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대학도, 기업도 관심 없는 ‘기술 개발 죽음의 계곡’ 프라운호퍼 모델로 극복해야”
“출연연, 독일 프라운호퍼 모델 도입 노력”
프라운호퍼, 가장 성공적인 산·연 협력 모델
“12대 전략기술과 함께 기관 고유 기술 연구도 챙겨야”
독일의 정부 연구기관인 프라운호퍼 연구소는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산·연 협력 모델로 손꼽힌다. 막스플랑크 연구소와 함께 독일을 대표하는 연구기관으로 독일 전역에 있는 70여 곳의 연구소가 연합한 형태다. 각 연구소는 지역 대학·중소기업과 긴밀히 협업하고 있다. 이 덕분에 ‘기술의 나라’라고 불리는 독일에서도 가장 가치 있는 특허 기술이 프라운호퍼를 통해 탄생하고 있다.
프라운호퍼 연구소의 이런 전략은 ‘프라운호퍼 모델’이라고 불리며 전 세계 산업 기술 개발의 표준처럼 여겨진다. 기술 개발 여력이 부족한 기업은 프라운호퍼에 필요한 기술 개발을 의뢰하고, 프라운호퍼는 수십년간 쌓인 기업 네트워크와 연구 데이터를 활용해 기업들의 요구 수준에 맞는 기술을 개발한다. 대신 예산 대부분을 정부 기관과 산업체의 기술 개발 의뢰로 충당하는 형태다.
한국도 기술패권 경쟁 시대를 맞아 정부 연구기관의 산업 기술 개발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다. 최근에는 12대 국가전략기술을 중심으로 하는 ‘글로벌 TOP(톱)전략연구단’ 사업이 출발을 알리면서 국가 R&D 체계의 변화도 예고했다. 이같은 정부의 방향성에 맞춰 출연연에서도 프라운호퍼와의 공동 연구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세계 최고 수준의 노하우를 갖춘 연구기관과 협력해 산업 기술을 개발한다는 전략이다.
이영국 한국화학연구원 원장은 프라운호퍼와의 공동 연구에서 더 나아가 출연연 스스로가 프라운호퍼가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지난 14일 대전 유성구 화학연 본원에서 조선비즈와 인터뷰를 갖고 “프라운호퍼 모델을 국내로 가져오기 위해 계속 접촉하고 있다”며 “산업 기술 수준을 높이는 데 국제 협력에만 집중할게 아니라 선진 모델을 흡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프라운호퍼 모델을 들여오려는 시도가 이번이 처음은 아닐 것”이라면서도 “기술 개발을 기업과 연구 기관 중 어느 곳이 주도하냐에 따른 인식 차이로 인해 도입이 어려웠다”고 말했다. 이어 “독일과 국내의 사례와 데이터를 모아 살펴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작년 3월에 취임한 이 원장은 정부의 R&D 예산 조정, 국가전략기술을 중심으로 한 출연연 연구 체계 개편 같은 굵직한 사건을 겪었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자문위원인 그는 지난 십수년간 출연연들이 염원하던 공공기관 지정 해제를 이끌어냈다.
-프라운호퍼 모델 도입을 주장하는 이유는.
“프라운호퍼는 기업들이 요구하는 수준의 기술을 개발하는 데 특화된 연구기관이다. 화학연도 마찬가지로 산업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대부분 출연연의 임무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에 많은 예산을 쓰고 있으나, 성과가 일부 미진한 상황이다. 중소기업에 돈만 주고 알아서 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출연연이 적극 지원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화학연은 태생부터 산업 기술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1976년 설립 당시 136개 화학 기업이 자본을 출연해 만든 재단법인으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국내 25개 출연연 중 기업 자본으로 탄생한 유일한 사례다.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화학 제품도 이 곳에서 탄생했다. 세탁 표백제 ‘옥시크린’과 엔진 보호제 ‘불스파워’가 대표적이다.
-이전에도 프라운호퍼 모델을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아직까지 이어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독일과 한국의 중소기업 지원 문화와 인식의 차이가 크다고 본다. 독일은 중소기업에 필요한 기술은 연구기관이 개발해야 한다는 문화가 강하다. 반면 한국은 기업에 자금을 지원하고 자율에 맡기는 식이다. 프라운호퍼 모델이 한국에 정착하려면 산업 기술 개발을 대하는 문화를 바꿀 필요가 있다. 출연연 중심의 기술 개발로의 정책 전환도 필요하다. 물론 부처간 입장이 다른 만큼 더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제2의 옥시크린, 제2의 불스파워가 없다.
“과거와 산업 환경이 달라진 탓이다. 국내 화학업계의 기술 수준이 높아지면서 완제품 개발 요구는 많이 줄었다. 대신 제품 생산에 필요한 중간 소재나 기반 기술 분야에서는 지금도 활발히 협력이 이뤄지고 있다. 국민들이 체감할만한 제품을 직접 개발하지 못하는건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화학산업의 핵심 기술은 여전히 화학연에서 출발한 경우가 많다. 출연연과 기업의 긴밀한 협력은 중요하다.”
