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4월이 끝인 양 구는 기재부, 후폭풍이 두렵다
기획재정부의 옛 이름인 경제기획원 시절엔 물가정책국이 있었다. 하나의 국(局)이 총동원돼 정부가 물가 관리하는 일에 집중했던 것이다. 비대했던 물가국은 1990년대 국민생활국 내 하나의 과(課)로 축소됐고, 2000년대 들어선 한때 아예 물가란 이름이 들어간 과마저 사라졌었다. 지금은 경제정책국 내 물가정책과로 존재한다.
통치권을 가지고 정부의 정책 ‘목표’ 그 자체로서 관리해야 할 대상이었던 물가가, 서민 생활 안정 정책들의 한 ‘결과물’로서의 의미로 축소된 것이다. 자유 시장 경제의 작동이 잘 이뤄지도록 뒷받침하는 게 기재부의 역할이라는 점을 물가 관련 직제 역사가 잘 보여주고 있다.
케케묵은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30년 전 물가국 시절처럼 요즘 기재부에 물가가 모든 정책의 ‘목표’가 된 듯해서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최근 확대간부회의를 통해 “전 직원이 ‘물가 지킴이’라고 생각하고 제 역할을 해 달라”고 언급했다.
대통령실과 경제부처에서는 ‘3~4월 긴급 농축산물 가격안정자금 투입’(3월 15일 물가 관련 긴급 현안 간담회), ‘전 부처가 경각심을 갖고 물가 2%대 조기 안착 총력’(3월 19일 국무회의)과 같은 선언이 튀어나왔다. 마치 4·10 총선에서 모든 것을 심판받는다는 듯, 정부가 ‘3~4월’에 모든 역량을 쏟아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실제로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한 재정·세제 등 정책 도구가 총동원됐다. 농축산물 납품단가·할인 지원 등에 쓰일 1500억원 규모의 긴급 자금이 투입됐고, 29개 품목 수입 과일 전량에 대해서는 할당관세(관세를 일정 기간 한시적으로 낮춰주는 제도)를 적용하기로 했다. 물론 어느 정도 당장 효과는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런데 ‘총선이 끝나면?’이라는 우려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물가를 재정 풀어 잡겠다는 발상은 선례로 남아 추후 정부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이번에 투입된 긴급 자금은 올해 농림축산식품부에 배정된 할인 지원 예산(1060억원)으로 먼저 소요된다. 연초 설 명절에 이미 절반 이상인 590억원을 투입했는데, 정부는 이번에 이 예산을 몽땅 끌어다 쓸 생각이다. 당초 이 예산을 쓰기로 했던 9월 추석, 11월 김장철에는 돈이 없어 예비비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
특정 품목에서의 물가 위기 때마다 이런 방식을 동원해야 한다는 요구는 앞으로 더욱 빗발칠 것이다. 지원 대책의 실효성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원칙 없이 재정을 쓴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대통령이 “재정을 풀면 물가가 올라 서민 고통이 커진다”고 천명한 것이 불과 다섯 달 전 일이다. 야당 대표가 “1인당 25만원의 민생회복지원금을 지급하자”고 외치는 것을 정부도 당당하게 나무랄 입장이 못 된다.
각국이 금리 인하의 초입에 들어선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그동안 써온 인위적 물가 안정 정책들이 결국 문제 될 것이란 지적도 있다. 한시적 유류세 인하 조치는 연장에, 연장에, 또 연장을 거듭해 정부도 끝낼 ‘타이밍’을 못 잡고 있다. 이를 언젠가 정상화해야 할 텐데, 이럴 경우 ‘인플레이션 둔화’를 더디게 할 수 있다. ‘물가 2% 수렴을 확인할 때 금리 인하를 논의한다’는 한국은행의 통화정책 운용에 족쇄가 될 수 있다.
한국전력의 적자가 엄청난 상황에서 전기요금을 계속 묶어두는 것도 기본적으로 문제다. 그간엔 그나마 안정된 유가가 이런 사정을 뒷받침해주고 있었지만, 유가는 다시 슬금슬금 오르고 있다. 상반기 ‘공공요금 동결을 원칙’으로 한다는 정부의 말은, 하반기엔 정상화에 나서겠단 뜻과 같다. 이 역시 엄청난 청구서로 돌아올 우려가 있다.
더 길게, 더 큰 그림의 물가 안정 대책을 구사하지 않고 ‘조급증’을 내버린 정부의 모습이 아쉽다. 취약 계층 중심의 ‘핀셋’ 지원과 농가의 구조 개혁에 우선순위를 둔 대책은 느리긴 해도 근본적이고 건전한 해결 방안이란 호평을 받았을 것이다. 경제당국자들이 과거로 회귀하지 않고, 미래를 내다본 진짜 거시정책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 ‘4월 이후’를 지켜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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