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칼’ 순대국에 ‘쫄깃’ 오소리감투…마장동 26년째 지키는 이곳

박다해 기자 2024. 3. 29.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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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소문나면 곤란한데
서울 성동구 우리순대국·카페 미닛 로스터리
관광객을 상대하는 북적이는 ‘TV 맛집’은 사절합니다. 지역의 특색있는 숨은 맛집, 누가 가장 잘 알까요? 한겨레 전국부 기자들이 미식가로 이름난 지역 공무원들에게 물었습니다. 대답을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한두 군데 마지못해 추천하면서 꼭 한마디를 덧붙이네요. “여기, 소문나면 곤란한데.”
서울 성동구 마장동 ‘우리순대국’의 ‘수육+탕’ 메뉴. 박다해 기자

고백건대 탕수육을 ‘부먹’(소스를 부어 먹는 것)으로 먹든 ‘찍먹’(소스를 찍어 먹는 것)으로 먹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하지만 유달리 입맛이 까탈스러워지는 순간이 있으니, 순대국을 먹을 때다. 소위 ‘부속고기’라고 불리는 돼지고기 특수부위를 딱히 즐기지 않기 때문이다. 비위가 약한 편이라 그런지 잡내가 풍기면 여지없이 헛구역질이 올라온다.

한술 더 떠 엠비티아이 검사를 할 때마다 변하지 않는 ‘N’형(직관형)인 특성은 순대국 앞에서도 발휘되는데, 진한 양념맛에 기대 한숟갈 뜨다가도 ‘이 고기가 돼지의 어떤 부위였더라?’라는 질문이 슬금슬금 피어오르면 돼지가 눈앞에 아른거려 어쩐지 입맛이 뚝 떨어지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순대국집에 갈 때마다 늘 ‘순대만’ 있는 메뉴를 주문한다. 그렇게 주문하면 순대국의 진짜 매력을 충분히 즐길 수 없다는 주변의 핀잔에도 아랑곳않고 말이다.

그래설까. 서울 마장동 일대의 간판없는 맛집까지 꿰고 있는 성동구청 주무관 K에게 숨은 맛집 추천을 부탁했을 때 ‘마장동 우리순대국’을 꼽는 걸 듣고 호기심보단 걱정이 먼저 앞섰다. 이번에도 제맛을 즐기지 못할 거란 우려에서다. 망설임을 거두게 만든 달콤한 한 마디는 “(성동구) 구청장님도 종종 포장해 먹는 곳”이란 귀띔. 그 한 마디에 추위가 아직 다 가시지 않은 지난달 22일 주무관 K와 함께 서울 성동구 마장동 ‘우리순대국’을 찾았다.

마장동에서만 26년째 운영 중인 이곳은 프랜차이즈 대형 순대국밥집에선 느낄 수 없는 소박함과 정겨움이 묻어난다. 4인용 식탁 7개가 들어서 매장이 아주 큰 건 아닌데도 ‘혼밥’ 먹는 이들을 위한 일인용 식탁까지 살뜰히 갖췄다. 메뉴는 단출하다. 순대국(9천원)과 특순대국(1만원), 술국(1만3천원), 술국전골(3만원), 수육과 탕(3만원)이다. 기본 찬은 배추김치와 깍두기, 고추다. 주무관 K는 “국밥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찬들이지만 (다른 곳보다) 정갈한 편이다. 특히 김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마장동 축산물 시장이 코앞에 있는 덕에 신선한 재료를 공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의 배를 든든히 채우는 쉼터가 되어주기도 한다. 박다해 기자

탕과 고기를 한번에 즐길 수 있는 수육을 주문했다. 이내 접시 가득 순대와 고기가 쌓여 나온다. 성인 여성 둘이 다 먹을 수 있을까 걱정될 정도의 양이다. 어떤 부위냐고 묻자 이곳의 맛을 책임지는 사장 엄숙희(63)씨가 웃으며 말했다. “돼지 볼따구(볼살)이랑 목살, 오소리감투(위)예요.” 오소리감투를 하나 집어들고 슬쩍 냄새를 맡은 뒤 입에 넣었다. 번번이 돼지고기와 거리를 두게 만들었던 잡내가 느껴지지 않고 대신 오소리감투 특유의 쫄깃함만 입안에 남는다. “잡내 같은 것 안 나죠?” 다 추천한 이유가 있다는 듯, 주무관 K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물었다. 볼살과 목살은 질기지 않고 부드럽다.

쫀득한 순대와 고기를 번갈아 먹다 보면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는 탕이 뒤따라 나온다. 밥이 들어있지 않을 뿐 사실상 순대국 메뉴를 그대로 내오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숟갈 떠서 맛보니 매콤칼칼하다. “(고기 국물인데도) 입이 텁텁하지 않다”는 주무관 K 말대로 국물은 깔끔한 맛을 자랑한다. 평소 국밥을 즐기지 않는 이들에게도 부담스럽지 않은, 호불호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맛이다. 혹여나 눅진한 맛을 선호하는 이들이라면 식탁마다 있는 들깨가루를 활용하면 된다. 들깨가루를 양껏 넣어 한술뜨면 완전히 다른 국물로 다시 탄생해 또다른 매력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고기 한 점, 국물 한 숟갈, 이번엔 순대 한 점, 다시 국물 한 숟갈…번갈아 먹고 있노라면 이곳이 새삼 동네의 오랜 사랑방같은 곳이란걸 실감하게 된다. 직접 들러 포장하는 손님이 계속 오는가 하면, 인근에서 근무하는 이들은 퇴근길에 들러 순대국과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퇴근하자마자 서둘러 찾아온 젊은 여성 손님의 발걸음도 이어졌다.

