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안 풀리거나 해방이 필요할 때? 中 훠궈집으로 간다 [혀 끝의 세계]

2024. 3. 30.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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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그런 솥에 넣는 식재료는 포용 상징
원하는 대로·원하는 만큼 추억을 익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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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 끝의 세계
해외여행에서 먹은 한 파스타의 소스가 너무 궁금했지만 ‘몰라서’ 몇 년 동안 그리워만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됐죠. 중식 스타일 면요리에 들어가는 굴소스였다는 걸 말이죠. 열린 신세계는 입맛의 지평을 넓혀줬습니다. 알고 먹으니 한입의 무게가 달라졌습니다, 먼 나라 이웃들의 입맛에도 문화에도 관심이 가게 된 이유죠. 세계의 식탁을 둘러 싼 숨은 이야기를 찾아가 봅니다. 눈으로 먼저 혀 끝의 세계를 만난 뒤, 주말이나 일상의 틈새에 새롭지만 즐거운 한입을 권해봅니다.
중국드라마 환락송(Ode to JoyⅡ) 시즌2 마지막회에서 여자 주인공들이 훠궈를 함께 먹는 장면. [유튜브 캡처]

[헤럴드경제=김희량 기자] “보글보글…”

어쩌면 이 소리는 육수가 아닌 추억이 익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가족만큼 가까운 여성 5명이 식탁에 둘러앉아 바쁘게 젓가락을 휘젓는다. 중국드라마 ‘환락송2’ 마지막회 등장하는 이 장면을 보라. 결혼과 인간관계, 연애, 우정에 대한 열변과 수다의 중심에 있는 한 음식이 있다. 바로 중국인의 소울푸드라 불리는 훠궈(火鍋, hot pot)다.

드라마 ‘이지파생활’ 속 남자주인공 추이리신이 홀로 훠궈를 먹고 있다. [웨이보 캡처]

훠궈는 ‘환락송2’ 뿐만 아니라 각종 드라마와 영화에 등장한다. 드라마 ‘이지파생활(理智派生活)’의 여주인공 선뤄신이 좋아하던 이 음식을 홀로, 또 같이 먹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훠궈는 함께 먹는 추억, 만남을 가능케 하는 매개체가 된다.

무엇이 이들을 훠궈 앞으로 모이게 하는가.

둥근 냄비에 소고기, 양고기 등 각종 육류와 채소, 해산물 등을 넣어 익혀 먹은 일종의 중국식 샤브샤브인 훠궈에는 ‘포용’이 녹아 있다. 냉기가 흐르든, 비린내가 나든, 훠궈는 모든 음식을 다 끌어안는다. 어울리지 않을 법한 천엽, 오리 창자, 돼지 뇌, 개구리, 토끼 등 식재료도 훠궈 속에서 함께 익어간다. 육수가 온갖 식재료를 익히는 과정을 두고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긴다’고 표현하는 학자까지 있다.

냄비가 둥글어 ‘모여 먹기’에도 좋다. 같은 것을 바라보고, 같은 것을 입에 떠넣는 행위는 의식(ritual)이 되고 추억이 된다. 취향에 맞는 식재료, 소스까지 ‘내 뜻대로’ 할 수 있고 선택해야만 먹을 수 있는 훠궈는 취향 존중 음식의 대표 주자이기도 하다.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이 한 장면. [해당 영화 캡처]

미국 영화에도 훠거가 등장한다.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는 도쿄에 방문한 미국인 두 사람이 찾은 식당은 이들로부터 ‘최악의 식당’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왜? 주인공 밥이 말한다. “손님에게 요리하게 시키다니.” 누군가가 하나부터 끝까지 만들어주는 음식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훠궈라는 음식이 불편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훠궈의 기원은 어떻게 될까. 4000년 전, 5000년 전을 이야기하는 이도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남북조시대(420년~589년) ‘북사(北史)’의 기록을 꼽는다.

“‘요’라는 이민족이 만든 청동 용기가 있었는데 입구가 크고 하단이 널찍한 동찬(銅㸑)이었다. 얇고 가벼워서 음식을 쉽게 익힐 수 있다.”

당시 중국의 북방 지역은 너무나 추워 솥에 물을 넣어 식재료를 익혀서 먹어야만 했다. 이 문화가 전국 각지로 퍼지며 우리가 아는 지금의 훠궈가 됐다. 훠궈의 글자는 불(火)과 냄비(鍋)라는 뜻이다. 화로 혹은 솥이라는 의미도 있다. 흔히 마라훠궈라는 빨간색의 고추가 동동 띄어진 얼얼한 맛을 상상한다. 사실 훠궈는, 토마토·버섯 등 육수 재료도 다양하고 종류가 수백 가지다.

