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규명 결정문 기다리는데 유족들 부음만 들려온다”

고경태 기자 2024. 3. 24. 11:2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024 인권운동 최전선-9]
전미경 대전 산내사건 피학살자 유족회장
14일 오전 대전 동구 낭월동 산내 사건 피학살자 유족회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만난 전미경 회장이 아버지 이야기를 하다 눈가를 훔치고 있다. 고경태 기자

고라니였다. 아니 아버지였다.

밤새 고라니가 울었지만 나가보지 않았다. 여름에는 뱀도 많은 터라 위험했다. 날이 훤히 밝았을 때야 알았다. 밭에 쳐놓은 그물에 고라니 한 마리가 걸려 꼼짝 못 하고 있었다. 또 다른 한 마리는 그 앞에서 어찌할 줄 모르고 울기만 했다. 바짝 다가가자 한 마리는 도망을 갔고, 그물에 걸린 한 마리는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그 눈동자와 마주치자 퍼뜩 깨달음이 왔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이 골짜기에 두 손이 묶여 끌려올 적에 아버지도 저렇게 겁먹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을 터였다.

대전 산내사건 피학살자 유족회 전미경(75·옛 이름 전숙자) 회장의 이야기다. 2022년 7월, 대전 동구 낭월동 10-1(곤룡로 99번지) 유족회 사무실에서 기거할 때 겪은 일이다. 전미경 회장은 곧장 사무실에서 가위를 들고나와 그물을 잘라주었다. 고라니는 벌떡 뛰어서 산 방향으로 몇 발짝 가더니 돌아서서 우두커니 이쪽을 쳐다보았다. 전 회장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곤 눈물을 쏟았다.

전미경 회장의 아버지 전재흥씨(1927년생)는 73년 전이곳 산내 골령골에 끌려와 목숨을 잃었다. 아버지의 두 손을 묶은 줄을 풀어줄 사람은 없었다. 부역자로 몰려 학살당했다고 추정되는 날짜는 1951년 3월4일(제사일은 3월2일). 1951년 2월21일 육군본부 중앙고등군법회의는 “피고인 전재흥이 괴뢰에 가담하여 우익인사 라OO을 체포·살해케 하는 등 이적행위를 감행하였다”며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사형을 선고했고, 그로부터 보름여 뒤 골령골에서 총살형을 집행했다.

지난 2021년 8월 골령골에서 발굴된 유해를 바라보는 전미경 회장. 오마이뉴스 제공

대전 산내 골령골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전국 각지의 민간인들이 최소 3000여명 이상 처형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 6월28일부터 7월17일까지 대전형무소(현 대전교도소) 재소자와 인근 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미군 트럭에 실려와 헌병대와 경찰에 의해 학살당했다. 형무소 재소자 중에는 제주 4·3사건 및 여순사건과 관련된 이들도 있었다. 이때는 재판 등 적법한 절차가 전혀 없었다.

전미경 회장의 아버지는 1951년 3월 대전형무소 수감 중 형식상의 재판 절차를 거쳐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재판 역시 졸속이고 엉터리였다.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로 고문이 가해졌고 그에 따른 자백이 증거로 채택됐다. 그 사실을 추적해 밝히고 재심 무죄까지 이끈 사람은 다름 아닌 딸, 바로 전미경 회장이었다. 한국전쟁기 군경에 의한 피학살자중 재심 무죄를 받아낸 최초이자 유일한 사례다.

전미경 회장을 2024 인권운동 최전선 제9회의 주인공으로 소개한다. 그는 몇 안 되는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의 여성 회장이다. 2002년 우연한 계기로 골령골 유족회의 존재를 알게 됐고, 2020년부터 유족회장으로 일해왔다. 이제는 아버지를 넘어 100명이 넘는 유족 회원의 모든 아버지가 진실을 규명받고 명예를 회복할 수 있도록 힘을 쏟고 있다. 골령골에 국비를 들여 짓기로 한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위령 시설과 평화공원이 이른 시일 내에 들어서는 것은 최대 현안이다. 근본적으로는 국가의 사과와 학살 가해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심판을 요구한다. 그는 이 활동을 ‘인권운동’이라고 정의 내리지 않았지만, 오랜 염원이 사무친 인권운동이 아닐 수 없다.

