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 ‘검은 그림’이 영상으로…필립 파레노 한국 첫 전시

노형석 기자 2024. 3. 24.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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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박스에서 상영중인 파레노의 근작 영상물 ’귀머거리의 집’(2021). 거장 프란체스코 고야의 걸작 ‘검은그림’ 연작과 이 그림이 걸렸던 마드리도 교외의 퀸타 델 소르도(일명 귀머거리의 집) 빌라의 내부 공간을 주된 소재로 삼은 작품이다. 빌라에 붙어있던 연작 그림들을 극적인 구도로 포착하고 장작불의 타는 소리를 증폭시킨 음향효과를 덧붙이면서 지금은 사라진 빌라 내부의 공간을 떠돌아다니는 듯한 느낌을 살려냈다.

“이성이 잠에 빠진 사이 상상력은 괴물을 낳는다.”

스페인의 그림 거장 프란체스코 고야(1746~1828)는 자신이 내어뱉은 이 말대로 광기 들린 삶을 살았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궁정화가 자리에서 쫓겨나고 귀가 들리지 않는 가운데 마드리드 근교 농가 건물에서 화가는 광기에 들떠 그려댔다. 말년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좀비나 유령같은 몰골로 인간 밑바닥의 처연하고 비루한 욕망과 악마성을 증언했다. 스페인 프라도미술관 67호실에서 수많은 관객들을 숨죽이게 만드는 검은 그림 14점이다. 일반인이건 피카소나 헤밍웨이 같은 거장들이건 검은빛 회색빛 갈색빛으로 그린 이 그림에 전율하지 않는 후대 사람들은 없었다. 고야는 인간 내면의 밑바닥을 투시하는 영혼의 투사경을 지녔고, 이를 붓질로 형상화할 수 있었던 탁월한 천재였다. 고야는 이 그림들을 바깥에 전혀 알리지 않았지만, 작품을 사들여 프라드에 기증한 프랑스 은행가 덕분에 그림은 더욱 미스테리해졌고 유명해졌다. 고야의 평전을 쓴 일본 작가 훗타 요시에가 통찰했듯이 리얼리즘, 인상주의, 초현실주의, 추상주의 등의 온갖 현대사조의 조짐을 모두 머금은 검은 그림은 세계 현대미술의 지평을 열어젖히는 선구적인 명작이 되었다.

프랑스의 세계적인 현대미술 대가 필립 파레노(60)는 고야의 검은그림들을 1초에 50만 장면을 잡아내는 초정밀기술로 포착한 40분짜리 다큐적 동영상이 지금 서울 한남동 삼성 리움미술관 블랙박스에서 상영중이다. 2022년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에서 상영되어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던 파레노의 근작 영상물 ’귀머거리의 집’(2021)이다. 거장 프란체스코 고야의 걸작 ‘검은그림’ 연작과 이 그림이 걸렸던 마드리도 교외의 퀸타 델 소르도(일명 귀머거리의 집) 빌라의 내부 공간을 주된 소재로 삼은 작품이다. 빌라에 붙어있던 연작 그림들을 극적인 구도로 포착하고 장작불의 타는 소리를 증폭시킨 음향효과를 덧붙이면서 지금은 사라진 빌라 내부의 공간을 떠돌아다니는 듯한 느낌을 살려냈다. 마치 소우주의 별처럼 빛나거나 유성처럼 날아오로는 화톳불의 아릿한 영상이 장작 타는 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이 영상에서 자식을 잡아먹는 우둔한 사투르누스와 늪속에서 곤봉을 휘두르며 격투하는 두 농부들의 싸움, 자위하는 남자를 비웃으며 보는 두 여인네, 그리고 고야의 말년 반려자였던 레오카디아의 복잡미묘한 표정이 클로즈업이 반복되면서 등장하다가 화톳불의 빛무리 속에 사위어간다.

리움의 엠(M)1 전시장 지하 1층에 벌여놓은 파레노의 작품들. ‘여름없는 한해’란 제목을 달고 자동연주를 하는 피아노설치작품이 놓여있고 그 주위를 헬륨가스를 채워넣은 물고기 풍선들이 떠다니고 있다. 왼쪽 상단에는 빛을 내면서 위아래로 움직이는 키네틱 조형물 ‘무빙 라이트’도 보인다. 미술관 바깥의 센서타워 ‘막’으로부터 대기와 풍향 등의 외부 정보를 받아 이 정보값으로 빛을 발산하며 움직인다.

이 전시는 파레노의 첫 한국전시인 ‘보이스’의 핵심 작품중 하나다. 지금 세계 현대미술계에서 영향력이 큰 아티스트중 하나로 꼽히는 프랑스 설치미술 대가의 국내 최초, 최대 규모 개인전이 지난달 말부터 리움 고미술관을 제외한 현대미술 전시장 전체 공간에서 선보이고 있다. 90년대 초기작부터 신작까지 파레노의 작품세계를 포괄하는 특별전으로 리움의 역대 최대규모 전시라고 할 수 있다.

