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광주·삼풍…진혼굿으로 영혼 달래던 ‘국민 무당’ 있었다

한겨레 2024. 3. 30.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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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김도훈의 낯선 사람 김금화
‘미신 타파’ 정권 탄압에도 명성
‘한미수교 기념’ 미국에서 공연도
억울한 죽음 현장 찾아가 위로
2015년 4월 인천 화수부두에서 배연신굿(배와 사공들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을 하고 있는 무속인 김금화씨의 모습. 연합뉴스

굿을 본 적이 있다. 어린 시절 시골에 갔다가 굿판을 봤다. 친가 쪽 시골인지 외가 쪽 시골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얀 옷을 입은 젊은 여자가 칼을 들고 돼지머리 앞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삥 둘러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와 사람들이 뭔가를 비는 소리가 시끌벅적하게 났다. 어린아이에게는 어쩐지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그게 왜 무서웠는지는 모르겠다. 시골에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화려한 색과 반복적인 소음 때문이었을지 모르겠다. 그 뒤로 나는 무속적인 상징에 대한 어떤 공포증 같은 것을 얻었다. 친구 집 갈 때도 무당 사는 집 근처는 피해서 갔다. 철문에 꽂혀 있는 대나무 깃대만 봐도 소름이 끼쳤다.

물론 어린 시절 내가 무서워했던 것은 무당집 대나무 깃대만은 아니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상도 무서워했다. 이건 좀 이유가 다르다. 성당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을 다녔던 탓이다. 유치원 복도에는 예수 그리스도상이 하나 서 있었다.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30대 후반 외국인의 석상은 6살짜리 아이의 눈에는 루시퍼나 다름없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종교적 상징이라는 건 그게 뭐든 아이들에게 본질적인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예수 그리스도상이 웃는 표정이라도 하고 있었으면 좀 달라졌을까. 아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웃는 표정을 짓는 건 더 무서웠을 것이다.

영화 ‘만신’에서 김금화를 연기하는 배우 문소리(맨 오른쪽). ㈜엣나인필름 제공

영화 ‘만신’이 보여준 것

‘파묘’를 보면서 무당을 생각했다. 오컬트 장르를 지속적으로 만들어온 장재현 감독의 ‘파묘’가 천만 관객을 넘어섰다. 세대가 다른 무당과 풍수사와 장의사가 무속 어벤저스처럼 험한 존재와 대결을 벌이는 영화다. 각각의 캐릭터가 주는 매력이야말로 이 영화의 노른자위다. 이미지에 있어서라면 풍수사와 장의사는 무당을 넘어설 수가 없다. 하얀색 스니커즈를 신고 굿판을 벌이는 젊은 무당이라는 존재는 ‘파묘’의 출발이자 귀결이다. 한 페이스북 친구에 따르면 초등학생 중에서 장래 희망으로 ‘무당'을 이야기하는 아이들이 생겨나고 있단다. 무당을 힙하게 만들다니 역시 ‘천만 영화’는 다르다.

무당이라는 존재가 존경받은 적은 거의 없다. 적어도 1970년대 후반생인 내가 보기에는 없었다. 무당은 사라져가는 존재였다. 혹은 비과학적인 행위로 밥을 벌어 먹고사는, 사라져야 하는 존재였다. 1990년대가 되자 무당은 신문 광고나 버스 좌석 광고로 동네에만 머무르던 영향력을 넓히려 시도했다. 그 시절 가장 유명한 건 그리 미모가 훌륭하지는 않은 무당이 자기 얼굴을 걸고 “내 미모에 반해 전화를 하면 호통을 들을 것”이라 호통치던 종이 광고였다. 미모에 반해 전화를 한 사람이 몇이나 됐을지는 모르겠다. 내 대학 친구 하나는 술 취한 채 새벽에 집에 기어 들어갔다가 시끄러워서 일어나 보니 칼 든 무당이 춤을 추고 있었단다. 다 큰 딸이 자꾸 바깥으로 나돌아 다니니 걱정스러웠던 부모님이 벌인 일이었다. 우리는 웃었다. 무당이 그녀의 역마살과 도화살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탓이다.

내가 무당이라는 존재에 대한 깊은 불신을 접은 것은, 아니, 불신을 접었다기보다는 다른 종류의 존경을 품게 된 것은 영화 ‘만신’(2013) 덕이다. 박찬욱 감독의 동생인 박찬경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만신 김금화'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전기 영화다. 단순한 다큐멘터리를 넘어서서 김새론·류현경·문소리 배우가 각각 나이의 김금화를 연기하는 픽션 부분이 들어 있는 다층적 구성의 영화다.(네이버 ‘시리즈온’에서 겨우 1천원에 감상할 수 있으니 꼭 보시길 권한다.) 이 영화는 무당과 굿에 대한 나의 오랜 편견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무속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무속이라는 것이 사실상 이 나라의 어떤 전통을 지탱하는 일종의 의식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니다. 나는 무속이 종교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동네 무당에게 500만원을 주고 첫째 아들은 글러 먹었고 둘째 아들이라도 의대 가야 하니까 의대 정원 수 2천명 늘려달라고 굿을 벌이는 당신을 비난할 생각도 전혀 없다. 김금화 선생이 있었던 덕이다. 그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문화재가 된 무당이다. 무당이 무속이라는 세계 바깥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린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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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인천 팔미도 앞바다에서 배연신굿을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미국에서 작두 타고 ‘기립박수’

