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과 수단이 바뀐 삶 [똑똑! 한국사회]

한겨레 2024. 3. 27.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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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이승미 |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반도체물리학 박사)

시작은 평화로웠다. ‘하루 15분으로 외국어를 익힙시다’라는 선전 문구에 현혹되어 몇번의 터치로 앱을 휴대전화에 설치하고 시험 삼아 작동해봤을 뿐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동안 수없이 시험해본 다른 앱들처럼 조만간 지워지기 십상으로 생각했다. 큰딸이 독일어 배우느라 쓰고 있는 앱이라며 유료 가족계정을 만들면 한 사람 몫으로 여섯명이 함께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름대로 알뜰한 나는 솔깃해져 당장 유료계정을 만들고 아이들과 가족 계정으로 한데 묶었다. 시도 때도 없이 불쑥 끼어드는 강제 광고 시청이 없으니 돈을 낸 보람은 있었다. 게다가 귀여운 캐릭터들이 단어 배열로 문장 만들기, 따라 읽기, 빈칸에 들어갈 단어 찾기 등을 클릭하는 방식이라서 게임처럼 재미있었다. 각자 관심 있다는 외국어인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분명 처음에는 저마다 관심 있는 언어를 배우는 게 목적이었다.

아마도 학습 독려를 위해서겠지만, 앱에서는 문제를 맞힐 때마다 점수를 줬고 주어진 과업을 달성했을 때는 한동안 점수를 두배로 쳐줬다. 그렇게 한주 동안의 누적 점수를 모은 뒤에는 접속자끼리 상대평가로 승급, 유지, 강등으로 분류됐다. 어느 날부터는 내가 새 단어를 얼마나 배웠고 얼마나 외국어에 친숙해지느냐보다 등급과 점수를 더 신경 쓰게 됐다. 이제는 게임 같은 학습이라기보다는 학습의 모양새를 갖춘 게임이 되어버린 셈이다.

한 지붕 아래 사는 우리끼리도, 서로 다른 언어를 배우는데도, 은근히 경쟁심을 불태웠다. ‘하루 15분 외국어 공부’라는 선전 문구가 무색하게도, 하루에 몰아쳐서 점수를 올리느라 밤잠을 설치기도 하고, 효율성을 따지느라 단어 공부와 발음 공부 중 무엇이 더 유리할지 실험해보기도 했다. 심지어 일주일에 한번씩 새로 팀이 짜이는 일요일의 몇시에 접속해야 상대적으로 점수 낮은 경쟁자들과 팀이 되는지까지 궁리하게 됐다. 우습게도 외국어 익히기는 확실히 뒷전으로 밀렸다.

어디 이 경우뿐이랴. 수단이 어느덧 목적의 자리를 차지하는 모순적인 상황을 꽤 자주 마주한다. 사설학원은 학생이 학교 교육을 잘 따라가도록 도와주는 보조기관이건만 날마다 서너개의 학원을 전전하며 자정을 넘기도록 시달리다 보니 정작 학교에서는 졸음을 참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는 아이들도 있다. 아이를 심신이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독립시키기가 육아의 최종 목적이건만, 성년이 넘은 자식의 일거수일투족까지 참견하면서 ‘힘들다’ 한숨짓는 부모도 있다. 돈은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인데도 현대인은 돈을 모으느라 행복을, 건강을, 가족을 포기한다.

과학계에도 비슷한 예가 있다. 과학 논문은 근대 과학철학자가 알아낸 흥미로운 실험 결과와 새로운 생각을 세계 각지의 연구자와 공유하고자 시작된 출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저널 논문은 본래 취지 못지않게 성과를 가늠하는 잣대 역할이 강조된다. 유명 출판사의 저널 논문이 전통적인 학회 논문보다 더 높게 평가받기도 한다. 영향력지수(임팩트팩터) 몇짜리 논문을 올해 몇편을 썼는가로 연봉이, 다음 연구비가, 과장하자면 과학자로서의 능력치가 결정된다. 최소한 수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연구라면 올해의 평가는 포기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려해봐야 할 수도 있다.

코앞만 바라보고 달리다 보면 엉뚱한 방향으로 잘못 나아갈 수 있다. 똑똑해지라며 날마다 학원을 여러개씩 보내면, 아이는 정작 자신의 머리로 생각이라는 것을 할 시간이 없으니 똑똑해질 수가 없다. 진정한 공부는 배운 것을 다 잊고서 머릿속에 남는 바로 그것이라고 한다. 수단이 목적이 되고 목적은 오히려 잊혀서 종국에는 노력이 우리를 목적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뜨려놓는 모순적인 상황은, 그러잖아도 복잡미묘한 삶을 더욱 알 수 없고 기운 빠지게 만든다. 100일 동안 앱으로 하루에 90점씩 쌓았건만 프랑스어로 점심 한끼 주문 못 하는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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