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의 소식좌’도 꼭 챙겨마셨다…11살 나이차 뛰어넘은 운명적 만남 [전형민의 와인프릭]

전형민 기자(bromin@mk.co.kr) 2024. 3. 30.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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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champagne est indispensable en cas de victoire et necessaire en cas de defaite.”(승리하면 샴페인을 마실 자격이 있고, 패배하면 필요해진다.)

근대 유럽을 호령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위의 문장을 남길 정도로 샹파뉴(Champagne)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샹파뉴는 프랑스 북동부 지역의 이름이자 그 지역에서 나는 스파클링 와인, 샴페인의 프랑스어 발음이기도 합니다.

오죽 샴페인을 좋아했으면, 권력자가 된 이후 고향 코르시카 출신들을 중용한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임에도 신입 참모를 만날때면 “나는 샹파뉴 사람이다”라고 장난을 쳤다고 하죠.

나폴레옹은 요샛말로하면 ‘극한의 소식좌’였습니다. 사료(史料) 속 그는 황제가 돼 상황이 여유로워진 뒤에도 보통 사람의 4분의 1 정도만 먹었고, 그나마도 10분~15분 사이에 마치 전쟁터에서 끼니를 때우듯 후다닥 해치웠다고 합니다.

잘 먹는 게 아닌 수준을 넘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인 식욕을 억제하는 수준이었는데요. 그가 남긴 말을 통해 생존에 필요한 것 이상의 식사를 거의 죄악시하던 그의 인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Si on reste plus longtemps a table, c‘est le debut de la corruption du pouvoir.”(테이블에 오래 있을수록 권력 부패가 시작된다.)

당시 여느 프랑스 귀족들과 달리 미식을 즐기기는 커녕 음식 자체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술조차 즐겨마시지도 않았던 나폴레옹. 그런데 왜 유독 샴페인 만큼은 그토록 공공연히 사랑했을까요? 전문가들은 나폴레옹에게 샴페인이 특별한 우정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1812년 자크 루이 다비드의 튀일리궁에서 서재에 있는 나폴레옹 황제.
변덕스러운데다, 오만하고 자기중심적
나폴레옹은 훗날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폐됐을 당시 작성한 회고록에 “나는 코르시카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샹파뉴 사람에 가깝다”라고 썼습니다. 아홉살 무렵 지금의 사관학교 격인 샹파뉴 지역 브리엔느 왕립육군유년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학교가 4대에 걸친 귀족의 자제들에게만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을 줬다는 점입니다. 나폴레옹의 고향인 코르시카는 오랜 기간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따라서 끊임없이 그 시기 열강의 손에서 독립을 위해 투쟁했죠. 나폴레옹의 가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실제로 부친은 독립 전쟁에 참전했다가 패전해 죄수가 됐다가 사면된 전적도 있습니다.

부친은 사면 이후 독립 투쟁을 접고 코르시카에 양질의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던 덕분에 양조자로서 부족함 없는 삶을 누렸다고 합니다. 코르시카 총독과 특히 친분이 두터웠고, 그 덕으로 나폴레옹을 학교에 보내게된 것이었죠.

상황이 이렇다보니 나폴레옹은 학교의 다른 학생들과 어울리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은 그의 코르시카 사투리를 놀렸고, 익숙치 않던 북부의 추위까지 엄습하면서 그는 외부와의 담장을 높게 쌓아올린 사람이 돼버렸습니다.

오죽하면 교관들은 나폴레옹에 대해 “과묵하고 변덕스러운데다, 오만하며 자기중식적인 경향이 극단적으로 강하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외로운 나폴레옹에게 브리엔느에서 고향과 비슷한 것이라곤 오직 포도밭 뿐이었죠.

코르시카 의용대 부사령관 시절인 23살의 젊은 나폴레옹.
장 레미 모엣과의 운명적인 만남
어느 날 나폴레옹은 학교에 찾아온 한 졸업생과 만나게 됩니다. 당시 24살이었던 그는 샹파뉴 지역 샴페인 저장창고인 메종 모엣(Maison Moet)사의 창업자인 클로드 모엣의 손자, 장 레미 모엣(Jean Remy Moet)이었습니다.

나이를 따져보면 쉽게 알 수 있지만, 나폴레옹과는 무려 11살 차이로 두 사람이 함께 학교를 다녔다는 것은 근거 없는 낭설입니다. 그는 당시 할아버지였던 클로드 모엣이 창업한 모엣사에서 판매 책임자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고, 이날은 교관들에게 샴페인을 팔기 위해 모교를 찾았습니다.

이 자리에서 운명적으로 나폴레옹을 만나게 되는데 의외로 말이 잘 통했고, 나폴레옹을 에페르네시(市)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 초대하면서 두 사람의 우정이 시작됩니다.

나폴레옹이 성장하면서 두 사람의 인연은 더 얽힙니다. 1792년 부친이 급사하자 장 레미 모엣이 사업을 물려받는데 당시 잦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포도밭에 미국의 독립전쟁 때문에 영국의 해상봉쇄령까지 겹치면서 모엣사는 와인 판매에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반면 당시 하급사관이었던 나폴레옹에게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능력을 십분 발휘하는데에 도움으로 작용합니다. 그는 코르시카 생가에서 와이너리를 했던 경험 덕분에 부르고뉴 지방 핵심인 끌로 드 부조 인근의 밭을 매입하는 업무를 맡았는데, 이를 훌륭하게 수행해내죠.