전 회장은 시인이기도 하다. 두 돌 때쯤에 충남 서천군 시초면 선동리 고향 집을 급습한 경찰에 의해 자신을 재우고 있던 아버지를 빼앗겼다. 이후 야생의 잡초처럼 인생을 헤쳐온 그의 스토리엔 몸서리쳐지는 슬픔이 배어있다. 시인의 길은 어쩌면 운명이었다. 3월14일 대전 산내사건 피학살자유족회 사무실에서 전미경 회장을 만나 그 운명의 여러 토막에 관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대전 골령골에서 발굴한 유해 중에서 제주 4.3희생자 신원이 확인된 고 김한홍씨의 유골함을 들고 유족들과 함께 지난해 10월4일 세종 은하수공원을 방문한 전미경 회장(맨 오른쪽). 전미경 제공

# 대전형무소, 아버지

“저는 1948년 12월8일생이에요. 두 돌이 좀 지났던 1951년 1월이었대요. 산에 숨어 살던 아버지가 그날 자정 넘어 몰래 집에 들어와 저를 재우고 있었는데 잠복해 있던 경찰과 우익단체 사람들이 갑자기 들이닥쳤어요. 경찰이 아버지 멱살을 잡아 일으키니 제가 바닥으로 떨어졌대요. 아버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일어서려 하니까 경찰이 군화 신은 발로 찼고, 저는 나가떨어져서 개구리처럼 뻗어있었대요.

아버지는 무명옷에 피가 배어 나오도록 구타를 당하면서 끌려갔다죠. 서천군 시초면 시초 지서를 거쳐 서천경찰서로 갔대요. 거기서 또 대전형무소로 옮긴 거죠. 아버지는 원래 좌익활동을 했지만, 제가 태어난 다음 날 몰래 집에 왔다가 경찰에 끌려가 돌아온 뒤 농사만 짓겠다고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왜냐면 제 위의 언니는 일찍이 죽고, 오빠는 네 살 때 우익단체 사람들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하거든요. 제가 불쌍하니까 마음을 달리 먹으셨을 거예요. 문제는 좌익활동하던 삼촌이 집에 숨어있었는데, 아버지가 본인한테 나온 도민증을 삼촌한테 준 거예요. 도민증을 줘서 동생 탈출시킨 죄로 아버지는 또 산으로 도망을 가게 된 거고, 그러다 저를 보러 왔을 때 잡혀간 거죠.

할아버지가 대전형무소로 면회를 갔는데, 처음에는 다리를 절뚝거리고 얼굴이 많이 부었더래요. 머리에는 용수처럼 바구니가 씌워져 있었고요. 그러면서도 ‘죄가 없으니 일찍 풀려날 것’이라도 하더래요. 두 번째 면회 때는 아버지가 없더래요. 간수가 넌지시 ‘골령골에 갔다. 거기 가면 못 온다. 3월2일에 제사 지내라’고 하더래요. 그때부터 할아버지가 정신을 놓고 앓기 시작했어요.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친구 사이였는데 어머니를 외삼촌이 있는 충남 장항으로 보내서 재혼을 시켰어요. 그리고 저를 월북한 삼촌 호적에 올렸어요. 아버지로부터 도민증을 받아 탈출한 그 삼촌은 인민군 점령시기 의용군으로 갔고 나중에 월북했다고 알고 있어요. 어릴 적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줄도 몰랐어요. 다들 함구령을 내려서, 멀리 돈 벌러 나간 줄만 알았어요.”

젊은 시절의 전미경 회장. 전미경 제공

# 할아버지와 똥 빨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저를 키우셨어요. 할아버지는 저를 정말 사랑해주셨어요. 머리털을 뽑아 신으로 삼아드려도 그 은공을 갚지 못해요. 제가 어릴 때부터 매우 아팠어요. 나중에 심장이 기형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걸 몰랐을 때니, 아프면 무당 데려와 푸닥거리했어요. 그렇게 저를 간신히 키우셨어요.

