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범벅 화장품 쓰다 탈모까지 온 처녀왕…‘하얀 얼굴’ 탐욕이 부른 저주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4. 3. 23.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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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품의 역사는 미를 향한 인류의 욕망을 보여준다. 1926년 멕시코시티에서 사용되던 파우더. [사진출처 kissproof]
[사색-62] “당장 이 거울 치워”

거울 앞에 설 때면 그녀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천연두를 앓은 흔적이 얼굴에 곳곳에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의 얼굴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지요.

모든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녀의 흉터를 가리기 위해서. 당대의 가장 진귀한 화장품을 모두 사용했고, 잘 때도 화장을 지우는 법이 없었습니다. 행여 누가 볼까 싶어서였습니다.

가릴수록 얼굴의 상태는 더욱 악화해 갔습니다. 그녀가 살던 16세기 잉글랜드에서는 ‘화장품’이 사실 독성으로 가득한 제품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얼굴에 바르는 ‘백연’이었습니다. 납성분으로 가득한 상품이었지요.

입술을 붉게 하기 위해서는 ‘진사’라는 광물을 바르곤 했었는데, 이 역시 수은이 다량 함유돼 있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 제품의 심각성을 당대 사람들이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겠지요. 잠깐 예쁘게 보이기 위해 피부에 독을 바른 셈이었습니다. 대영제국의 기틀을 닦은 엘리자베스 1세의 이야기입니다. 제국을 일군 그녀였지만 ‘미(美)’라는 본질적 욕망을 충족하지 못한 불행한 왕이기도 했습니다.

대관식 당시 엘리자베스.
‘화장’은 인류의 역사에 많은 자국을 남겼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에게도 그랬겠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도 ‘미’라는 건 굉장히 중요한 가치입니다. 우리나라 ‘뷰티’ 제품 시장은 약 16조원. 세계 1위 미국에서는 100조원을 넘어서지요. 꽃이 점점 피기 시작하는 오늘날 ‘화장의 역사’를 돌아봅니다.
인류의 역사는 미의 역사
인류는 어쩌면 날 때부터 아름다움의 노예였을지도 모릅니다. 미를 향한 욕망이 태곳적부터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최근 이란 남동부 지역에서 고대인들이 사용하던 ‘립스틱’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무려 기원전 2000년 전 것이었습니다. 지금부터 4000년 전에도 인류가 화장했다는 증거입니다(현대 이란 여성들에게 화장이 금지돼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 그 자체입니다).

고대 이집트의 화장품 상자와 그 구성물.
이보다 전부터 화장품을 사용한 기록은 차고 넘칩니다. 고대 이집트가 증거입니다. 파라오들은 황토색 기름을 발라 피부를 가꿨습니다. 검은 미묵을 눈에 칠해 물고기 형태로 늘어뜨리기도 했었지요. 우리에게 유명한 클레오파트라도 이와 같은 칠흑의 눈을 가지고 있었지요.
고대 이집트 제18왕조 여왕 네페르티티 흉상. 화장한 눈매가 인상적이다. 기원전 1320년 작품.[사진출처 Philip Pikart]
남들과는 다른 모습을 통해 왕의 위엄을 드러내고자 함이었습니다. 이집트의 영향 때문인지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여성들도 눈화장을 자주 하곤 했습니다. 귀족 여성들의 무덤에 고대 화장품이 껴묻거리로 발견되었지요.
화장에 저항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그러나 막을 순 없었다
지중해를 건너 그리스로 넘어갑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처음부터 화장을 환영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외려 자연스러운 신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했었지요. 인위적인 화장은 자연스레 배척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미적 유행은 들불과도 같은 것이어서 한번 퍼지면 막기가 힘들어집니다. 점점 많은 여성이 화장하기 시작하고, 그리스에 ‘화장술’은 크게 유행합니다.

