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보는 세상] 승자와 패자

도광환 2024. 3. 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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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역사화는 서양미술에서 퍽 존중받는 장르다. 승리, 애국, 영웅 등을 다루면서 주문자의 취향에 응답하기 때문이다.

네 편의 역사화를 통해 화가들이 시대에 어떻게 부응했는지 살펴본다.

로마 대표 영웅은 카이사르(Caesar)다. 황제가 되지 못했지만, 로마 황제들 이름에 '카이사르'는 접미사처럼 쓰였다. 독일 '카이저(Kaiser)', 러시아 '차르(Czar)', 영어 '시저(Caesar)'의 기원이기도 하다.

산부인과 수술인 '제왕절개(Caesarean section)'에도 그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데, 그가 이 수술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카이사르가 '전쟁의 신'으로 불린 이유는, 그가 집필한 '갈리아 전쟁기'에 잘 묘사돼 있다. 이 전쟁에서 그를 가장 괴롭힌 상대는 베르킨게토릭스였다.

BC 52년께, 마침내 난적을 무찌른 카이사르(오른쪽)가 베르킨게토릭스(왼쪽)로부터 항복 받는 장면을 프랑스 화가 리오넬 노엘 로이어(1852~1926)가 그렸다. '카이사르에게 항복하는 베르킨게토릭스'(1899)다.

'카이사르에게 항복하는 베르킨게토릭스' 프랑스 크로자티에 박물관 소장

말을 타고 온 베르킨게토릭스는 항복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협상하러 온 사람처럼 당당하다. 화가 로이어는 베르킨게토릭스 후예다. 로마 시절 갈리아 지방은 프랑스도 포함하므로 로이어는 그를 굴종의 모습으로 그리고 싶지 않았던 거다.

마치 신의 현현(顯現)처럼 앉아 있는 카이사르 표정은 한 번 보면 잊기 어려울 정도로 강렬하다.

1492년은 스페인 역사에서 꼭 기억해야 할 연도다. 8세기 이래 스페인을 지배했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레콘키스타(재정복)'를 완성한 해다.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프라디야 오르티스(1848~1921) 작품, '그라나다 함락'(1882)은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 부부(오른쪽)가 그라나다를 떠나는 이슬람 술탄 보압딜(왼쪽)로부터 항복 받는 장면이다.

뒤로 그라나다를 상징하는 알람브라 궁전이 보인다. 목숨을 구제받은 보압딜은 그라나다를 떠나기 전, 알람브라를 바라보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라나다 함락' 스페인 상원 궁전 소장

스페인 최고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도 전쟁화 걸작을 한 점 남겼다. '브레다의 항복'(1635)이다. 1625년 스페인 군대가 전략 도시였던 네덜란드 브레다를 함락시킨 사실을 묘사했다.

네덜란드 장군 나사우(왼쪽)가 스페인 장군 스피놀라(오른쪽)에게 열쇠를 건네주는 장면으로 그린 것인데, 이 묘사는 벨라스케스 독창성의 실현이다. 승장이 말에서 내려 패장을 위로하는 모습은 '관용의 스페인'을 강조하는 상상의 산물이었다.

'브레다의 항복'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

러시아 정치는 뒤늦게 발화했지만, 표트르 대제 이후 유럽 강국으로 부상했다. 그는 신분을 숨긴 채 서유럽에 가서 선진 문명을 직접 체험할 정도로 러시아 미래는 서유럽에 있다고 봤다. 이를 '서구주의'라고 부른다.

반대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러시아 정교회를 중심으로 고유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슬라브주의'가 그것이다. 이 두 세력 대립은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오른쪽에 말을 타고 냉혹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인물이 표트르(서구주의)다. 왼쪽에는 반란을 일으켜 처형을 기다리는 총기병(슬라브주의)이 촛불을 든 채 수레 위에 앉아 있다. 죽음을 앞뒀지만, 표트르를 노려보는 눈매가 예사롭지 않다.

'총기병 처형의 아침'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러시아 역사화의 장인, 바실리 수리코프(1848~1916)가 그린 문제작, '총기병 처형의 아침'(1881)이다. 1698년 발생한 실화다.

수리코프는 이 그림을 통해 역사적 사실만 그리지 않았다. 순교의 의미가 담긴 총기병의 하얀 옷과 그를 둘러싼 군중의 운집은 은연중에 '슬라브주의'를 옹호한다. 개혁이란 민중의 지지와 동의가 따라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네 작품 구도는 동일하다. 승자는 오른쪽에, 패자는 왼쪽에 자리 잡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른쪽'은 '다수'와 '승자'를 상징한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긴 하지만, 승리는 오른쪽에도, 왼쪽에도 있지 않다. 패자로 그려진 베르킨게토릭스, 보압딜, 나사우, 총기병도 그들 편에서는 패자가 아니다.

역사는 '방향'이다. 패자로 기록되고 남았을지언정 방향이 옳다면, 그는 승자다. 방향은 누가 판단하는가? 후세 몫이다.

doh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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