11살 때였던 것 같아요. 면 직원이 인구조사를 나왔다면서 집에 왔는데 경찰을 대동하고 왔어요. 근데 ‘재흥이는 편지 오느냐, 재원이는 왔다 갔느냐’고 묻는 거예요. 전재흥은 아버지, 전재원은 월북한 삼촌 이름이에요.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서더니 ‘네놈들이 데려다 죽이고 왜 나보고 물어보느냐’고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셨어요. 그 뒤로 정신줄을 서서히 놓으셨어요. 저 말고는 다 아버지 잡아간 우익단체 사람으로 보이는 거예요. 고모 둘과 막냇삼촌, 그러니까 당신의 아들딸까지 못 알아보는 거예요. 손녀인 저를 지키겠다면서 긴 작대기를 휘두르고 다니셨어요. 고모들이 할머니를 딴 데로 모셔야 할 정도로 할아버지 상태가 안 좋았어요. 저만 남았어요. 어쩌면 저와 할아버지만 고립된 거죠. 할아버지가 정신이 이상해지면서 대소변도 옷에다 그냥 보셨어요. 누가 치웠냐고요? 제가 다 치웠죠. 11살에 할아버지 진짓상 다 차려드리고 대소변 빨래도 했어요.

대소변 빨래는 동네 우물에서 못하고 한 2km쯤 떨어진 둠벙(농업용수를 가두어두는 물 저장소)에서 했는데, 겨울이 문제였어요. 물이 얼잖아요. 돌로 얼음을 깨서 바지를 빨고 줄에 갖다 널면 나무같이 굳고…. 그때 국민학교(초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학교를 열흘에 두 번이나 갈까요? 가더라도 맨날 늦으니 선생님께 맞고, 차마 친구들 앞에서 똥 빨래 한다는 말은 할 수가 없어서 아무 소리도 못 하고, 그러면 선생님이 성질이 나서 매를 더 때리고.

언 손으로 똥 묻은 할아버지 옷 빨래하고 학교 갔다가 대나무 회초리로 손바닥 맞고 온 날을 잊지 못해요. 손은 부어서 꼬부라지지를 앉는데도 체로 돌을 걸러낸 쌀로 밥을 해 할아버지 잡숫게 해드리고, 숙제하려고 앉았는데 손으로 연필은 못 잡겠고, 그래서 누웠는데 손이 화끈거려 잠을 못 자겠더라고요. 일어나 문을 열었더니 그새 눈이 왔는지 장독대 위에 눈이 소복이 쌓였어요. 그 눈 속에다가 두 손을 가만히 집어넣었어요. 손을 잉크에 담갔다가 꺼내는 기분이었어요. 눈이 살며시 다 녹더라고요.

한 해 지나서 국민학교 4학년 때였어요. 학교 마치고 집에 와보니 할아버지가 피투성이가 된 채 마당에 큰 대자로 누워계시더라고요. 동네 꼬마들이 ‘할아버지 미쳤다’고 돌팔매질한 거예요. 그때부터 할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학교에 다니지 않았어요. 할아버지는 4·19 혁명 나고 얼마 있다 돌아가셨죠.”

젊은 시절의 전미경 회장. 전미경 제공

# 이혼할 결심, 어머니

“남편과 딱 10년을 살고 이혼했어요. 시어머니상 치른 지 1년 됐을 때였죠. 부여읍 구교리에 시집와 살았는데, 사실 고모들과 막냇삼촌이 억지로 시킨 결혼이었어요.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뒤엔 할머니랑 살았어요. 그런데 할머니도 치매가 왔어요. 고모들이 할머니 모셔가고 집을 판 뒤에 저를 어머니한테 보내려는 거예요. 거기서 좌절을 했어요. 어머니 떠나고 외갓집하고 상종을 안 하고 살았는데 제가 왜 거기에 가요? 14살에서 18살 때까지 친구 집에서 지내면서 산으로 들로 혼자 무의미하게 돌아다니거나 그냥 잠만 잤어요. 넋 놓고 송장처럼 살 때에요. 학교도 안 다녔고요. 동네엔 ‘빨갱이 자식’으로 소문이 났었고.

