 할 텐데…. 그들의 생활 터전에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거나 ‘소음을 일으키지 말라’ 같은 당부 글을 관광객에게 남겨야 하는 게 아닐까.

타로코 부족 청년이 샤카당 트레일에서 운영하는 카페에서 오목을 두는 지인들.

협곡을 따라 한시간 가까이 걸었을 무렵, 길 모퉁이에 타로코 청년이 꾸리는 카페가 보였다. 언덕 위로 테이블 몇개를 놓은 간이 카페는 제법 운치가 있었다. 메뉴판을 들여다보는 우리에게 먼저 와있던 대만 여성 둘이 외쳤다. “커피 마시고 가요. 여기가 천국이에요.” 커피를 주문하고 올라가니 옥색의 계곡물이 내려다보이는 아늑한 터가 나왔다. 과연 세상 근심 따위야 까마득히 지워질 것처럼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낮은 차탁 위에는 바둑판과 돌도 있었다. 여기서 바둑이라도 두면 세월 가는 걸 다 잊으려나. 자리를 잡고 앉아 바둑판을 끌어온 ‘에스(S)쌤’. 바둑판 한가운데 호기롭게 흑백 두알을 놓는다. 손가락을 깍지 껴 손을 푼 그녀, 몸을 낮추더니 ‘알까기’를 하는 게 아닌가. 한바탕 웃음이 터진 후, 종목은 오목으로 바뀌었다. 옆에서 커피를 마시던 체코 청년이 다가왔다. “와, 차이니스 체스 두는 거 처음 봐요.” 얼른 펙트체크를 해줬다. 이건 바둑이 아니라 오목이라는 간단한 놀이라고. 오목을 두는 동안 주문도 하지 않은 토스트 네쪽이 커피와 함께 나왔다. 우리를 불렀던 대만 여성이 웃으며 말했다. “제 선물이에요. 따뜻할 때 얼른 드세요.” 이방인에게 이런 다정한 호의라니, 무릉도원에라도 온 걸까.

바이양 트레일의 ’물 커텐 동굴’.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바이양 트레일. 아홉개의 터널을 통과하는 특이한 길이었다. 랜턴을 켜지 않고 어두운 터널을 걸어갔다. 두려운 마음이 조금씩 잦아들 무렵이면 희미하게 출구가 보이고 어느새 터널의 끝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터널 앞에 다다르니 대만 사람들이 비옷을 꺼내입고, 신발을 벗고 있었다. ‘물 커텐 동굴’은 이름처럼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 굴을 통과하며 흠뻑 젖는 곳이었다. 우리도 비옷을 꺼내입고, 샌들로 갈아신고 동굴 안으로 걸어갔다.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만한 좁은 길이 이어지고 왼쪽으로는 맑은 물이 흘렀다. 반대편 동굴의 끝에서 들어오는 빛이 보일 무렵, 물 폭포가 쏟아졌다.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터졌다. 작은 모험이 주는 즐거움이었다.

제비굴 트레일 모습.

세 번째 길은 제비굴(燕子口) 트레일. 이 길은 차를 가까이 세워두고 짧게 걸을 수 있어 사람이 가장 많았다. 하얀 대리석 절벽 위 침식으로 생겨난 구멍마다 제비가 날아들어 집을 짓는다니 따뜻한 봄날, 다시 이곳에 서보고 싶어졌다. 264명의 희생자를 낳은 아슬아슬한 도로와 터널을 걸어보는 구곡동 길까지 걷고 나니 어느새 문을 닫는 시간이었다.

‘고산차의 고향’ 아리산

우리의 다음 여정은 아리산이었다. 아리산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타이루거까지 내려왔으니 그 아래에 있는 아리산은 두세시간이면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국토의 70%가 험한 산으로 이루어진 대만의 지형을 무시한 순진한 착각이었다. 대만에서 가장 높은 산인 옥산(3952m) 주변의 2천m급 산림지구인 아리산은 대만 정중앙에 자리했다. 동쪽 끝의 타이루거 협곡을 관통해서 서쪽으로 이동, 아래로 내려갈 경우에 걸리는 시간은 6시간20분. 게다가 굽이굽이 산길이라 날씨가 나쁘면 도로가 자주 폐쇄될 정도로 위험하다고 했다. 우리가 왔던 길로 북으로 올라가 타이베이를 경유해 반대편 서쪽 도로로 내려오는 길은 5시간50분. 어느 쪽을 선택하든 하루를 잡아야 하는 거리였다. 긴 운전은 없을 거라고 장담하고 운전을 부탁한 터라 면목이 없었다. 타이베이로 돌아가는 길을 택해 아리산을 향했다. 아리산의 숙소까지 한시간을 남겨두니 고속도로가 끝나고 지방도로로 접어들었다. 급경사의 커브가 연속해서 이어지는 가파른 오르막이었다. 길 자체로도 겁이 나는데 안개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안개에 완전히 포위되어 그야말로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한치 앞을 모르는 요즘 내 인생과 닮은 길이었다. 이토록 지독한 안개는 처음이었다. 운전 3년 차인데 여전히 ‘초보 운전’ 딱지를 붙이고 다니는 나는 두려움에 손이 떨렸다. 다행히도 운전대를 잡은 ‘제이(J)쌤’은 담대했다. “앞이 안 보이네” 하면서도 태연한 얼굴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안개를 뚫고 다다른 숙소의 저녁 식사는 서늘한 밤공기에 어울리는 ‘핫팟’이었다. 채소와 해산물, 고기를 넣고 끓인 뜨거운 국물이 피로를 풀어줬다.

