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고려 광종의 개혁정치

경기일보 2024. 3. 28.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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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훈 경기역사문화유산원장

“군주들은 누구나 무자비하다는 것보다 인자하다는 평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통치를 위해서는 사랑받는 것보다 미움을 받지 않는 선에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안전하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사상가이자 정치철학자인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한 말이다.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고려 광종(재위 949~975년)은 적절한 판단을 한 영리한 군주일 것이다. 광종은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해 ‘호족연맹체’ 수준에 머물던 고려를 버젓한 ‘왕권국가’로 탈바꿈시켰다. 태조 왕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철저하고 끈기 있게 왕권 강화를 꾀했다. 즉위 후 조용히 시기를 기다리던 그는 956년 노비안검법(호족의 토지를 경작하고 사병 역할을 하던 노비를 감소시켜 호족의 인적 기반을 약화하고, 세금을 내는 양인을 늘려 국가의 통치 기반을 강화하고자 한 제도)을 시작으로 958년 과거제, 960년 공복(公服) 제정 등 왕권 강화 정책을 잇따라 시행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호족세력의 반발을 야기하기도 했으나 광종은 철저한 탄압을 통해 관철하고자 했다.

재위 후반기 그는 왕권 강화에 반발하거나 저해가 되는 세력들을 과감히 숙청해 나갔다. 그 결과 태조 이래 열세에 놓여 있던 왕권을 호족세력보다 우위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개경을 ‘황도(皇都)’라고 명명했으며 만년에 ‘황제(皇帝)’라는 호칭까지 사용한 것은 모두 왕권 강화의 결과물들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광종이 정치적 적대세력들의 반발에 맞서는 방안으로 일반 민중을 개혁의 지지세력화하고자 했다는 사실이다. 호족의 위세에 고통을 겪던 민중들을 불교 장려 등으로 다독여 감싸안고 승려들을 적극 활용해 기층의 지지 기반을 구축하고자 했다. 이같이 광종은 왕족과 호족 등 지배계층에 대해서는 매우 폭압적이고 냉혹한 권력자였지만 천민들을 포함한 피지배계층에 대해서는 온화하고 따뜻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폭군이 아닌 개혁군주로 역사에 남았다. 후대 일시적 퇴행의 과정도 있었지만 고려의 기틀을 튼튼하게 만든 광종의 공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제22대 총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국민들은 ‘정치개혁’을 갈망하고 있다. 이에 반응해 정치인들은 쉴새없이 구호와 공약을 쏟아낸다. 군주와 귀족의 통치가 아닌 국민이 주인인 민주주의 시대, 공동체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진짜 ‘개혁’과 ‘실천방법’은 어떤 것일까? 국민이 위임한 권력은 과연 국민을 위해 쓰일 수 있을까? 우리는 진정 역사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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