만신 김금화는 1931년 황해도 연백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2살에 처음 무병을 앓았다. 14살에 결혼했지만 17살이 되던 해 시집살이를 피해 친정으로 도망쳤다. 한번 무당 집안 딸은 영원히 무당 집안 딸이던 시절이다. 그는 친정으로 도망친 해 외할머니이자 역시 만신인 김천일에게 내림굿을 받았다. 무당이 되자마자 김금화의 명성은 빠르게 높아졌다. 19살에 대동굿을 혼자 해낼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한국전쟁 때 월남한 김금화는 1965년 서울로 활동지를 옮겼다. 김금화는 그냥 무당이 아니었다. 그는 1972년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참가했다. 거기서 ‘해주장군굿놀이'로 개인연기상을 받았다. 무당이 민속대회에 출전하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전례가 없는 일은 비판에 직면하게 마련이다. 많은 민속학자들과 대중이 그의 퍼포먼스를 좋아했지만 박정희 정권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미신 타파'를 부르짖던 군사정권의 눈에 김금화는 사람을 현혹시키는 동네 무당에 불과했을 것이다. 사실 그 시절 한국 최고의 미신은 박정희 그 자체였지만, 원래 미신이 미신을 제일 미워하게 마련이다.

김금화는 굿을 접지 않았다. 그의 굿은 정권의 탄압에도 서서히 민속학자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만신 역시도 자신이 지켜온 전통이 단순한 무속의 영역을 떠나 예술의 한 분야로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여겼던 것 같다. 그는 1982년 한-미 수교 100주년 문화사절단의 일원이 됐다. 김금화가 자서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의 미국 공연은 “나라 망신 시킬 일 있냐. 무슨 굿이냐”고 호통치던 한국영사관 직원들 때문에 열리지 못할 뻔했다. 가까스로 설득당한 영사 덕에 겨우 무대에 오른 김금화는 미국인들 앞에서 작두를 탔다.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미국 공연에서 압도적인 찬사를 받으며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무당으로서는 처음 받는 국가적·대중적 존경을 받기 시작했다. 만약 ‘국민 무당'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김금화야말로 그 희한한 이름에 어울리는 인물일 것이다. 그는 죽기 전까지도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자택이나 인천 강화도에 있는 굿당 ‘금화당’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후학을 양성했다.

1998년 경기 파주시에서 ‘통일 기원 판굿’을 연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세금 제대로 내고 치유하는 직업인

김금화는 개인을 위한 굿만 하는 무당은 더는 아니었다. 그는 국가의 한을 풀어주는 진혼굿에 힘을 쏟았다.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진혼굿이 한국만큼 자주 필요한 국가는 드물 것이다. 김금화는 삼풍백화점 붕괴, 세월호 침몰 등 국가적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진혼굿을 벌였다. 그는 5·18 민주화운동이나 제주 4·3사건 희생자들을 위한 굿도 벌였다. 그는 위로가 필요한 곳 어디에나 있었다. 김금화는2019년 작고했지만 그의 굿은 유튜브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다. 영화 ‘만신’에서 그는 경기도 파주 북한군 묘에서 지노귀굿을 벌인다. 도대체 누가 묻혔는지 알 수 없는 무덤 앞에서 몸짓으로 한을 토해내는 그 장면을 보다 보면 그 모습을 생전 직접 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될 지경이다. 김금화는 생전에“굿은 잔치”라고 말했다. 그렇다. 누구에게나 잔치가 필요하다. 산 자를 위한 잔치도 필요하고 망자를 위한 잔치도 필요하다. 산 자와 망자를 잇는 잔치도 필요하다. 이제 그 잔치는 오랜 한국적 예술의 하나로 받아들여져야 마땅하다.

그래서 내가 무당을 믿느냐. 그건 곧 내가 무속을 믿느냐는 질문과 이어질 것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지난 몇년간 몇번의 점을 본 적이 있다. 신점도 있었다. 종교도 없는 자칭 과학주의자가 왜 점을 보러 갔냐고 묻는다면, 나도 모르겠다. 리처드 도킨스가 들으면 학을 뗄 일이다. 그래서 내가 무속에서 위안을 얻지 못했냐고? 위안을 얻었다. ‘내 인생 내가 어쩔 도리는 없다'는 깨달음에서 나오는 위안이었다. 김금화는 죽기 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당 안 되고 공부 많이 했으면 의사 아니면 검사 그런 거 했을 거야.” 아니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의사와 검사는 필요 없다. 그보다는 스니커즈를 신은 무당이 더 낫다. 게다가 무당 직업코드는 41622다. 한국은 굿을 일종의 정신적 테라피로 분류한다. 무당은 테라피를 서비스하는 직업인이다. 종교와는 달리 상업적인 서비스라 납세의 의무도 있다. 세금 제대로 내는 직업만큼 귀하게 대접받아야 하는 것은 없다.

문화평론가

영화 잡지 ‘씨네21’ 기자와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을 했다. 사람·영화·도시·옷·물건·정치까지 관심 닿지 않는 곳이 드문 그가 세심한 눈길로 읽어낸 인물평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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