수다를 떨며 먹다보니 어느새 접시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부속고기를 이렇게 양껏 먹어본 적이 없던지라 스스로에게 화들짝 놀랐다. 잡내 없는 고기의 비결은 다름아닌 이 식당의 ‘위치’에 숨어있다. 이곳에서 길 하나를 건너면 마장동 축산물 시장이다. 엄씨는 매일 이곳에서 배송되는 재료로 음식을 만든다. 맛의 비결로 “신선함”을 꼽은 까닭이다.

“마장동의 특성이죠. 신선한 재료가 당일 배송이 되니까 그게 장점이예요. 맛은 결국 재료 따라 가거든요. 재료가 신선하니까 본연의 맛을 살려주면 돼요. 사골 육수를 쓰는데 사골도 당일 작업한 걸 바로 받고요.”

단골 손님들은 이 신선한 맛을 잊지 못해 이사간 뒤에도 일부러 이곳을 찾곤 한다. “이곳에 젊은 사람들이 많다 보니 내 자식 먹고 가는 것처럼 기분이 좋죠. (웃음) 아이 때 오던 분들이 시간이 지나 학생이 되고 군대도 다녀오고 하는 걸 보니까 손님들이 가족같아요. 제일 보람있는 순간이기도 하고요. 요 근처 회사에선 20년 넘게 매주 월요일마다 점심 드시러 오는 분들도 계세요. 정말 고마운 일이죠.”

1998년부터 26년째 우리순대국을 꾸려온 엄숙희씨. 박다해 기자

그는 단골손님의 식성을 기억해뒀다가 맞춤형으로 음식을 내기도 한다. “자주 찾는 손님의 식성을 95% 정도는 알고 있어요. 예를 들어 정원오 구청장님은 오소리감투를 좋아하고 국물이 많은 걸 선호해 그렇게 맞춰 내어 드리죠.”

“자신있는 메뉴 하나만 잘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30년 가까이 살다보니 이제는 물 끓는 소리만 들어도 고기가 어느 정도 익었는지 감을 잡는다는 그다. 이런 엄씨의 순대국은 이른 아침 마장동 축산물 시장에 새벽같이 출근하거나 배송하는 이들에게 든든한 한 끼가 돼준다. ‘우리순대국’의 영업시간은 평일 오전 7시부터 저녁 8시까지다.

국물이 조금 식었을라치면 뚝배기를 살며시 가져가 뜨거운 국물을 다시 한가득 담아주거나 오래도록 술잔을 기울이는 단골손님들에게 계란후라이를 내어주는 엄씨의 넉넉한 인심은 ‘우리순대국’의 또다른 매력이다. 주무관 K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그릇이 깨끗했다. 잔뜩 부른 배를 부여잡고 작별인사를 나누려는 찰나 주무관 K가 이번엔 커피로 마무리를 해야 한다며 옷깃을 잡아 끌었다.

성동구청 공무원 주무관 K가 강력추천한 로스팅 카페 ‘미닛 로스터리’. 이곳에서 직접 로스팅한 다양한 원두를 드립커피로 마실 수 있다. 미닛 로스터리 제공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부터 개인이 운영하는 곳까지 왕십리역 인근에 빽빽이 들어선 카페들 가운데 그가 콕 집어 향한 곳은 다름아닌 하왕십리동의 ‘미닛 로스터리’. 생두를 직접 볶는 곳으로 커피를 유달리 좋아해 ‘업’으로 삼게 됐다는 김민희(29)씨가 지난해 5월 문을 연 카페다. 2주마다 김씨가 원두 3가지씩 선별하기 때문에 다양한 드립커피를 마실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장점. 산미있는 커피를 즐기는 편이라 에티오피아산 원두를 선택해 한입 마시니 순대국을 먹은 뒤 입가심으로 이보다 더 좋은 선택지를 찾긴 어렵겠단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고많은 카페들 중에 왜 유달리 이곳을 좋아하는지 주무관 K에게 묻자 마치 자신이 사장인 것처럼 대번에 각종 자랑이 쏟아져나온다.

“일단 좋은 건 사장님의 성실함이예요. 주기적으로 새로운 원두를 소개해주는데 사장님이 고르는 족족 대부분 다 맛있거든요. 사실 혼자 꾸려가는 카페니 일도 많고 이미 원두 라인업도 다양해 그렇게 자주 안 바꿔도 될 법한데도 (사장님이) 커피를 정말 좋아하고 손님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마음으로 원두를 갖고 온다는 게 느껴져요. 왕십리에서 이만큼 핸드드립 커피를 다양하게 소개받을 수 있는 카페도 없을걸요?”

맛있는 음식과 커피를 즐기는, 새로 생긴 식당은 누구보다 먼저 다녀오는 미식가다운 소개다. 주무관 K가 시원하게 웃더니 덧붙였다. “텀블러로 천원 할인까지 받을 수 있는게 짱(최고)이죠.”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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