로마 향수병과 눈화장품 용기. [사진출처=Dave Margie Hill Klee up]
화장술이 유행하면서 그리스 사람들은 이를 ‘장식’이라는 의미의 ‘코스메틱’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 화장품을 뜻하는 ‘코스메틱’이 그리스인들로부터 나온 언어였지요.

그리스를 계승한 고대 로마에서도 ‘화장’이 천대받은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의 남성들은 화장을 ‘lenocinium’(레노시니움)이라고 불렀습니다. ‘매춘’과 ‘화장’을 뜻했지요. 화장은 매춘부나 하는 것이라 폄훼한 셈이었습니다.

고대 로마에서 화장은 매춘과 동일한 용어로 불렸다. 매춘부가 하는 행위라는 이유에서였다. 사진은 폼페이에서 발견된 프레스코화. 매춘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고대 로마도 그리스의 전처를 따랐습니다. 여성들 사이에서 화장이 크게 유행하면서였습니다. 우리에게 유명한 네로 황제의 아내는 아침 화장을 위해 100명의 노예를 동원했다는 기록이 전해질 정도입니다. 귀족층에서 유행한 화장이 일반 시민들에게로 퍼지는 건 시간문제였지요.
화장을 저주한 초기 기독교
“악마는 작위적인 것을 좋아한다”

기독교가 4세기에 공인되면서 화장 역시 탄압받기 시작합니다. 꾸밈없는 인간 그대로의 모습이 신의 섭리라는 논리가 자리 잡으면서였습니다. 악마는 작위적인 것을 좋아하고, 화장은 인위적인 상태를 의미한다는 저주가 이어졌습니다.

화장은 죄악의 일종이라네. 초기 기독교 신학자인 테르툴리아누스.
3세기 로마의 신학인 테르툴리아누스는 ‘여자들의 패션(De cultu feminarum)’이란 책에서 이런 ‘저주’를 퍼붓습니다. “피부를 약품으로 짓누르고, 볼을 붉은 빛으로 더럽히고, 눈을 검은 빛으로 잡아 늘이는 건 신께 죄를 짓는 것이다”.

4세기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였던 그레고리우스는 아주 조금 고삐를 풀어주기도 했습니다. “남편감을 찾는 적령기 여성들이 흉터와 같은 결점을 가릴 때만 화장이 허용된다.”

르네상스와 함께 화장도 부활하다
마침내 찾아온 르네상스. 신을 섬기되 인간의 육체적 아름다움을 찬미하던 시기입니다. 자연스레 화장도 다시 주목 받기 시작합니다.

로마제국의 여인들이 쓰던 화장품과 미용법이 여인들 사이에서 공유되기 시작하지요. 특히 15세기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하면서 전파는 더욱 빨라집니다. 오늘날 인스타그램에서 ‘화장 꿀팁’이 전수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르네상스 시절 유럽에서는 하얗고 창백한 피부가 유행했다. 그림은 루카스 크라나흐의 ‘아폴로와 다이애나’.
하얗고 붉은 입술은 미의 표준이었다. 르네상스 화가 얀 고사르트의 마돈나 앤 차일드.
이 시기 ‘화장법’에 관한 책을 써 귀부인들의 주목을 받은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노스트라다무스였습니다. 그는 고대 로마에서 전해 내려온 화장법을 중세 유럽의 상황에 맞게 재구성합니다. 노스트라다무스를 신임하던 프랑스의 여왕 카트린 드 메디시스나 이탈리아의 스포르차 공작 부인같은 이들이 이를 통해 화장을 배웠다는 일화도 전해지지요.
“제가 예언만 잘하는 게 아니라 피부 관리에도 조예가 깊은 편입니다.” 노스트라다무스
이제 화장의 시대가 막을 엽니다. 유럽의 귀부인이라면 누구나 하나같이 허옇게 뜬 얼굴에 빨간색 입술을 가져야 했습니다. 일부러 피를 뽑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얼굴의 창백함을 더하고자 함이었습니다.
하얀 얼굴의 저주가 시작되다
‘미’를 향한 지나친 욕망은 결국 사달을 내기 마련입니다. 당시 쓰던 화장품은 결코 오늘날처럼 건강하고 안전한 제품이 아니었습니다. 얼굴을 하얗게 만들어주는 ‘백연’은 납으로 오염돼 있었지요.