나중에는 자꾸 시집을 보내려고 해서 수면제 20알과 쥐약 3병을 먹고 죽으려고 한 적도 있어요. 이렇게 제정신이 아닌 여자를 누가 아내로 맞이하려고 하겠어요. 게다가 연좌제에 묶여있는 여자를 말이에요. 그런데 결국 19살에 시집을 간 거예요. 저 같은 사람을 신부로 맞이할 정도면 신랑은 어떤 사람이겠어요.

중매하는 사람이 우리 아버지에 관해 얘기를 했나 봐요. 그랬더니 시어머니가 며느리에 대해 부여 바닥에 소문을 쫙 낸 거예요. ‘우리 며느리 친정아버지는 빨갱이 두목이었다’고요. 제가 부여에서는 빨갱이 딸이에요 하하하. 말을 말자고요. 몇 번 자살 시도도 했어요.

마침내 이혼하고, 삼 남매만 데리고 나왔지요. 부여 딴 동네로 이사를 하였어요. 지인들 보증을 받아 농협에서 50만원 융자를 받았어요. 아기 업고 다니면서 미용기술을 배워놨거든요. 융자받은 돈으로 아주 조그마한 미용실을 냈어요. 그날이 1982년 3월2일이에요. 부여미용실이라고. 미용실 차리고 1년 뒤인 1983년의 어느 날 어머니가 찾아왔어요. 얼굴도 잊어버린 어머니가 30여년 만에 온 거죠. 반가울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근데 어머니가 찾아와서는 ‘니가 아무리 싫어해도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간다. 너랑 얘기 좀 해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밤새 아버지 이야기를 해주시는 거예요. 누가 아버지를 잡아갔는지, 대전형무소 있을 때 ‘아버지 빨리 죽이라’고 탄원서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등등 모든 것을 말이에요. 제가요.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안 거예요.”

전미경 회장의 아버지 전재흥. 손톱만한 증명사진을 복원했다고 한다. 전미경 제공

# 미용실, 현수막

“미용실이 대박이 났어요. 처음에는 미용실 방에 불도 못 넣을 정도로 어려웠어요. 한데 2년 정도 지나면서 히트를 친 거예요. 참말이에요. 손님이 굉장했어요. 줄을 서다시피 했죠. 8년 만에 상가를 하나 샀어요. 상가 사서 그 세를 받고, 저는 세가 싼 곳에서 계속 미용실을 하면서 애들 대학교육까지 다 시킨 거에요. 어느 정도 의식주가 해결되니까 아버지 생각이 나더라고요.

2002년 6월의 쉬는 날이었어요. 아들 사는 대전에 왔다가 서대전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현수막이 하나 걸려있는 거예요. 그래서 보니까 대전형무소에 있다가 돌아가신 분들 위령제를 모신다는 거예요. 바로 그날이 위령제였어요. 위령제는 10시에 하는데 시간은 이미 오후였지요. 그래도 차를 돌려 위령제 장소인 산내초등학교로 가니까 철수하고 없더라고요. 그때부터 유족을 찾기 시작한 거예요. 해마다 추석 때는 아침에 일찍 제사 지내고 여기 골령골로 왔어요. 한 사람이라도 성묘하는 유족들 찾으려고요. 그러다가 시민단체랑 연결되고, 유족들을 하나둘 만나게 되었죠.

아버지 죽음에 대해서는 1기 진실화해위(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을 했는데 처음에는 ‘불능’이 났어요. 군법회의 판결과정과 적법성 여부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어 진실을 규명하지 못한다는 거였어요. 그게 2010년 6월이었어요. 이의신청했어요. 진실화해위가 문 닫기 6개월 전이었어요.”

# 무죄 : 아버지는 죽이지 않았다

“마침내 1기 진실화해위로부터 진실규명을 받았어요. 그때가 2010년 12월이었으니까, 문 닫기 직전이었어요. 육군본부 중앙고등군법회의 판결문에는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살인죄를 씌워서 사형 언도를 내렸잖아요. 그리고 보름 만에 집행했다는데 제가 진실을 밝혀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낮에는 미용실하고 저녁에는 고향 서천군 시초면으로 다니면서 아실 만한 분들한테 자문했어요. 어르신들이 ‘너희 아버지가 OO이 안 죽였어 그러시는 거예요. 아버지 군법회의 판결문에는 7월10일 OO을 살해했다고 나오는데 OO씨는 9월에 죽었다는 거예요.

