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시간 계약’ 시간강사가 쟁취한 휴업수당…금액보다 큰 의미

장현은 기자 2024. 3. 28.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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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보통의 사건
“나 아닌 모든 강사 위한 소송이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저뿐 아니라 많은 시간강사들이 다 겪고 있는 문제잖아요. 과연 현실의 벽을 깰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는데…판결이 나왔을 때 정말 기뻤습니다.”

358만 9596원. 시간강사 하태규(60)씨는 이 돈을 받기 위해 1년 5개월간 ‘피고 대한민국’과 싸워야 했다. 이 돈은 하씨가 한 학기동안 수업을 하지 못한 데 대해 지급이 인정된 6개월 치 휴업수당이다.

학교의 수업 미배정으로 소득이 없는 시간강사에게 휴업수당이 지급돼야 한다는 첫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6-3부(재판장 박평균)는 지난 21일 하씨가 제기한 임금 지급 소송 항소심에서 1심 원고 패소 판결을 뒤집고 정부가 하씨에게 월 평균임금의 70%에 해당하는 휴업수당 6개월 치와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하씨는 정부가 설립·운영하는 경상국립대에서 일했다.

소송을 통해 지급 명령이 내려진 이 돈은 하씨에게 “휴업수당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돈”이다. 하씨가 강사 일을 시작한 건 꼬박 10년 전인 2014년부터다. 하씨는 경상국립대 등 대학에서 학술 연구교수나 시간강사로 일해왔다. 당시 시간강사 계약은 한 학기 수업을 마치고 나면 다음 학기에 대한 예측 가능성이 없는 시간제 아르바이트와 같았다.

2019년 8월 하씨와 같은 강사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개정 고등교육법, 일명 ‘강사법’이 시행됐다. 이에 따라 하씨는 경상국립대와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 강사법은 강사의 신분을 교원으로 해 임용기간을 1년 이상으로 하고, 평가 기준을 충족하면 3년까지 임용을 보장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강사의 불안정한 고용 문제를 해결하고 임용기간 내 안정적으로 임금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씨는 2020년도 2학기 주 6시간, 2021년도 주 3시간 대학원 강의를 했다. 일주일에 주어진 강의 시간은 3시간뿐이었지만, 하씨는 수업 하나를 위해 일주일에 3일 이상 연구 활동 등 준비를 해야 했다.

문제는 2022년도였다. 학교는 하씨에게 한 과목도 강의를 배정하지 않았고, 3월부터 8월까지 6개월간 급여를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았다. ‘수강 수요가 부족하다’는 게 이유였다. 6개월간 수입이 끊기자 하씨는 차라리 실업수당을 받을 수 있도록 면직을 요구했다. 하지만 학교는 “임용 기간이 남았으므로 고등교육법상 강사 신분을 보장해야 한다”며 거절했다.

급여를 받지도, 면직으로 인한 실업수당을 받지도 못한 하씨는 소송을 결심했다. 하씨는 “학생이 없다며 수업은 안 주고, 법에서 임용 기간을 보장해야 한다며 면직도 안해주는 상황이었다”며 “강사의 신분 보장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강사를 뽑았다면 한 과목 이상이나 두 과목 이상을 배정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을 명시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라고 말했다.

경상국립대를 설립·운영하는 대한민국 정부는 법정에서 “강의가 없는 학기는 별도로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계약서에 있기 때문에 휴업수당 지급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다. 최소 강의 시수를 보장하지 않는 일명 ‘0시간 계약’이었다.

정부는 또한 “원고(하씨)가 강의를 배정받지 못한 것은 원고의 잘못도 아니지만, 피고(대한민국)의 귀책사유도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전체 강의 중 전임 교원 강의 비중을 60% 이상으로 유지해야 하는 규칙 때문에 강의 수요가 줄 경우 불가피하게 전임 교원에게 강의를 우선 배정해야 한다는 논리다. 하씨쪽은 “학생 수 감소 및 수강 수요 부족이 학교쪽의 세력범위 안에서 발생되었으므로 전형적인 사용자의 귀책사유”라고 주장했다.

법원은 하씨에게 강의를 배정하지 못한 것이 정부쪽 귀책사유가 맞다고 봤다. 이전 학기들의 경우 전임 교원 강의 비중이 60% 미만인 경우도 있었고, 설혹 ‘60%룰’을 지킨다해도 하씨에게 강의 배정을 할 수 있었다고 봤다. 특히 “강의가 없으면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0시간 계약’은 근로기준법에 위반돼 무효라고 봐 정부에게 휴업수당 지급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강사법 시행 이후 ‘0시간 계약’에 제동을 건 첫 판결이 나온 배경이다.

하씨는 “강의도 하지 못하고 기간만 유지하는 것은 신분보장이 아니다”라며 “임용기간 중 강의를 보장하는 것이 고등교육법 개정의 취지”라고 말했다. 이어 “0시간 계약 외에도 퇴직금 문제나 건강보험 미가입 등 여전히 문제가 되는 지점들이 많다”며 “근본적으로 강사 제도의 구조적인 문제와 처우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는 판결이 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장현은 기자 mi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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