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입 생선 대구, 자루 물고기 cod [말록 홈즈]
[말록 홈즈의 플렉스 에티몰로지 13]
큰 입 생선 대구, 자루 물고기 cod
술깨나 마시는 사내들은 가끔 호기(豪氣: 용감할 호, 기운 기. swagger)를 부립니다.
“인류의 건강을 위해, 내가 이 해로운 술을 다 마셔버릴 거야! 전쟁이다!!!”
이튿날 오전, 처량한 패전의 쓰림을 안고, 주섬주섬 폰을 뒤적댑니다. 지인께서 격렬하게 추천해 주신 대구탕 식당을 찾아보니 숙소에서 도보 55분 거리에 있습니다. 택시로도 25분 이상이 나옵니다. 휴일이라 길이 막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갈 채비를 마치니 14시가 넘었습니다. 물 한 통 가방에 넣고 길을 나섭니다. 달맞이 고개가 해운대에 있다는 걸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바다와 구름의 마을(海雲臺)’이란 이름처럼, 짙푸른 하늘 아래 안갯빛 구름이 드리워진 듯 보입니다. 군바리 시절을 조교로 보내서인지, 제대한 지 26년도 넘었지만, 걷는 덴 자신이 있습니다. 35분 정도 지나니, 달맞이 고개의 오르막갈에 접어들었습니다. 여기서 15분 동안 *‘출애굽기(出埃及記)’를 찍습니다. 초행길은 항상 모험으로 가득한가 봅니다.
정확히 세 시에 기와집 대구탕에 들어섭니다. 혹시라도 직원분들 휴식시간이거나, 나홀로 손님을 안 받거나, 재료가 소진됐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스멀거립니다.
“몇 분이세요?”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직원분이 살짝 덤덤하게 물으십니다.
“외톨입니다.”
빙긋 웃으시곤 자리를 안내해 주십니다. 바다가 보이는 2인석 창가 자리입니다. 메뉴는 딱 하나, 대구탕입니다. 가격 1만4000원, 쌉니다! 잠시 후 맑은 대구탕과 밑반찬이 나옵니다. 맑은 탕은 그만큼 재료에 자신있다는 방증(傍證: 곁 방, 밝힐 증. 우회적 증거. circumstantial evidence. 반대증거를 뜻하는 ‘반증:反證’과 구분)입니다. 헤진 속을 달래려 국물을 한 술 뜹니다.
뭔가 엄청난 감동이 스멀거립니다. 식초를 살짝 붓습니다. 식초는 논개 누나처럼 비린 맛을 껴안고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식초의 시큼한 내음도 금세 날아갑니다. 맛이 한결 더 깔끔해집니다. 풍부한 향과 진한 맛이, 오래 우려낸 진국 느낌입니다.
다진 양념을 살짝 넣으니 얼큰칼칼하게 변신합니다. 담백한 맛을 더 좋아해 양념은 거기서 멈춥니다. 이제 대구살을 먹어봅니다. 신선하고, 탱글, 쫀득합니다. 본디 음식맛의 8할은 재료라고 합니다. 신선한 재료와 솜씨 좋고 정성스런 조리법이 어우러진 귀한 음식입니다.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 풍광이 맛과 운치를 더해줍니다.
맛깔스런 음식으로 든든하게 식사를 마치니, 세상이 아름답고 따뜻해 보입니다. ‘요기(療飢: 병 고칠 료, 굶주릴 기)’란 말은 ‘간단한 음식으로 허기를 면한다’는 의미이지만, 너덜너덜해진 몸을 치료해준 기와집 대구탕에도 어울린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평온하고 하무뭇한 맘으로, 오늘 저녁엔 이곳 달맞이 고개에서 달님과 인사하려 합니다.
일본어로는 ‘타라(たら: 鱈)’라고 부르는데, ‘대구 설(鱈)’자는 일본이 만든 한자라고 합니다. 몸통의 점과 얼룩이 흰 눈처럼 보여 붙인 말이 아닌가 상상해 봤는데, 대구가 차가운 지역에 서식해 붙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 논리로, 대게를 가리키는 영단어도 snow crab입니다.
중국어로는 슈에위(鱈魚)나 ‘다토우위(大头鱼: 큰 대, 머리 두, 물고기 어)’라고 부릅니다. 우리 눈엔 이 물고기의 입이 커보였는데, 중국인들 눈엔 큰 머리가 더 눈에 띄었나 봅니다. 전 입도 머리도 커서, 뭐라고 부르든 유연히 대처할 수 있습니다. 음… 제 다른 별명 ‘신대두’ 대신 ‘신대구’는 좀 어색하군요. 취소합니다.
대구의 영단어 ‘cod’는 주머니, 자루, 베개 혹은 고환을 뜻하는 고대 영어 ‘codd’와 관련 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유럽의 대구는 몸길이가 120cm에 이를 만큼 큽니다. 그래서 바이킹들은 말려서 딱딱해진 대구를 곤봉 대신 무기로 휘둘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덩치가 큰 cod가 옛 사람들이 메고 다니던 자루와 모양과 크기가 유사해 붙었다고 추정해 봅니다. ‘큰 자루 모양 물고기’ 정도 되겠죠. 다른 한편으론, 고환에 상상력을 붙여봅니다. 옛날 유럽의 근해에는 대구가 정말 물 반 고기 반으로 많았는데, 번식철엔 수컷들이 정소를 배출하면서 바닷물이 뿌옇게 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cod를 ‘고환/음낭 물고기’라고 상상해 봤습니다. 음낭(陰囊: 그늘/생식기 음, 주머니 낭)도 주머니이니까요.
요거 하나 쓰는 데, 시간이 두 시간이나 흘렀군요. 글쓰기는 가끔 사람을 이렇게 홀리나 봅니다. 곧 달님이 오시겠네요. 달맞이 고개의 달맞이에 큰 입으로 감탄하고, 그 풍광을 큰 머릿속 자루에 담아두려 합니다.큰 입 생선 대구, 자루 모양 물고기 cod처럼요.··*
*감수: 안희돈 교수(건국대 영어영문학과). 건국대 다언어다문화연구소 소장. 전 한국언어학회 회장
[필자 소개]
말록 홈즈. 어원 연구가/작가/커뮤니케이터/크리에이터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22년째 활동 중. 기자들이 손꼽는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는 커뮤니케이터. 회사와 제품 소개에 멀티랭귀지 어원풀이를 적극적으로 활용. 어원풀이와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융합해, 기업 유튜브 영상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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