그 후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있는 역사입니다. 능력을 인정받은 나폴레옹은 지휘관이 되고, 툴롱항 탈환과 쿠데타 진압에 성공해 프랑스 국내 최고사령관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이윽고 부정부패가 만연한 정부에 대항해 군부 쿠데타를 감행하고 끝내 황제가 됩니다.

물론 이 과정에도 장 레미의 조력은 나폴레옹에게 큰 힘이 됩니다. 그는 쿠데타 당시 부족한 군자금을 에페르네시 명의로 기부하는가 하면, 나폴레옹측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진중에 샴페인을 대량으로 보급하기도 했습니다.

장 레미 모엣의 초상화.
황제가 유일하게 마음을 허락한 벗
결국 나폴레옹은 유럽을 호령하는 프랑스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고독했습니다. 그의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할 가족이 힘이 돼주지 못할 망정, 골칫거리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부인인 조제핀은 원래 나폴레옹의 전 상관이 폴 바라스의 애인이었고, 나폴레옹과 결혼 후에도 바라스와의 관계를 지속했습니다. 두 번째 아내였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 루이즈는 단지 정략 결혼이었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을 진심으로 사랑해 유배지인 엘바 섬으로 면회까지 왔던 애인 마리아 발레프스카가 있었지만, 정실 마리 루이즈의 체면상 결혼은 불가능했습니다. 형제들도 어떻게든 뒤를 봐주어 출세시켰지만, 서로 불화가 끊이지 않으면서 으르렁거리기만 했죠.

고독이 권력자에게 마땅히 주어지는 천형(天刑)이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황제 자리에 오른 그가 마음의 평안을 얻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어렸을때부터 말이 통했던 장 레미를 형처럼 흠모했던 것 아닐까요.

실제로 나폴레옹은 전쟁터에 나갈 때면 매번 에페르네에 있는 장 레미의 저택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장 레미는 그를 반기며 그에게 평온한 저녁 식사와 쉴 곳을 제공했다고 하죠.

아주 오래 전 나폴레옹의 학창시절 잠시 위안이 됐던 오랜 인연이 그가 황제가 된 뒤에도 이어지는 셈입니다. 장 레미는 나폴레옹을 권력자가 아닌 가족으로서 반겼던 것이 아닐까요.

1807년 장-레미 모엣의 지하 셀러를 방문한 나폴레옹. 나중에 모엣 & 샹동 엽서로 재현된 익명의 판화 작품.
유럽 열강들이 프랑스에 대항해 대불(對佛) 대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로 진군했던 1814년 당시에도 나폴레옹은 전장에 나가기 전날 에페르네의 장 레미 저택에서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는 장 레미에게 “프랑스는 아직 패배하지 않았네. 하지만 만약 내가 실패한다면 죽거나 퇴위를 당하겠지. 그러니 지금 자네에게 이것을 수여하겠네. 사업을 성공시킨 자네의 수완과 나라를 위해 자네가 와인으로 이룩한 위대한 공적에 대해”라며 레지옹 도뇌르(Legion d’honneur) 1등급 훈장 그랑 크루아(Grand-Croix)를 수여합니다.

레지옹 도뇌르는 지금도 프랑스를 위해 공적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하는 프랑스 최고 권위 훈장입니다. 총 다섯 등급으로 나뉘고 등급별로 최대 숫자가 정해져 있습니다.

그랑 크루아의 최대 인원은 단 75명, 우리나라에서는 한진그룹 회장이었던 고(古) 조중훈·조양호 전 회장 부자가 2등급인 그랑 도피시에(Grand Officier·2등급, 총 250명)를 받은 바 있습니다.

레지옹 도뇌르 그랑 오피시에 등급 소수.
수백년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는 우정
장 레미는 나폴레옹이 레지옹 도뇌르를 직접 수여한 마지막 수훈자가 됐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나폴레옹이 그로부터 며칠 뒤 폐위돼 이탈리아 엘바 섬으로 유배됐기 때문입니다.

유배된 나폴레옹은 루이18세의 왕정복고에 불만을 품은 프랑스 국민에 의해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리고 다시 그에 대항해 조직된 대불 대동맹과 벨기에 워털루에서 치른 최후의 전투에서 다시 패배해 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폐되고, 결국 거기서 사망합니다.

재밌는 점은 나폴레옹이 전장으로 향할때면 언제나 방문했다는 에페르네의 장 레미 저택을 워털루 전투를 앞두고는 방문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유배에서 복귀해 정신이 없었기 때문인지 혹은 너무 서둘렀기 때문인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를 두고 아직도 샹파뉴 지역에서는 “나폴레옹이 최후의 전투에서 진 것은 샹파뉴에 들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곤 합니다. 물론 실제로 그가 샹파뉴를 방문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에 졌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을 앞두고 오래된 벗의 응원이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한편 모엣샹동은 후에 나폴레옹과 장 레미의 우정을 기려 자신들의 샴페인 레인지 중 하나에 임페리얼(Imperial·황제)이라는 명칭을 붙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황제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죠.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폴레옹과 장 레미의 우정이 와인으로 이어지는 셈입니다. 소중한 벗과 함께 즐기기에도, 벗이 먼길을 떠나갈 때 그를 배웅하기에도 이만큼 좋은 와인이 또 있을까요.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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