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밥상] 갑오징어먹찜, 내 입에 ‘먹칠’을 하다니…이건 너무 고소하잖아

김보경 기자 2024. 3. 29.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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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밥상] (49) 전남 장흥 ‘갑오징어먹찜’
3월말~5월 중순 산란기, 살 두툼하고 맛 좋아
30분 쪄내 부드러운 식감에 된장·묵은지 조합 이색적
내장·먹통 감칠맛 일품…남은 재료는 볶음밥으로 마무리

멀리서 보면 까만 숯을 가져다놓은 듯한 모양으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향토음식이 있다. 바로 전남 장흥의 원조 블랙푸드 ‘갑오징어먹찜’이다. 처음 보는 강렬한 인상에 쉽게 젓가락을 들지 못하지만 은은하게 올라오는 바다 내음에 금세 군침이 돈다.

‘갑오징어’는 흔히 먹는 ‘살오징어’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우선 살오징어는 몸 안에 투명하고 가느다란 뼈가 있으며, 머리끝이 뾰족하고 몸통과 머리의 비율이 비슷하다. 이와 달리 갑오징어는 몸 안에 넓적한 뼈가 있다. 그 뼈가 마치 갑옷 같다 해서 이름도 갑(甲)오징어라 부른다. 몸통은 짧지만 머리가 길고 둥글며, 색깔은 회갈색이 아닌 진한 자주색을 띤다. 수컷은 등 쪽에 여러 겹의 선명한 물결무늬가 있고 암컷은 점박이 무늬가 있는 게 특징이다. 암수에 따른 맛 차이는 없고, 무늬는 물 밖에 나오면 점점 희미해져 구분이 어렵다. 갑오징어는 해수면부터 수심 100m 이상 되는 깊은 해저까지 넓은 영역에 걸쳐 서식하는데, 국내에선 장흥·여수 등 남해안 일대에서 많이 잡힌다. 봄철엔 장흥 노력도 앞바다에서 하루에도 수백마리를 잡아 올린다. 산란기는 3월말에서 5월 중순까지이며, 이때 잡히는 갑오징어가 크고 두툼해서 맛이 좋다.

갑오징어 먹물은 천연 조미료라 할 수 있다. 색과 농도가 진해 질감이 꾸덕꾸덕하고, 그 자체로도 짭짤한 감칠맛이 있어 해외에선 파스타 소스나 면을 만들 반죽에 넣기도 한다. 먹물을 뿜어내는 생물은 낙지·주꾸미·문어 등 많지만 갑오징어 먹물을 요리에 많이 쓰는 이유는 큰 먹통과 끈끈한 점성 때문이다. 갑오징어 한마리가 먹물을 쏘면 커다란 수족관 전체가 암흑처럼 변한다. 그만큼 많은 양의 먹물을 품고 있어 요리 재료로 쓰기에 충분하다. 밥알이나 식재료에 잘 달라붙는 점착력도 좋다. 문어 먹물처럼 물에 쉽게 씻겨 없어지지 않아 먹물맛을 음식에 고스란히 담을 수 있다. 먹물은 상온에 두면 금방 비리고 고약한 냄새가 나니 요리할 땐 꼭 생물에서 나온 먹물을 사용하고 오래 보관하지 않는 게 좋다. 신선한 갑오징어일수록 색이 진하고 살이 단단하다.

드넓은 개펄이 펼쳐진 장흥군 안양면 사촌리에는 11년째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여다지회마을’이 있다. 이곳의 주인장인 권재윤 대표는 ‘갑오징어먹찜’의 핵심이 찌는 시간이라고 설명한다.

전남 장흥군 안양면 사촌리 ‘여다지회마을’에서 갑오징어먹찜을 주문하면 2년 숙성한 묵은지가 함께 나온다.

“갑오징어먹찜 만드는 법은 별거 없어요. 신선한 갑오징어를 통째로 찌면 됩니다. 아무 양념도 하지 않고 찜통에 올려 30분 정도 쪄요. 속성으로 15분 만에 압력밥솥으로 찌기도 하는데 찜통에 쪄야 살도 더 쫄깃하고 안에 내장과 먹통도 고소한 맛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죠.”

권 대표에 따르면 옛날 장흥 사람들은 가마솥에 나무를 걸쳐 놓고 그 위에 갑오징어를 올려 1시간씩 푹 쪄서 먹었다고 한다. 오래 찌면 안에 있는 먹물이 퍼지지 않고 굳는데, 부드럽게 익은 살과 고소한 먹물의 조합이 일품이란다. 요즘 식당에서 파는 갑오징어먹찜은 오징어 살을 먹물에 소스처럼 묻혀 먹을 수 있도록 적당히 익힌다.

갓 쪄낸 갑오징어의 질긴 껍질과 뼈를 걷어내고 먹기 좋게 썬다. 갑오징어를 자르는 순간 까만 먹물이 흘러나온다. 먹물이 살에 묻지 않도록 깔끔하게 자르려면 칼날을 수시로 닦아가면서 썰어야 하는데, 수십년 경력이 있는 권 대표도 쉽지 않단다.

갑오징어를 다 먹고 남은 먹물로 만든 ‘갑오징어먹물볶음밥'도 빼놓을 수 없는 별미다.

먹물로 덮인 갑오징어 한점을 집어 먹어본다. 쫄깃하고 두툼한 살점이 입 안에 가득 찬다. 동시에 달걀노른자보다 고소한 먹물과 내장 맛이 퍼지는데, 먹물이 짭짤해 그냥 먹어도 간이 딱 맞는다. 다른 지역에선 오징어를 흔히 초장에 찍어 먹지만 장흥에선 재래식 된장에 찍어 먹는다. 함께 썰어 넣은 마늘과 고추가 알싸한 맛을 더한다. 색다른 조합을 원한다면 식당에서 직접 담근 2년 묵은 김치에 싸서 먹어보자. 톡 쏘는 묵은지와 부드러운 갑오징어먹찜이 찰떡궁합이다. 갑오징어를 다 먹고 남은 먹물로 만든 ‘갑오징어먹물볶음밥’도 빼놓을 수 없는 별미다. 철판에 갑오징어 먹물과 내장을 양파·호박·당근 등 갖가지 채소와 함께 볶는다. 게딱지장볶음밥처럼 내장과 먹물의 풍미가 밥알 하나하나를 감싼 듯하다. 철판에 눌어붙은 볶음밥 누룽지를 긁어 먹는 것도 재미다.

갑오징어먹찜을 먹은 뒤 입가에 남은 까만 먹물 자국처럼 진한 추억을 남기러 주말에 장흥으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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