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농무’ 이후 49년 만에 창비시선 500호

임인택 기자 2024. 3. 29.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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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1만부 시대’ 궤도화한
1975년 ‘농무’ 이후 49년 만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
안희연·황인찬 엮음 l 창비 l 1만1000원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
신경림 외 지음 l 창비 l 7000원

“출판사 기획 시집이 대중 독자와 결합해 500번째, 600번째까지 이어지는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짐작합니다. (게다) 당시는 기가 막힌 시대이잖아요. 그 열악한 시기에 창비 시집을 낸다는 건…, 기본으로 판매금지 먹고 조사 한번 받고, 편집자들은 경찰서, 안기부 이웃 드나들 듯했던 게 70년대 후반, 80년대였습니다.”

한국문학번역원장을 역임했던 시인·평론가 김사인(68)이 말했다. “감개무량”이란 상투어가 상투적이질 못한 자리, 지난 27일 기자간담회에서다.

‘창비시선 500번’을 맞아 열린 기념·특별시선집 출간 기자간담회가 지난 27일 서울 광화문 한 식당에서 열렸다. 시선집을 준비한 이들 가운데 안희연 시인, 백지연 평론가, 김사인 시인, 송종원 평론가(왼쪽부터)가 반세기 시선집의 의미와 기획 배경 등을 설명하고 있다. 창비 제공

국내 최초 신작 시선집을 표방하고, 시집 1만부 시대를 궤도에 올린 창비시선이 반세기 거쳐 이달 500번째 시집을 독자 앞에 상재했다. 1975년 3월 첫 시집 ‘농무’(신경림)로부터 정확히는 49년 만이다.

표지번호 ‘500’을 새긴 기념시선집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은 2016년 9월 출간된 창비시선 401번부터 최근 499번까지 시인별 시 1편씩 아흔 꼭지(중복 저자 제외)를 엮은 것이다. 1948년생 시인 김용택(‘울고 들어온 너에게’, 401번)부터 2000년생 한재범 시인(‘웃긴 게 뭔지 아세요’, 499)까지, 80년대생 안희연·황인찬 시인이 추렸다. 큰 주제 없이 시를 흩뜨렸다. 또 하나의 시 세계로 우거진 격이다. 표제는 출간 1주도 안 남은 지난주 후반 고심 끝 낙점됐다. 이대흠 시인의 시 ‘목련’(‘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 425)이 출처다.

“사무쳐 잊히지 않는 이름이 있다면 목련이라 해야겠다…// …그리움이 아니었다면 어찌 꽃이 폈겠냐고 그리 오래 허공으로 계시면 내가 꽃으로 울지 않겠냐고 흔들려도 봐야지// 또 바람에 쓸쓸히 질 것이라고/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이라고”

어쩌다 사랑의 습관인가. 안희연 시인은 “사랑의 습관화는 은근한 권유이자 결국 어떻게 사랑을 정의하는지에 관한 질문”이라고 말한다. 고전 ‘어린 왕자’ 속 말마따나, 길들이면 서로 필요해진다. 반세기 지속해온 시들의 습관이 그래 보인다. 하나밖에 없는 시로 하나밖에 없는 독자와 관계 맺기. 이전과 견줘 400번대가 관통한 “2010년대 중반은 한국문학에 대한 총체적인 검토와 반성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어온 시기”란 점에서, 창비도 예외일 수 없단 점에서, 이 시기 ‘관계’의 권유는 한층 각별해진다.

올해 가장 뜻깊은 문학적 이정표로 창비시선 500호, 문학과지성 시인선 600호 발간이 전망된 바 있다. 창비는 참여문학, 문지는 순수문학으로 발차했으니 창비식 ‘사랑의 습관’을 좀 더 구체화할 만하다. 그것도 이대흠이 썼다.

