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방언투성이 판소리 쉽게 풀어… 희로애락 오롯이 느꼈죠”

이강은 2024. 3. 24. 21:3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판소리 다섯바탕 사설집 낸 소리꾼 박가빈
기존 사설집 교정·주석 작업에 매진
심청가·춘향가·흥보가 등 정리 완성
사설 작업하며 감정 하나하나 이해
심청가로 9번 도전 끝에 대통령상도
관객도 쉽게 이해… 호응부터 달라져
“외국인 즐길 수 있게 악보집 펴낼 것”
아홉 살 때 소리(창)를 시작한 박가빈(36)에게 2021년은 소리 인생의 분기점이다. 그해 3월 ‘심청가’로 사실상 첫 완창 무대를 4시간가량 잘 마치고 내려왔는데 후련하기보다 찝찝했다. 늘 그래 왔듯이 사설집에 담긴 단어들의 뜻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그냥 외워서 내는 소리가 영 개운하지 않았다. 관객들에게 온전히 이야기를 전하지도, 자신만의 소리를 들려주지도 못한 것 같아서다.
소리꾼은 물론 누구나 쉽게 판소리 다섯 바탕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 사설집을 펴낸 소리꾼 박가빈. 그는 “내가 판소리 사설만 제대로 이해해도 그 안에 녹아 있는 인간의 (보편적) 감정이나 상황을 음악적으로 충분히 전달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박가빈 제공
최근 국립국악원에서 만난 박가빈은 당시를 떠올리며 “나가는 판소리 명창 대회마다 예선 탈락하는 상황에서 완창까지 맘에 들지 않아 너무 힘들었다”면서 “‘소리꾼으로 살기에는 능력이 부족한 건가’, ‘이 길을 계속 갈 수 있을까’ 자책했다”고 말했다. 그러다 다시 판소리를 공부할 겸 다섯 바탕의 사설집을 제대로 정리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판소리는 사실 음악보다 이야기가 먼저인데 그 내용을 속속들이 알고 부르는 소리꾼이 드물어요.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으면 대목마다 어떤 감정으로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도움이 될 텐데 그러지 않으니 소리와 내용이 따로 놀기도 하죠. (화자가) 화난 상황인지도 모른 채 웃으며 부르거나 되게 우스꽝스러운 부분인데 심각하게 부르는 식입니다. 그러나 기존 사설집으론 소리꾼조차 의미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많았어요.”
사설집은 판소리의 기본이자 바탕인 사설(이야기)을 글로 엮은 것으로 창과 아니리(창을 하는 사이사이에 가락 없이 말로 하는 부분)가 실려 있다. 하지만 기존 사설집은 한자어와 한시, 옛 방언 등 어려운 단어와 문장이 많은데 각주는 부실하고, 빽빽한 글씨에 띄어쓰기나 맞춤법도 엉망인 경우가 상당해 읽기는 물론 의미 파악도 쉽지 않다. 여기에 판소리 전승 방법이 구전심수(口傳心授: 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가르친다는 뜻,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배도록 가르침)라 실제 의미와 다르게 부르는 사설도 많다.
박가빈은 소리꾼뿐 아니라 소리를 배우는 학생과 관객 등 누구나 편하게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사설집을 목표로 교정·주석 작업에 매달렸다. 6개월 만에 첫 사설집 ‘강상제 심청가―조상현 창본’을 펴냈다. 앞에 일목요연한 목차를 달았고, 쪽마다 사설 바로 밑에 친절한 주석을 달아 바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이듬해 춘향가와 흥보가, 지난해 적벽가에 이어 올 2월 수궁가를 끝으로 다섯 바탕 사설집을 완성했다.

이 과정에서 마음도 다잡았다. “‘심청가’를 들고 대회를 일곱 번 나가 계속 떨어지니 한 심사위원이 ‘춘향가로 바꿔 보는 게 어떻겠냐’고 한 적 있어요. 고민스러웠지만 결국 ‘이건 심청가가 아니라 내 문제다’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사설을 얼마나 진정성 있게 해석해 들려줄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깨달았죠.”

정말 그랬다. 사설집 작업을 하면서 심청가 사설 하나하나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적절한 감정을 실은 박가빈의 소리는 그전과 달랐다. 2022년 10월, 8번째 도전이었던 서편제 보성소리축제 판소리 명창부 경연대회에서 3위를 차지했다. 본선 심사위원 중 한 명인 신영희(82) 명창이 ‘쟤가 누군데 저렇게 잘하느냐’며 놀랄 정도였다. “신영희 선생님께 인사하며 ‘그동안 저 진짜 많이 떨어졌어요’ 하니 ‘네가 왜 떨어지느냐’고 하셨어요. 그때 ‘아,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결국 2주가량 지나 열린 구례 송만갑 판소리 대회에서 심청가로 명창부 대통령상(장원)을 받았다. 그야말로 ‘8전9기의 소리꾼’인 셈이다.

지난해 10월 서울 돈화문국악당에서 한 두 번째 완창(춘향가) 무대도 2년 전 첫 완창 때와 비교가 안 됐다. 박가빈이 만든 ‘김세종제 춘향가―조상현 창본’ 사설집을 받아 보고 내용을 쉽게 이해한 관객들의 호응부터 남달랐다. 5시간이 넘는 공연 시간 내내 추임새를 넣으며 판소리의 재미에 푹 빠졌고, 박가빈은 공연이 끝나자 벅찬 눈물을 흘렸다. “사설을 공부하고 춘향가를 완창할 때는 진짜 재미있었어요. 판소리 사설만 제대로 이해해도 그 안에 녹아 있는 인간의 (보편적) 감정이나 상황을 내가 충분히 음악적으로 전달할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자신이 손을 본 사설집도 완벽하지 않은 만큼 앞으로 더 뛰어난 사람들이 보완해 주길 바란다고 한 젊은 소리꾼의 또 다른 목표는 판소리 다섯 바탕을 모두 오선지에 담아 악보집을 펴내는 것이다. “음악에선 악보가 만국 공통 언어잖아요. 판소리를 악보로 옮겨 다양한 문화권 사람들과 교류하며 판소리를 확장하려 합니다. 소리꾼과 고수가 판소리(공연)의 원형이라면, 악보집을 만들어 양악기 등 다른 나라 악기와도 협업하는 게 판소리의 변형이라고 생각해요.” 지난 2월 채보에 들어간 심청가 악보집부터 올 연말쯤 첫선을 보일 계획이다.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