고산 우롱차로 이름난 아리산 차밭.

다음날 아침, 눈을 뜨니 창밖으로 근사한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은 온통 초록의 차밭이고, 그 너머로 높은 산이 차밭을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절로 감탄이 나왔다. 아, 그 유명한 아리산 고산차의 고향까지 왔구나. 이곳에서 우롱차를 구매하겠다는 야망이 솟구쳤다.

아리산 삼림공원 안을 달리는 열차.

아침을 먹은 후 아리산국가삼림유원지로 향했다. 이곳은 원래 대만 노송나무와 편백나무로 이루어진 울창한 원시림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삼림 운반 열차를 깔아 천년목을 벌목해 수탈한 곳이다. 그후 국민정부 시절까지 개발이 이어져 원시림은 거의 사라졌고, 단지 마흔그루의 거목만 남아 있다. 그 시절에 건설된 산업용 철도의 일부 구간이 운행 중이었다. 벚꽃이 그려진 빨간 열차는 타는 것만으로 마음을 설레게 했다. 이곳의 고도는 이미 2216m. 공기가 서늘했다. 열차는 자오핑역까지의 짧은 거리를 느릿느릿 달렸다. 역에 내려 잘 닦인 산책로를 따라 자매 연못을 향해 걸었다. 이 숲의 주인공인 레드 사이프러스 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숲을 채우고 있었다. 연못을 둘러보고 신성한 나무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다시 걸었다. 살아남은 거대한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있는 곳이었다. 1천년을 살아온 나무도 있었고, 3대가 2천년에 걸쳐 뿌리를 내리며 살아온 나무도 있었다. 가장 유명한 아리산 향림 신목 앞에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높이 45m, 둘레길이 12.3m에 이르는 신목의 나이는 무려 2300살. 고개를 한껏 뒤로 꺾어 올려다봐야 하는 나무 주변으로 울타리가 처져있어 만져볼 수는 없었다. 주름진 몸피에 귀를 대고 물을 빨아올리는 소리를 들어보고 싶었는데.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젊고 싱그러웠다.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빌고 싶게 만드는 나무였다. 그런 면에서 ‘신목’은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이토록 오랜 세월을 살아온 생명체가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었다.

버려진 건물 장악한 반얀트리

숲의 향기에 흠뻑 젖은 오후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지인이 추천한 다원을 찾아갔다. 아리산은 차 재배의 역사가 50년에 불과하지만 질 좋은 우롱차를 생산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다원 주인을 따라 차밭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어느새 안개가 자욱하게 몰려오고 있었다. 만개한 벚꽃의 분홍빛이 희미하게 지워지고 있었다. 차밭을 둘러본 후에는 본격적인 차 시음. 먼저 다하(통에서 꺼낸 찻잎을 보관하는 그릇)에 담긴 찻잎의 신선한 향을 맡고, 차를 우린 후 좁고 긴 흠향배에 따라 배어나는 진한 향을 맡아본 후, 잔에 따라 마셨다. 우유 맛이 나는 밀키 우롱, 훈연한 듯한 향이 나는 홍차, 좀 더 상큼한 꽃향이 나는 우롱차…. 맛과 향이 다른 다섯가지의 차를 시음한 후 각자 취향에 맞는 차를 한봉씩 사들고 다원을 나섰다. 아리산에 가서 천년목을 만나고, 고산차를 마시고, 차밭을 걷고 싶다는 바람이 다 이루어진 셈이었다.

안핑 트리 하우스’의 반얀트리.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는 대만의 옛 수도 타이난. 수천년 유적 같은 건 없지만 소박하고 오래된 건물이 빼곡한 도시의 풍경이 정겨웠다. 낡고 허름하지만 부족함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도시의 모습이다. 건물의 수명이 고작 30-40년에 불과한 나라에서 온 내게는 부러운 풍경이었다. 타이난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곳은 안핑의 트리 하우스였다. 소금 창고로 쓰이다가 버려진 건물을 장악한 건 반얀트리. 나무의 뿌리와 줄기가 뼈대만 남은 건물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은 생명력이었다. 그 나무들을 아래나 위에서 다양하게 볼 수 있도록 보도를 만들어 놓았다. 인간이 떠난 곳에서 자연이 어떻게 그 생명을 유지하며 번성해 가는지를 보여주는 곳이었다. 자연의 힘이 압도적인 공간을 이렇게 접근 가능하게 만든 건 또 인간의 힘과 지혜였다. 눈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같은 인생을 살지라도, 이런 생명력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서울로 돌아오니 앙상한 나뭇가지와 회색 콘크리트 빌딩 숲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온몸에 묻혀온 녹음의 기운이 금세 지워질 것 같아 나는 옷을 꽁꽁 여미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글·사진 김남희 여행가

여행가 김남희는 2003년 이후 유목민의 삶을 살아오고 있다. 언젠가는 앉아서 유목하는 경지에 오르기를 바라면서, 지은 책으로는 ‘길 위에서 읽는 시’, ‘여행할 땐, 책’,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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