아버지한테 살해당한 걸로 나오는 그분 가족을 추적했어요. 고향을 떠났더라고요. 부여군 홍산리에서 큰 따님을 찾아냈어요. 6.25 당시에 스무살이었대요. 처음에는 집을 찾아갔다가 두 번을 그냥 왔어요. 용기가 안 나더라고요. 제 눈으로 안 봤으니까요. 정말 아버지가 진짜 그분을 죽였으면 어떡하나 그 생각 때문에요. 이의신청 기한을 얼마 안 남기고 세 번째 찾아가 마침내 만났지요.

제가 ‘선동(시초면 선동리) 사람’이라고 했더니 ‘뉘 집 딸이냐’고 하셨고, 아버지 이름을 대니 제 손을 꼭 잡으면서 ‘정말이냐’고 하더라고요. 군법회의 판결문 내용을 이야기해 드렸어요. 이 분이 연세가 80이셨는데 판결문에 적힌 한자를 읽어내려가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여. 누가 이런 걸 썼디야’ 그래요.

그분 아버지는 1950년 9월28일 좌익세력에 의해 서천등기소에서 불타 돌아가셨대요.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우익인사 250여명을 가둬놓고 불 지르고 간 사건이에요(이 사건은 ‘좌익에 의한 서천등기소 창고 집단희생 사건’으로 1기 진실화해위에서 진실 규명됐다) 본인 아버지 돌아가신 상황을 이야기해요. 아버지 금니까지 찾아 장례도 치러줬대요. 결국 이 분이 증언을 서서 진실화해위 진실규명과 함께 재심 무죄도 받은 거예요. 무죄는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에서 받았어요. 검찰은 항소하지 않았어요.”

2010년 10월29일 육군본부 계룡대에서 찾은 아버지의 판결문. 육군본부 중앙고등군법회의는 “피고인 전재흥이 괴뢰에 가담하여 우익인사 라OO을 체포·살해케 하는 등 이적행위를 감행하였다”며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사형을 선고했고, 그로부터 보름여 뒤 형을 집행했다. 전미경 제공

# 시

“국민학교 4학년 때 한글 깨치면서부터 공책에 시를 썼어요. 아버지 어머니 없이 지내면서 억울한 꼴 당하거나 하면 아버지 돌아오실 때 이르려고요. 아버지한테 그 사람들 때려달라고 하려고요. 1983년 어머니한테 아버지가 돌아가신 사실 확인하고 나서는 필요가 없어졌어요. 나중에 그 공책들 다 불 질러 태워버렸어요. 아버지도 없는데 이거 뭣 하러 가지고 있나 싶었지요. 원수 갚을 일도 없으니까요. 기억을 떠올려 그때 쓴 시들을 옮겨놓은 것도 있고 다시 쓴 것도 있어요. 2017년에 ‘진실을 노래하라’(인권평화연구소)라는 제목으로 시집을 냈거든요. 시를 정식으로 배운 거는 아니지요. 느낌이 올 때 그냥 써내려간 거예요. 시낭송도 많이 다녔어요. 전국 각지의 위령제 때 시낭송해달라는 섭외가 오면 대부분 응했어요. 그 지역에서 사건 보고서를 보내주거든요. 그걸 쫙 읽어보고 제목을 컴퓨터에 적은 뒤 30분이면 그냥 써버려요. 쓰고 나면 컴퓨터 책상이 눈물바다가 되는 거예요.