중국에서는 훠궈를 크게 남방훠궈와 북방훠궈로 나눈다.

신선로 형태의 북경 훠궈. [바이두 캡처]

북방훠궈는 길다란 화통이 특징인 중국식 신선로에 재료를 넣어먹는데 주로 맑은 육수를 쓴다. 화통의 기능을 모르는 경우 고기가 탈 수 있다.

같은 북방훠궈라 해도 동북 지역과 북경 지역의 훠궈가 다르다. 서태후가 국화 꽃잎을 한 줌 집어넣고 집어 먹었다는 국화훠궈는 북경식이다. 한국인이 즐겨 먹는 태극 모양으로 냄비, 백탕과 홍탕 크게 2가지 맛을 동시에 먹을 수 있는 훠궈는 원앙훠궈다. 이외에도 한방 재료가 들어가는 약선훠궈, 다양한 고기가 들어가는 신장(新疆)훠궈가 있다.

빨간 고추가 가득한 마라훠궈는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쓰촨성 충칭지역을 대표하는 남방훠궈의 일종이다. 사천성 자공 지역에서는 물소의 내장을 먹을 방법을 고민하다 이를 마라 향이 가득한 홍탕에 넣었다는 설이 있다. 마라훠궈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만큼 충칭은 훠궈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드라마 ‘이지파생활’에서 남자주인공 추이리신이 홀로 훠궈를 먹고 있다. [웨이보 캡처]

2022년 충칭시에서는 중국 정부에 훠궈 요리사(火锅料理师)를 국가가 인증하는 전문직으로 등록해 달라 요청한다. 이 요청이 통과되자 1000만명에 이르는 훠궈 산업종사자는 이제, 일반 노동자가 아닌 중식 조리 분야의 전문 기술자가 됐다.

훠궈와 관련해 또 다른 특이점은 중국이 가진 ‘훠궈 부심(자부심)’이다.

중국의 훠궈는 하나의 ‘산업’으로 분류된다. 중국 전체 요식업의 3분의1을 차지한다. 2020년 기준 경제적 가치는 5843억 위안(약 95조8000억원, 중국 내 훠궈 산업 규모)에 달했다.

혼자서, 또 함께도 즐길 수 있는 이 음식은 대륙을 넘어 한국, 유럽 등에 알려진 문화외교관 역할까지 한다. 중국식품보망에 따르면 중국 훠궈 식당은 2017년 60만 개가 넘으며, 2024년에는 100만 개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의 한 훠궈 프랜차이즈 매장의 모습. 김희량 기자

중국 대표 훠궈 프랜차이즈인 하이디라오는 지난해 매출만 414억위안(약 7조6859억원)이다. 2022년 기준으로 중국 본토 내 매장은 1300여개다. 영국 런던, 미국 LA, 한국 서울 등 125개 해외매장을 갖고 있다. 2014년 9월 명동 1호점을 시작으로 한국에서도 매장을 늘려가고 있다.

중국에는 24시간 운영하는 하이디라오 매장도 있다. 자정이 넘는 새벽에도 나를 위한 풍성한 훠궈 상차림이 차려질 수 있다는 게, 큰 매력이라고 말하는 한국인들도 많다. 서울 하이디라오 서초지점의 영업시간은 오전10시부터 그 다음날 오전 5시까지다.

중국 음식이지만 훠궈 사랑을 외치는 한국인들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일반 샤브샤브와 달리 계란죽도 없고, 칼국수도 없는 훠궈에 우리가 왜 열광하는가.

훠궈를 사랑하는 이들의 숫자만큼이나 이유가 있겠다. 기자에게는 수많은 재료 중 원하는 재료만 골라 익혀 먹을 수 있는, 내가 그만하고 싶을 때까지 먹을 수 있는, 그 자유가 해방감을 느끼게 했다. ‘원하는 대로’ 되는 게 하나라도 있다는 건 가끔, 하루의 노고를 잊게 해 주는 큰 힘이 된다.

〈참고자료〉

중화미각, 김민호·이민숙·송진영 외 지음, 문학동네

훠궈 : 내가 사랑하는 빨강, 세미콜론

hop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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