전시장소인 여러 개의 전시장 자체가 인공지능 등에 의해 움직이는 총체적인 기계 작동 시스템으로 변한다는 것이 이 전시회의 도드라진 특징이다. 기존 아니쉬 카푸어의 거울을 밀어내고 새로이 상설 설치돼 외부 대기환경 데이터를 미술관 내부 전시품으로 전송하는 야외데크의 대형 타워 ‘막’(2024)이 이런 맥락에서 우선 먼저 눈길을 잡아끄는 작품이다. 바깥 데크에 새로 들어선 이 대형 탑은 영어로는 ‘membrane’으로 번역되는 일종의 센서타워다. 주위에 촉수처럼 케이블 센서를 설치해놓고 인근의 대기 온도와 습도, 풍량, 진동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뒤 미술관 내부의 작품들로 보내어 반영시키며서 작가의 전시장 전체를 일종의 유기체로 만드는 중추구실을 하고있다. 이 작품을 필두로 인공지능과 디지털 멀티플렉스 기술을 통해 영상, 조각이 움직이며 부유할뿐만 아니라 전시장의 벽들까지 여기저기로 이동하는 등 기존 전시 구조와는 전혀 다른 역동적 파격을 보여는 작품들이 등장한다.

리움미술관 바깥 데크에 새로 들어선 필립 파레노의 대형 설치조형탑 ‘막(膜)’. 영어로는 ‘membrane’으로 번역되는 이 작품은 일종의 대형 센서타워다. 주위에 촉수처럼 케이블 센서를 설치해놓고 인근의 대기 온도와 습도, 풍량, 진동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뒤 미술관 내부의 작품들로 보내어 반영시키며서 작가의 전시장 전체를 일종의 유기체로 만드는 중추구실을 하고있다.

프랑스 건축거장 장 누벨이 설계한 엠2 전시장의 1층안쪽에서 만나게 되는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 안니의 발화 영상이 대표적이다. 원래는 지난 2000년 동료 작가 피에르 위그와 일본 망가 캐릭터 안니에 대한 저작권을 구매해 공동제작한 작품이었는데, 여기에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진화하는 배우 배두나의 목소리를 집어넣어 실체감을 더했다. 배두나의 목소리가 인공지능을 통해 새로운 목소리로 탄생하고 인공두뇌를 활용해 외부 환경데이터를 사운드로 전환하고 사운드와 목소리가 상호작용하는 청각적 풍경이 펼쳐진다고 할 수 있다. 엠(M)2 전시장 지하 1층에 벌여놓은 파레노의 작품들도 흥미로운 볼거리를 선사한다. ‘여름없는 한해’란 제목을 달고 자동연주를 하는 피아노설치작품이 놓여있고 그 주위를 헬륨가스를 채워넣은 물고기 풍선들이 떠다니고 있다. 왼쪽 상단에는 빛을 내면서 위아래로 움직이는 키네틱 조형물 ‘무빙 라이트’도 보인다. 미술관 바깥의 센서타워 ‘막’으로부터 대기와 풍향 등의 외부 정보를 받아 이 정보값으로 빛을 발산하며 움직인다. 그런가하면 블랙박스 아래 지하 그라운드갤러리는 작가가 ‘작품들의 연회장’이라고 표현한대로 움직이는 벽과 떠다니는 투명 말풍선, 서구 극장의 반짝이 전구를 단 차양 등이 번쩍번쩍 빛을 발하면서 시계태엽의 장치가 움직이며 그림자를 드리우는 장면들과 어우러져 유기체적인 공간의 유동성을 스펙터클하게 펼쳐 보여주고 있다.

엠(M)2 전시장 1층 안쪽에서 만나게 되는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 안니의 발화 영상. 원래는 지난 2000년 동료 작가 피에르 위그와 일본 망가 캐릭터 안니에 대한 저작권을 구매해 공동제작한 작품이었는데, 여기에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진화하는 배우 배두나의 목소리를 집어넣어 실체감을 더했다.

"관객들에게 어떤 식으로 보라고 지시된 것은 없다. 원하는 대로 돌면서 어떤 영상을 볼지, 보지 않을지 정할 수 있고 어떤 순서대로 봐야 한다는 원칙도 없다. 시작하는 부분과 끝나는 지점도 분명하지 않다. 전시에서 어떤 식으로 시간을 보낼지는 여러분에게 달려 있다."

이 모든 작품들의 기본 얼개는 각자 관객들이 보는 시점과 눈길에 달렸다고 작가와 미술관 쪽은 말하지만, 사실 그 기저에는 유령의 감수성이 도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아프리카 알제리 출신으로 프랑스로 건너와 수학과 미술을 공부한 파레노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유령처럼 부유하고 떠돌면서 순간을 탐닉하고 머물다가 사라진다는 존재의 속성을 여러 영상과 대형 설치작품들로 이야기해왔다. 프랑스 축구스타 지단의 경기모습을 열일곱대의 카메라를 동원해 다원적으로 포착한 ‘21세기의 초상화’ 영상(2006)부터 프랑스 파리 팔레드도쿄의 빛나는 극장 차양과 자동음율 장치의 피아노 설치작품(2013), 영국 테이트모던 터바인 홀을 채운 거대한 입체 벽면 패널과 그 사이를 부유하는 물고기 풍선들의 이미지(2016), 생태 환경 반영 장치 ‘에코’ 시스템에 따른 미국 뉴욕 모마미술관의 유기체적인 전시 작업(2019) 등 항시 테크놀로지와 인공지능 등을 결합시킨 첨단성의 작품들을 내놓았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한계와 시간적 숙명에 대해 철학적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어디에도 고착하지 못하고 꿈틀대다가 결국 세월 앞에 바스러질 존재들의 시공간이 주는 아름다움에 작가는 몰입한다. 그가 고야의 검은 그림에 탐닉해 배우들의 연기 못지않게 극적인 다큐멘터리 영상을 만들어낸 것도 그런 몰입의 매혹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7월7일까지.

지난달 26일 리움 전시간담회장에 나와 기자들의 질문을 듣고있는 필립 파레노.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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