-정확히 어떤 방식의 산·연 협력 모델을 구상하고 있나.
“산업계에서 요구하는 기술과 연구 현장에서 나오는 기술의 수준은 크게 다르다. 기술성숙도(TRL) 측면에서 볼 때 산업체에서는 TRL 6 이하의 기술은 원하지 않는다. 반면 대학에서는 3을 넘어선 주제는 연구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TRL 4~5를 기술의 ‘데스밸리’라고 부른다. 기업은 기술 수준이 너무 설 익어서, 교수들은 논문 작성에 적합한 주제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서로 관심이 없는 단계다. 이 간극을 출연연에서 채워야 한다. 프라운호퍼처럼 실제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기술을 완성해주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산업 기술도 중요하지만, 최근에는 출연연이 국가전략기술 개발에 집중해야 한다는 요구가 강해지고 있다.
“화학연은 이차전지, 첨단바이오, 반도체·디스플레이, 수소 등 4개 분야에 집중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원장 직속으로 ‘국가전략기술추진단’을 설립하고 전략기술 육성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 특히 이차전지 분야에서 출연연 간사기관을 맡아 산·학·연 연구 협력 생태계 조성을 위한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고 있다.”
-국가전략기술에 사업과 예산이 쏠리다보니 이외 분야 연구는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실제로 글로벌 TOP전략연구단 같은 중요 사업이 12대 국가전략기술 분야를 우선 지원하다보니 연구비 쏠림을 우려하는 기관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화학연 내부에서도 전략기술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국가적으로 중요한 기술들이 많다. 태양전지와 작물보호제(농약)이 대표적이다. 이 분야는 내·외부 사업을 통해 계속 지원할 예정이다. 그동안 축적한 노하우는 계속 발전시켜 나가겠다.
최근에는 탄소중립 기술 개발에도 힘쓰고 있다. 이 역시 국가전략기술에 포함되지 않는 기술이다. 여수에 건설 중인 탄소중립화학공정실증센터는 최근 준공을 마치고 본격 가동을 준비하고 있다. 센터에서는 1차 사업으로 촉매 제조를 위한 테스트 설비와 시험 평가 인프라를 구축할 계획이다. 올해 말 준공을 앞둔 2차 사업에서는 본격적인 탄소포집활용(CCU) 실증을 통한 상용화 지원이 예정돼 있다. CCU 기술은 친환경 산업에서 막대한 시장 가치를 갖고 있다. 한국이 글로벌 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지난해까지 출연연은 인재 유출, R&D 예산 조정 등으로 인한 위기론이 대두됐다. 어려운 환경에서 이런 혁신이 가능할 것이라고 보는 것인가.
“올해 R&D 예산 조정이 이뤄지면서 연구 현장에서는 다소 혼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당시에는 정책이 연구 현장과 공유되지 않은 부분이 있고, 후속 조치 계획이나 가이드가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긍정적인 변화도 있다. 지난 1월에는 출연연이 공공기관에서 제외됐다.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 인력을 채용하고, 연구자의 창의성과 도전성이 발현될 수 있는 연구 환경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공공기관 지정 해제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정작 과학기술원은 1년 앞서 공공기관에서 지정 해제됐으나 큰 변화가 없다는 지적도 있다.
“가장 큰 문제였던 인건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해외 석학이나 젊은 인재를 뽑을 때 급여의 제한이 있다. 대학 총장들을 만났을 때 가장 부러웠던 점이 젊은 연구자, 해외 석학들이 만족할만한 지원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출연연 자체적으로 재원을 마련해 활용할 수 있게 해주면 인력 혁신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대학은 기부금이 있지만 출연연은 추가 재원 확보가 어렵다.
“정부도 함께 고민할 문제다. 가령 현재 기술료 수입은 인건비로 사용하지 못하게 돼 있다. 규정을 완화해 기술료 수입을 인건비로 활용하는 방법을 제안하고 싶다. 일부 출연연에서는 지주회사를 만들어 재원을 확보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국내 R&D 체계 전략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의견은.
“국내 과학기술 정책은 그동안 ‘패스트 팔로워’ 전략이었지만 이제는 ‘퍼스트 무버’가 되자는 추세다. 정부에서도 이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연구자들이 퍼스트 무버가 될 수는 없다. 우리가 가진 장·단점을 잘 파악하고 수준별 전략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갖춘 분야에서는 적극적인 투자로 퍼스트 무버로 도약하고, 아직 부족하다고 판단하는 분야에서는 계속 패스트 팔로워 전략을 유지해야 한다. 이후 기술 발전 수준에 따라 퍼스트 무버로 전환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대신 퍼스트 무버가 되고자 하는 분야에서는 실패를 인정하고 다양한 도전을 할 수 있게 지원해야 한다. 한국은 실패에 대한 위험이 큰 나라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앞으로 정부와 과학계가 머리를 맞대고 도전적인 연구문화 조성을 위해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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