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검은 돈’ 숨겨도 재판 안 받는 사람들...檢 ‘제3자 추징’ 주목

김지환 기자 2024. 3. 30.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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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수익 숨겨준 가족 등 재판 세우는 제3자 추징
검찰, 추징금 집행률 높이려 적극 활용
경남은행 임원으로부터 검찰이 환수한 범죄수익은닉금. /서울중앙지검 제공

지난해 8월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주택. 김치냉장고 안에서 현금 5만원권 343장, 수표 100만원권 400장, 1만원권 5장이 나왔다. 지폐 다발은 지퍼백에 포장된 채로 김치통 속 김치 국물 안에 담겨 있었다. 경남은행에서 30여 년 재직하던 A씨가 빼돌린 돈 6억2500만원 중 일부다. A씨 친형 C씨의 서울 송파구·강남구, 경기 하남시 오피스텔에선 지난해 7월 현금 약 44억원, 1억3000만원 상당의 상품권, 1㎏ 골드바 100여개가 나왔다.

지난해 12월 아내와 친형은 공범으로 기소된 것과 별개로, 아내는 ‘제3자’ 자격으로도 법정에 섰다. 검찰은 ‘제3자 몰수’ 제도를 활용했다. 이 제도는 불법 재산임을 알면서 취득한 재산에 대해서는 제3자에게도 재산을 추징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검찰 입장에선 피고인이 아닌 제3자를 별도 기소하지 않아도 피고인과 같은 동등한 권리를 갖게 함으로써 제3자로부터 재산을 가져올 수 있다.

수십억에서 수백억원의 범죄수익을 숨겨준 가족이나 지인의 재산을 박탈하기 위해 검찰이 ‘제3자 몰수·추징’을 활성화하고 있다. 횡령이나 뇌물 등 범죄로 얻은 재산 대부분은 주범이 아닌 제3자 명의로 돼 있다. 그런데 유죄 확정 이후 제3자의 재산을 집행하려면 별도의 민사소송 등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에 재판 과정에서 제3자 몰수·추징을 통해 범죄 수익 환수에 나서는 사례가 늘고 있다.

◇ 우리은행 사건이 준 교훈…'제3자 몰수·추징 제도’

제3자 몰수·추징은 범죄수익환수 관련 법률에 규정돼 있으나 그동안 활용도가 높지는 않았다. 수사당국이 주범 검거에 수사력을 집중하고 범죄 수익 환수는 선고 이후의 절차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사기 사건이라면, 범행 입증을 위해 ‘돈을 가로챈 사실’을 입증하는 데 주력하고 ‘그 돈을 어디다 숨겼는지’는 후순위가 됐다. 수도권의 한 부장검사는 “공소 유지에 필요한 증거 확보가 먼저고, 이 재산을 어떻게 환수할지 까지는 관심이 크지 않았던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2022년 우리은행 700억원 횡령 사건을 계기로 제3자 추징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주범 전모씨 형제는 가족 3명 등 총 20여명에게 91억여원의 횡령 자금을 나눠줬는데, 검찰이 이 사실을 1심 재판 중에 찾았다. 이에 제3자들을 재판에 참여시켜 제3자로부터 몰수 또는 추징 선고를 요청했지만,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검찰의 구형 없이 1심 선고가 이뤄지는, 유례없는 상황이 연출됐다. 1심은 추가 발견된 91억여원에 대해선 대부분 심리를 진행하지 않았다. 2심에서는 검찰의 주장을 법원이 받아들이면서 8명에 대한 제3자 참가가 받아들여졌고 약 60억원의 몰수 선고를 받게 됐다. 한 부장검사는 “2심에서 재판에 참여한 제3자들이 1심에서 혐의를 다투지 못하는 등 심급 이익(3심제를 할 수 있다는 헌법상 권리)이 박탈됐다”고 했다. 우리은행 횡령 사건은 현재 상고심이 진행 중이다.

서울중앙지검 청사 전경.

◇ 가상자산 범죄 판치는데 추징금 집행 더뎌…민사소송까지 나서는 檢

최근 가상자산 관련 사건이 늘어나면서 범죄 수익 은닉 규모는 커지는 반면, 법원이 선고한 추징금 가운데 실제 집행한 금액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법원이 지난해 인용한 보전 액수는 7조3633억여원이다. 최근 10년새 최대다. 하지만 지난해 집행된 추징금은 1049억9800여만원에 그쳤다.

검찰은 범죄수익을 적극 환수하기 위해 인력 보강에 나섰다. 서울중앙지검은 범죄수익환수부에 작년 12월 각자 다른 부서에 흩어져 있던 기능을 통합하고, 은닉 재산 추적 전담 수사관 3명, 민사소송 담당 수사관 1명을 추가로 배치했다. 이희찬 서울중앙지검 범죄수익환수부장은 “그간 환수를 위한 단위 업무들이 분산돼 있었는데, 지휘체계를 일원화했다”며 “실질적인 환수가 목적”이라고 했다.

검찰은 제3자 추징을 활성화하는 한편, 지난해 12월부터 민사소송 20여건을 진행하고 있다. 핵심 주범이 빼돌린 차명재산의 명의를 주범의 명의로 바꾸는 등의 소송이다. 범죄수익환수부 인력 보강 이전에는 민사소송 건수가 연 1~2건에 그쳤다. 최근에는 프로그램을 불법 복제해 20여억원의 범죄수익을 얻은 D씨를 붙잡았는데, 본인 명의의 재산이 없었다. 검찰은 계좌추적을 통해 D씨가 자녀 명의로 돌려둔 것을 확인, 채권자대위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 부장검사는 “독립몰수제(범죄자가 사망하거나 해외로 도피하더라도 범죄수익을 몰수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도입과 재산 사전 동결을 위한 법령상 권한 강화해야 한다”며 “범죄자들의 수익을 종국적으로 박탈하고, 범죄 유인 요소까지 없애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독립몰수제 시행을 위해선 형법·형사소송법·공무원범죄몰수법(추징3법) 개정이 필수적인데, 현재 개정안은 4년째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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