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하지만 이민자는 싫어…네덜란드 ‘부의 역설’[딥다이브]
성매매·안락사·동성애 결혼을 합법화한 관용의 나라, 종교박해를 피해온 위그노를 받아들인 자유의 나라, 세계 최초 다국적 기업 동인도회사를 탄생시킨 세계화 원조 국가. 어디인지 아시겠죠? ‘세계에서 가장 개방된 부자 나라’로 불려 온 네덜란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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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난민·유학생, 이제 그만
네덜란드가 외국인을 향해 활짝 열렸던 문을 빠르게 닫고 있습니다. 최근 시행됐거나 시행 예정인 정책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외국인 근로자 위한 세금감면 혜택을 대폭 줄입니다
=네덜란드는 ‘30% 룰링’이라 부르는 고학력 외국인 근로자를 대상으로 하는 세금감면 혜택이 있었습니다. 5년 동안 급여의 30%를 소득공제(과세표준에서 제외)해주는 파격적인 제도였는데요. 올해 1월 1일부터 혜택을 크게 축소합니다. 5년을 20개월씩 세 구간으로 나눠, 단계별 소득공제 비율을 30%-20%-10%로 점차 줄이는 거죠.
=누군가가 네덜란드에 망명을 신청했을 때, 그가 실제 위험에 빠졌는지를 어떻게 확인할까요. 지금까진 이민귀화국이 신청자의 진술을 듣고 난민 지위를 줄지 말지를 판단했는데요. 올해 여름부터는 절차가 바뀝니다. 망명 신청자 본인이 자국에서 위험에 처해있다는 증거를 직접 제출해야 하죠. 그냥 단순히 위협받는 집단에 속한다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자신이 개인적으로 위협 당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하죠. 한층 까다로워지는 건데요.
이렇게 바꾸는 이유는 뻔합니다. 망명 신청자들이 네덜란드행을 포기하고 다른 유럽 국가로 가게 하려는 거죠. 지난해 11월 선거에서 극우정당인 자유당(PVV)은 “망명 신청자의 유입으로 인해 네덜란드 납세자들이 연간 240억 유로의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 “망명 신청자들은 고급 유람선에서 무료 뷔페를 즐기는 반면, 네덜란드 가족들은 식료품 지출을 줄여야 한다” 같은 극단적인 주장을 펼쳤습니다.
③유학생을 줄이기 위해 네덜란드어 강의를 늘립니다
지난달 네덜란드 대학 14곳이 유학생을 줄이는 데 합의했습니다. 이를 위해 영어로 진행되는 학사 프로그램을 대폭 줄이고, 유학박람회를 통해 외국 학생을 모집하는 것도 자제하기로 했죠. 또 주요 전공(예-경제학이나 심리학) 학사 프로그램은 네덜란드어로 진행하겠다는 계획인데요. 이에 더해 네덜란드 교육부는 영어로 진행하는 학사 코스의 최대 학생 수 상한선을 정해놓는 법안 제정도 추진 중입니다. 일종의 ‘유학생 쿼터제’를 도입하려는 거죠.
네덜란드는 지난 12년 동안 대학 학생 수(대학원 포함)가 25%나 증가했는데요(2011년 65.6만명→2023년 82.1만명). 현재 전체 학생의 4분의 1이 외국 국적이라고 하죠. 학사 프로그램의 30%는 영어로만 제공됩니다. ‘대학의 영국화’라는 비판과 함께, 강의실·거주지가 심각하게 부족하다는 불만이 커졌습니다. 그러자 이젠 급격한 ‘대학의 네덜란드화’로 돌아선 건데요. 네덜란드 대학 교수 중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외국인 교수들은 네덜란드어를 하지 못해서 일자리를 잃을까 떨고 있다고 합니다.
외국인 때문에 살기 어렵다고?
개방적인 국가로 유명했던 네덜란드는 왜 돌변했을까요. 흔히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민자가 최근 들어 너무 급증해서, 네덜란드 사람들이 살기 팍팍해졌다고요. 주택공급 부족과 치솟는 임대료, 이게 다 외국인이 밀려들어 온 탓이라는 거죠.
이런 대중의 불만을 극우 포퓰리즘이 파고듭니다. 지난해 11월 네덜란드 하원 선거에서 극우정당인 자유당(PVV)이 37석을 확보하며 제1당으로 올라섰죠. ‘다시 네덜란드를 네덜란드인에게 돌려주겠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는데요. 자유당 대표 헤이르트 빌더르스는 온갖 혐오 발언으로 유명한 정치인이죠. ‘네덜란드판 트럼프의 승리’였습니다.