스산한 가을바람

앙상한 가로수 휘몰아쳐

마지막 잎새 떨쳐 버리던

2010년 10월29일

계룡대 육군본부 민원실

아비 죽어 오십 팔년

가슴 저린 세월

고등군법회의 사형이란

판결문 받아들고 망연자실

하늘인지 땅인지 깜깜절벽

피눈물 뚝뚝 흘리며

돌아서는 불효 여식

인권은 간 곳 없고

일 열은 사형 이 열은 무기

사형은 무엇이고

무기는 무엇인지

뜻이나 알고 한일자로 찢어진

그것을 놀렸더냐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러

한반도 골짜기마다

유골밭으로 만들어놓고

동작동에서 현충원에서

저들은 저리도 당당한가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

죽은 자 뼈를 갈아

아버님 영전에 바치고

산 자 정의와 진실이란 이름 앞에

두 무릎 꿇리지 않고는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

이건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라는 제목의 시예요. 2010년 10월29일 육군본부 계룡대에서 아버지의 판결자료를 찾던 날 썼어요. 이날 이후 저는 ‘전미경’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어요. 본래 아버지가 지어놓은 이름으로 개명한 거죠. 제가 5살 되던 해, 할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면사무소에 출생신고를 대신 해주러 간 동네 이장님이 ’미경’이라는 이름을 들어놓고 잊어먹었대요. 영자와 숙자가 흔한 이름이던 때였죠. 그때 ‘숙자’가 되었어요. 그리고 환갑이 넘어서야 본래 이름을 찾았어요.”

2017년 전미경 회장이 낸 시집 ‘진실을 노래하라’. 이전에 쓰던 전숙자라는 이름으로 냈다.

# 유족들도 정신차리자

“사과받아야죠. 국가의 사과를 받아야죠. 가해자도 처벌해야 해요. 물론 대부분 세상을 떠났겠죠. 현충원 재정비해야 해요. 민간인 학살에 책임 있는 이승만이 서울 국립현충원에 있어도 되나요? 특무대장했던 김창룡이 대전현충원 꼭대기에 있어도 되나요? 파묘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학살 현장에서 진두지휘한 사람은 죽어서도 응분의 대가를 받아야 해요. 그 사람들 거기 계속 둘 거예요?

디엔에이(DNA)검사도 빨리해서 유해 신원도 확인되었으면 좋겠어요. 지금 세종 추모의 집에 3700기가 있잖아요. 그중에 골령골 유해가 1441기고요. 그분들 모두 골령골에 짓는 위령 시설에 다 모셔오기로 했는데, 2024년에 위령 시설과 평화공원 짓겠다고 해놓고 계속 미뤄지는 중이죠. 2026년에는 준공이 된다는데 그것도 지켜봐야죠. 땅값 상승으로 소요예산이 500억원을 넘어섰대요. 아직 부지매입도 완료되지 못한 상태잖아요. 총 사업비가 500억원을 넘으면 예비타당성 조사를 한다는데, 그게 말이 되나요? 아니 국가 과실로 인해 돌아가신 분들 74년 지나도록 영면을 못 해서 짓는 추모시설인데, 무슨 예비타당성 조사냐고요. 공원에서 입장권 팔 일 있나요? 아니잖아요.

지난 4일 대전 산내사건 피학살자 유족회를 방문한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전미경 회장. 이날 전 회장은 ‘부역몰이’를 하지 말라고 김 위원장에게 경고했다고 한다. 오마이뉴스 제공

유족회가 300개가 넘어요. 위령제 모시는 날도 한두 날이 아니잖아요. 우르르 이리 쫓아다니고 저리 쫓아다니고 이것도 문제라고 봐요. 국가에서 아예 국가 공휴일로 하루를 정해서 민간인 피학살자 위령의 날을 정해주고, 또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교과서에 기재해야 합니다. 국가에서 바로잡아줘야죠. 이거 어려운 문제인가요? 맞아요, 어려운 문제죠. 김광동 같은 사람이 진실화해위 위원장으로 있으니까요.

지난 4일에 김광동 위원장이 여기 산내사건 피학살자 유족회 사무실에 왔어요. 골령골에 처음 왔다죠. 일부 유족들이 흥분해서 항의를 해 말리느라고 힘들었어요. 진실화해위 직원이 쪽지에 ‘중재 좀 해달라’고 써서 보내기도 했어요. 계란을 던지겠다는 분들도 있었으니까요. 그 책임은 김광동 위원장한테 있죠. 저도 김광동 위원장에게 ‘돌아가신 분들한테 부역자 낙인 찍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어요. 유족회도 정신 차려야 해요. 지금 김광동 위원장이 저러고 있는데 전국 조직의 회장이란 사람들이 총대를 메고 책임 있게 일해야지요. 김광동 위원장, 이옥남 상임위원만 보면 정신 못 차리고 사진 찍으려고 난리 치는 유족회장님들 몇 분 계세요. 창피해서 같이 못 다닐 지경이에요.”