이를 지울 때도 수은을 사용했습니다. 수은과 납 성분이 계속해서 피부를 괴사시키고 있었지만, 여인들은 이를 가리고자 화장을 더 두텁게 했었지요. 악순환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엘리자베스 1세. 아직은 수수한 모습
대표적인 인물이 앞서 말한 잉글랜드 엘리자베스 1세였습니다. 그녀는 ‘처녀왕’이었기에 아름다움과 미를 잃어서는 안 되었지요. 그녀의 열망과는 다르게 얼굴은 점점 괴사하고 있었고, 수은과 납 중독의 영향으로 탈모까지 생겼습니다. 그녀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결코 가발을 벗지 않았지요.
엘리자베스 1세 통치 후기인 1595년 초상화.
그녀는 자신의 초상을 많이 남겼지만, 물론 본 모습을 그리지는 못했습니다. 잉글랜드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으로 그리도록 여러 번 지시합니다. 흉터는 당연히 지워져야 했고, 얼굴은 뽀얗고 위엄이 넘쳐야 했습니다. 오늘날 인스타그램 필터처럼요. 그림 속 엘리자베스는 위엄있는 군주 그 자체였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죽음···어쩌면 화장?
1603년 3월 그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69세의 나이였습니다. 사인은 불명입니다. 당시에는 군주의 부검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후대 학자들은 그녀가 납 화장품의 과다사용으로 인한 패혈증으로 죽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폴 들라로슈가 후대인 1828년에 묘사한 ‘엘리자베스의 죽음’.
‘미’를 향한 추구가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해석입니다. 그녀의 시녀인 사우스웰은 그녀를 보관한 관이 폭발했다고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독성이 가득한 화장품으로 인해 체내에 유독가스가 많이 축적돼 있었다는 해석도 나왔지요(근거가 없는 이야기라고 일축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살을 먹는 가루로 불린 대한민국 최초 화장품
화장품이 ‘화’(過)를 부른 건 유럽 역사에서만 있는 일은 아닙니다. 이땅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한국 최초 브랜드 화장품인 ‘박가분’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하얀 얼굴을 미의 척도로 여겼습니다. 신라시대에는 쌀을 찧어서 만든 가루를 발랐다고 전해질 정도입니다.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화장품 브랜드가 생겨났습니다. 1916년 ‘박가분’의 등장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 브랜드 화장품 박가분. [사진출처=대전시립박물관]
얼굴을 뽀얗게 만들어준다는 입소문이 퍼지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하루에 1만갑이 팔렸을 정도였지요. 그런데 1930년대 일부 사용자의 피부가 괴사하는 부작용이 발생했습니다.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납 중독 현상이었습니다. 박가분이 납으로 만들어졌던 것이지요.

1937년 ‘박가분’은 결국 폐기처분 되고 말았습니다. ‘살을 먹는 가루’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였습니다.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났던 일이 300년이란 시차를 두고 조선 땅에서 재발했던 것입니다.

1889년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의 그림. 화장하는 여인을 묘사했다.
<네줄요약>

ㅇ인류의 미에 대한 열망은 태곳적부터 존재했다.

ㅇ기원전 4000년 전부터 이미 여러 화장품들이 존재한 이유다.

ㅇ중세 유럽,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서는 ‘납’ 성분 화장품이 미백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ㅇ독자 여러분은 충분히 아름다우십니다.

<참고문헌>

ㅇ도미니크 파퀘, 화장술의 역사-거울아거울아, 시공디스커버리,1998년

ㅇ히데오 아오키, 서양화장문화사, 동서교류,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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