경제 번영기에 극우정당은 득세
시프마 박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경제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을 땐 유권자들은 경제 자체를 가장 중요한 이슈로 인식하기 때문에 극우정당에 투표할 확률이 낮아집니다. 경제가 상대적으로 좋아지면 이민 문제가 부각되고 극우정당이 지지를 얻을 가능성이 생깁니다.”
경제가 정말 나쁠 때, 유권자의 최우선 관심은 경제 살리기이죠. 주구장창 ‘반이민’만 외치는 극우 포퓰리즘 정당은 설득력 있는 경제정책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경제침체기에 그들이 외면받는 이유입니다.
반면 경제가 괜찮고 먹고살 만하면 오히려 반이민 주장이 귀에 쏙쏙 박힙니다. 프랭크 몰스 미국 퀸즈대학 연구원은 2017년 ‘부의 역설’이란 용어로 이를 설명했는데요. 경제적으로 어려워서가 아니라, 혹시 자신이 가진 부를 잃게 될까 봐 두려워서 이민에 반대한다는 겁니다.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얻지 못할까 봐, 지위가 떨어질까 봐 불안해서 반이민 정책에 표를 던지는 거죠. 부유해지면 관대해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잃을 게 많아지는 셈입니다. 네덜란드뿐 아니라 호주·노르웨이·오스트리아·스위스처럼 경제가 탄탄한 국가에서 국수주의적 포퓰리즘 정당이 급부상한 건 대체로 경제적 번영 이후라고 합니다.
이민 막으려면 경제를 파괴하라
‘이민자들은 집과 일자리를 뺏어가고 임금 수준을 떨어뜨리고 복지국가를 훼손한다. 나라의 정체성과 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위협이다.’
반이민 세력의 흔한 주장이죠. 하지만 지난해 ‘How Migration Really Works’ 책을 낸 암스테르담대 사회학과 하인 데 하스 교수가 30년 동안 이민을 연구한 결론은 다릅니다. 그에 따르면 노동 수요가 외국인 이주를 이끄는 진짜 동인입니다. 부유하고 번영하는 개방형 경제는 많은 노동 이주자를 끌어들이기 마련입니다. 즉, 이민자 급증은 나라 경제의 성공 신호이죠.
물론 아무리 많은 증거와 연구결과를 들이대도 고정관념을 깨기란 쉽지 않습니다. 시간이 꽤 오래 걸리죠. 어쩌면 일단 한번 극단으로 쏠린 뒤에야 제자리를 다시 찾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캐나다 출신 네덜란드 기업가 알리 닉남은 블룸버그에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네덜란드를 보면 정말 살기 좋은 나라 중 하나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여요. 우리가 그토록 열심히 일해서 얻은 위대한 것들을 모두 잃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By. 딥다이브
지난해 호주 임대주택난을 전해드리면서, 사실 누적된 주택정책 실패 탓인데 극우정당은 이를 이민자 탓으로 호도한다고 설명드린 적 있습니다(딥다이브 호주 임대대란편). 네덜란드도 마찬가지 상황인데요. ‘이게 다 이민자 때문’이란 프레임을 씌움으로써 지난 10년간의 주택공급 정책 실패를 가리고 있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
-외국 인재를 끌어들이는 개방된 국가로 통하던 네덜란드가 최근 빠르게 문을 닫고 있습니다. 고숙련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세제 혜택을 대폭 줄이고, 망명 신청 절차를 까다롭게 바꾸고, 유학생을 줄이겠다며 네덜란드어 대학 강의를 늘리고 있죠.
-심지어 지난해 11월 하원 선거에선 ‘네덜란드를 네덜란드인에게 돌려주겠다’고 선언한 극우 포퓰리즘 정당이 제1당이 됐는데요. 먹고 살기 어려워져서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네덜란드는 경제적으로 번영의 시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경제 침체기엔 구호뿐인 ‘반이민’ 정책보다는 실질적인 경제 정책에 유권자 관심이 쏠리기 때문에 극우정당 지지율이 오히려 떨어집니다. 반면 경제가 번영하고 사람들이 부유해지면 반이민 주장이 귀에 쏙쏙 들어오죠. 가진 걸 잃으면 어쩌나 하는 막연한 불안감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부의 역설’입니다.
-이민자가 급증하는 건 사실 경제 성공의 신호입니다. 유입을 정말 막으려면 경제를 파괴하는 방법밖엔 없습니다. ‘이민자를 막겠다’는 정치인 약속의 허구성을 깨달아야 하지만,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이 기사는 29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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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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