“뚜껑이 열리면/ 말랑말랑한 사랑이 나오도록/ 화 따위는 군불로 삼을 거야//…// 지글지글 화를/ 더 화나게 끓일 거야/…//…// 나는 지금 사랑을 제조하는 중이야/ 시커먼 흙으로 꽃을 빚듯//…// 화를 태워 사랑을 지을 수 있다니까”(‘시집 ‘코끼리가 쏟아진다’, 484, 특별시선집엔 미포함)

도탄 속 농촌 민중을 충격과 감동으로 전한 시집 ‘농무’ 이래, 노동자, 지방, 여성, 이주민, 소수자의 비애가, 분노가, 희망이 “지글지글” 창비의 ‘아궁이’였다. 지난 8년치 창비시선은 지난 8년치 ‘어둠’을 캐묻는다. 차이라면 “가장 격변기, 다채롭고 젊은 감각을 담고 서정의 진화를 꾀하는 새로운 시적 방법들”(백지연 평론가·창비 부주간)이겠다.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이 싱거운 궁금증이 오래 가슴 가장자리를 맴돌았어요//…// 이제 더는/ 배고프다 말하지 않기로 해요 허기란 얼마나 촌스러운 일인지// 혼자 밥 먹는 사람, 그 구부정한 등을 등지고/ 혼자 밥 먹는 일//…// 그래서/ 요즘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심야 식당’, 박소란)

“어떤 사랑은 마른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내는 늦은 밤이고 아픈 등을 주무르면 거기 말고 하며 뒤척이는 늦은 밤이다…//…// 키스를 하다가도 우리는 생각에 빠졌다 그만할까 새벽이면 윗집에서 세탁기 소리가 났다 온종일 일하니까 빨래할 시간도 없었을 거야 (…) 원통이 빠르게 회전하고 물 흐르고 심장이 조용히 뛰었다”(‘기다리는 사람’, 최지인)

‘등’의 안부를 묻는 방식이었다. 백지연 평론가는 400번대를 “문학사적 관행과 이분법적 틀에 갇히지 않은 쇄신의 모음들”이라고도 말한다. 한때 목숨과도 바꿨던 ‘자유’가 이리도 변주된다.

“자유에게 자세를 가르쳐주자// 바다를 본 적이 없는데도 자유가 첨벙거린다/ 발라드의 속도로/ 가짜처럼/ 맑게// 넘어지는 자유// 바람이 자유를 밀어내고/ 곧게 서려고 하지만// 느낌표를 그리기 전에 느껴지는 것들과// 내가 가기 전에/ 새가 먼저 와주었던 일들// 수많은 순간순간/ 자유가 몸을 일으켜/ 바다 쪽으로 가버렸다//…”(‘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 유이우)

창비는 400번대 시인들의 애송시 74편을 엮은 특별시선집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도 함께 펴냈다. 판매금지되었던 ‘국토서시’ 조태일(2)부터 신동엽(20), 곽재구(40), 김남주(72), 나희덕(125), 최영숙(150), 안도현(163), 허수경(203), 정호승(235), 이정록(313), 진은영(349) 등을 다시 만난다.

창비시선 1번으로 1975년 3월5일 출간된 시집 ‘농무’. 당시 시집 가격은 500원이었다. 그해 해외 고전인 ‘어린 왕자’와 함께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1975년 ‘농무’는 출간 다음달 비소설 베스트셀러 1위, 당해 4위를 기록한다. 이듬해까지 김수영 시집 ‘거대한 뿌리’(민음사 ‘오늘의 시인총서 1’, 1974)와 함께 1만부를 돌파한다. 당시 언론이 “서정주 시집이나 소월 시집 이후 최대의 판매고를 올렸다. 시인이 계를 들어 자비로 시집을 내던 종전에 비하면 이같은 현상은 기적”(경향신문 1976년 12월2일치)이라 전한 배경이다. 한정 5백부 찍어 4천~5천부를 팔면 성공인 기존 도식을 허물고, 80년대 만개하는 ‘시의 시대’ 마중물 구실을 한 것이다.

돌고돌아 다시 시집 1만부가 ‘기적’이 되어가는 시대다. ‘창비시선 500 특별시선집’을 준비한 송종원 평론가는 “시 독자층이 얇아진 이유는 시인이나 독자 문제가 아니다. 예술 작품을 즐기는 데 에너지가 필요한데 지금 삶의 방식이 너무 피로하게 만든다”며 “(결국) 책 읽는 경험조차 돈으로 구매하는, 즉 성장 경험의 기회조차 외주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미래를 시인은 시로 전망할 뿐이다.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 무엇이 되지 않을 이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달리는 이유를 안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정지의 힘’, 백무산, 442)

1982년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으로’를 출간해 연행됐던 당시 창비 편집부장, 이시영 시인은 썼다. “아파트의 낡은 계단과 계단 사이에 쳐진 거미줄 하나/ 외진 곳에서도 이어지는 누군가의 필생”(‘그네’, 414)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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