대전 동구 낭월동 골령골로 들어가는 입구. 고경태 기자

# 김광동 위원장에게

전미경 회장은 목소리가 굵고 발성이 좋았다. 이야기 솜씨도 청산유수였는데, 거기에 충청도 사투리가 곁들여지니 그 맛이 특별했다. 인터뷰 중 질문을 던지고 답을 들을 때면 연극배우의 독백을 듣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특히 어린 나이에 인생의 방패막이가 하나도 없이 겪어야 했던 아픔의 순간 순간들은 비극적이면서도 서정적이었다. 가령 할아버지 똥 빨래를 하다 늦게 학교에 가 대나무 회초리를 맞고 굽혀지지 않는 손가락을 집 장독대 위 소복이 쌓인 눈속에 집어넣었다는 이야기는 영화의 아름다운 한 장면 같았다. 얼굴 제대로 한 번 본 적 없음에도, 전 회장은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한때는 골령골에 자리한 유족회 사무실에서 생활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유족회 회의 등이 있을 때만 사무실을 찾는다. 부여미용실에서는 일주일에 며칠만 날을 잡아 손님을 받는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 한창 유해발굴을 할 때는 유족회 사무실에 발굴된 유해를 모셔놓고 잠을 잘 때가 많았다. 자다가도 중간에 수시로 깨어 얼마나 말랐는지 살펴보고 선풍기 바람을 조절했다. 밤에는 대전의 택시 운전사들이 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골령골의 가장 깊은 곳에서 해골들을 모셔놓고 그 안에서 잠을 청해도 무섭기는커녕 오히려 든든했다고 한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동료들이 지켜준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14일 한겨레와 만나 인터뷰를 마친 뒤 포즈를 취한 전미경 회장. 고경태 기자

“여기가 청정수예요. 다슬기도 많은데, 절대 잡지 말자고 해요. 이 골령골에 있는 생명체는 죽이지 말자고요. 고라니를 만나 아버지를 떠올린 일도 너무 감사하죠.” 전미경 회장의 마지막 꿈은 골령골에 위령 시설과 평화공원이 어서 들어서는 것이다. 그는 ‘영면’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진실규명 결정’, ‘국가의 사과’라는 말도. 현재 전미경 회장이 2기 진실화해위에 직접 접수시킨 유족회원들의 진실규명 신청서는 60여장이지만,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경우는 딱 1건이다.

전미경 회장, 아니 전미경 시인에게 요즘 민간인 피학살자 유족들의 바람을 한 편의 시로 표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선선히 응했다. 15일 아침, 그가 문자메시지로 시를 보내왔다.

피묻은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돌아 74년

안개 짙은 골령골

까마귀 몸을 빌어 울부짖는

구천을 떠도는 원혼들

가해자 처벌 없고 정부의 사과 없는

절름발이 과거사 청산

진실과 화해

무엇이 진실이고 화해는 무엇인가

사방천지 돌아봐도 인권은 간 곳 없고

아비 없는 세상살이

연좌제 올가미 쓰고 지나온 세월

내딛는 자국마다

피눈물 고인 사연은 넣어두더라도

74년 만의 추모공원

국회를 통과한 지 여덟번의 해가 바뀌어도

정치인들 발길에

이리 차이고 저리 차여

속절없이 떠밀려가는 준공연도

진실화해위원장님

내 말 좀 들어보소

유족들 앞에서는 꿀맛 같은 립서비스 사탕발림

돌아서면 함흥차사

당신의 말 한마디 울고 웃으며

오늘일까 내일일까

저 높은 서울 하늘 바라보며

결정문 오기만 기다리다 지쳐서

자고 새면 울리는 전화벨 소리는

하늘나라 가셨다는 부음 소식뿐이라오

2024년 3월15일 새벽 2시

대전 산내 피학살자 유족회장 전미경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대전 동구 낭월동 산내 사건 피학살자 유족회 사무실에 방문자들이 써놓고 간 글들이 붙어 있었다. 고경태 기자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