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피격 14주기, 아빠가 그리운 막내딸의 소소한 바람[손효주 기자의 국방이야기]
생전 아빠에 대한 기억은 없는 해봄 씨지만 기억이 시작된 순간만큼은 또렷하다. 해봄이 다섯 살 때인 그날, 해군 2함대사령부가 있는 경기 평택항은 시끌벅적했다. 어른들이 가득 모여 있었고 통곡이 이어졌다. 해봄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랐다. 누군가 “아빠가 돌아가신 것 같다”고 했지만 “돌아가신다”라는 말의 의미도 몰라 눈만 끔뻑였다. 해봄은 펑펑 우는 어른들 모습 자체가 낯설었다.
TV에선 천안함 실종자 수색 장면이 나왔다. 아빠 사진이 TV에 나오면 해봄은 “아빠다!”라고 외쳤다. TV 속 아빠가 반가워 얼굴 가득 미소가 번졌다. 해봄은 맑게 웃었지만 어른들은 더 크게 울었다.
14년이 흐른 이달 22일. 2함대사령부에선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이 열렸다. 올해 대학생이 된 열아홉 살 해봄 씨가 무대에 섰다. “해가 빛나는 봄에.” 아빠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했다. 첫 문장을 읽자마자 눈물이 터졌다. 그의 아버지는 고 김태석 해군 원사(1973∼2010). ‘해봄’이란 이름은 ‘해가 빛나는 봄’으로 아빠가 지어줬다. 김 원사는 천안함에서 가스 터빈 정비와 보수 유지를 담당하던 내기(內機) 부사관으로 근무하다가 막내딸 해봄 씨 등 세 딸을 두고 산화했다.
14년 전 아무것도 몰라 웃던 해봄 씨는 이날 3분 남짓 편지를 낭독하며 여러 번 울었다.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행사 참석자들도 눈물을 훔쳤다. 편지 낭독이 수차례 중단됐다. 편지를 읽으면서 부른 “아빠”라는 말도 10여 년 만이었다. 그는 “눈물이 나는 와중에도 아빠라고 부르는 게 조금 어색했다”고 했다. “어린 시절 아빠와 놀던 기억이 언뜻 나긴 하지만 ‘언뜻’이어서 ‘나, 아빠랑 어디 가서 뭘 했어’라고 설명할 수 있을 만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고도 했다. “편지를 읽는데 편지에 담을 만한 아빠와의 추억이 기억에 없다는 게 아쉬웠어요. 아빠를 만나 육성으로 말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에 눈물이 많이 났어요.”
해봄 씨는 그간 매년 3월 26일 열리는 천안함 46용사 추모식은 물론이고 2016년부터 매년 3월 넷째 주 금요일에 열리고 있는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도 참석해왔다. 그는 “내게 3월은 어린 시절부터 행사에 가는 달이었다”면서 “매년 3월이 되면 어른들이 또 얼마나 많이 울까 생각하곤 했다”고 말했다. 또 “아빠와의 추억은 없지만 그리운 느낌은 이맘때 더 강해진다”고도 했다.
해봄 씨에게 올해 3월은 더 특별했다. 그는 올해 천안함 피격 당시 산화한 이들 중 가장 막내였던 장병들과 같은 나이가 됐다. 당시 김동진 중사, 장철희 일병 등은 1991년생으로 만 19세였다. 그는 “아빠와 함께 나라를 지키다 돌아가신 분들이 겨우 내 나이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해봄 씨가 ‘아빠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있을 때쯤 더불어민주당 서울 강북을 후보였던 정봉주 전 의원은 이른바 ‘목발 경품’ 발언으로 논란이 됐다. 2015년 북한군의 목함 지뢰 도발로 중상을 입은 김정원 상사, 하재헌 예비역 중사 등을 조롱하는 발언으로 해석됐다.
이 발언은 북한군의 도발로 가족을 잃은 다른 사건 유가족들에게도 상처가 됐다. 특히 매년 3월 슬픔이나 트라우마가 배가될 천안함 유가족과 생존자들에겐 더욱 큰 상처로 다가왔다. 해봄 씨는 “조국을 위해 희생한 이들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발상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역시 잊을 만하면 터지는 ‘천안함 망언’에 그간 많이 시달려왔다. 하 예비역 중사도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그런 망언이나 악성 댓글에 숱하게 시달려왔다”고 말했다. 그는 익숙하다는 듯 ‘허허’ 웃으면서도 “적어도 나라를 지키다 희생한 사람들에게 그러면 안 되는 것”이라고 차분하게 말했다.
26일은 천안함 피격 14주기다. 해봄 씨는 2함대사령부에서 열리는 14주기 추모식에도 참석한다. 매년 3월이 되면 아버지가 가장 보고 싶다는 그는 14주기 하루 전 소소한 당부를 전해왔다.
“제 아버지처럼 나라를 지키다 희생한 분들을 영웅처럼 떠받들어 달라는 게 아니에요. 하루 종일 추모하고 슬퍼하자는 것도 아니고요. 최소한 망언이나 조롱은 안 했으면 합니다. 너무 마음 아프잖아요. 그냥 이런 분들이 있어서 우리가 지금도 잘 살고 있다는 정도만 한 번쯤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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