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과 이재명, '냉혈한 진보'의 신세계

서어리 기자 2024. 3. 23.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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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패륜 공천' 민주당

'민주당 조수진'이 숱한 논란을 남기고 사흘 만에 후보직을 내려놓았다. 그는 과거 블로그에 성범죄 피해자들을 위축시키는 '강간 통념'을 적극 활용하라며 성범죄 가해자들에게 '꿀팁'을 전수하는 글을 올리고, 재판정에서는 성범죄 피해자를 향해 공격적 발언을 하기도 했던 사실이 알려져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다. 오죽하면 언론지상에서는 "패륜적 변론"(22일 <국민일보>)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는 후보직 사퇴의 변에서 "저는 변호사로서 언제나 의뢰인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변명했다. 그리고 "국민들께서 바라는 눈높이와는 달랐던 것 같다"고 자신에 대한 논란을 평가했다. 이것이 다였다. 자신이 맡은 성범죄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관련기사 : 조수진, 공천 사흘만에 자진사퇴…"국민 눈높이와 달랐다")

국민들은 사과가 쏙 빠진 이 공허한 글귀들 사이에서 인간다움의 상실을 목격했다. 국민들은 조수진에게 변론의 위법성을 지적한 것이 아니었다. 초등학생 성폭행 피해자에게 "처녀막이 상당히 파열되고 성병까지 옮을 정도로 많은 성관계를 가진 다음 이를 은폐하기 위해 3년 전에 그만둔 태권도학원 원장에게 덮어씌우려 했다"고, "아버지 등 다른 성인으로부터 피해를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변론한 데 대해 '같은 인간으로서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물은 것이었다.

그의 ('사과문'이 아닌) '입장문'에는 변호사 조수진, 국회의원 후보 조수진이 아닌 인간 조수진으로서의 유감 표명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국민의 기대를 저버렸다. "국회의원이 아니라 인간이 되라"는 어느 군소정당의 일갈을 떠올리게 한다.

민주당에서도 사과 한 마디가 없다. 후보가 사퇴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는 반응이다. 이번에도 '내로남불'이다. 민주당은 정부의 '인사 참사'가 불거질 때마다 대통령을 향해 '대국민 사과'와 '당사자 사퇴'를 한 덩어리로 요구해 왔다. 문제적 인물을 임명한 대통령에게 최종 책임이 있기 때문이라는 논리였다. 타당한 요구였다. 마찬가지로 조수진을 공천한 것은 민주당이다. 공당이고, 더욱이 수권정당 경험을 해본 당이라면 그 책임의 무게를 결코 모르지 않을 터이다. 그런데도 사과를 피해 다니며 '공천 참사'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민주당은 조수진에 대한 부실 검증을 인정하면서도 '시간 부족'을 핑계로 이해해달라고 한다. 국민이, 특히 서울 강북을 주민들이 민주당의 그런 사정을 이해해줘야 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시간은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어느 지역구 후보나 동등하게 2달여의 충분한 검증 시간이 주어졌다. 유독 서울 강북을만 시간이 부족했다면 그건 민주당이 공천·경선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이다.

조수진에 앞서 서울 강북을 후보였던 정봉주는 막말 논란으로 낙마했다. 'DMZ에서 발목 지뢰를 밟으면 목발 경품을 주라'던 발언을 비롯한 그의 거친 언사는 이번에 처음 알려진 것도 아니었다. 인터넷 검색 한 번이면 되는 걸 검증위도 공관위도 거르지 못했다. 거르지 못한 것인지, 거르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뭐가 됐든 문제다. 심지어 그의 '미투' 논란과 가정폭력 전과는 사퇴 사유조차 되지 못했다. 그렇게 수준 미달의 후보자를 경선에 올려 결국 후보 교체 사태를 초래한 것은 민주당이다. 시간 부족은 핑곗거리가 되지 못한다.

연이은 공천 참사에 대해 이재명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가 충분히 사과하지 않는다면, 민주당은 앞으로 정부에 '인사 참사'를 운운할 자격이 없다. '목발 경품' 막말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초등학생을 성폭행한 가해자가 아버지일 가능성이 있다'고 필요 이상으로 피해자와 그의 가족 상처를 후벼파는 변호사가 민주당 후보로 나선 데 대해 국민은 깊은 충격을 받았다. 유권자들은 패륜 후보들로부터 받은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민주당에 사과를 받을 권리가 있다. 서울 강북을 유권자들은 더더욱.

이재명 대표가 사과해야 할 대상은 또 있다. 조수진·정봉주와 연거푸 경선을 치렀다가 결국 배제된 박용진이다. 이 대표는 지난 19일 강북을 전략경선에서 박용진이 탈락하자, 이례적으로 유세 현장에서 후보자 득표율을 공개했다. 중앙당선거관리위원회는 "공개할 수 없다"고 하는데도 말이다. 진짜 문제는 그 다음이다. 현장에 있던 지지자들이 환호하자 이 대표는 "왜 '와(라고)' 하세요? 진 사람도 있는데"라며 웃었다. 박용진의 패배에 지지자들이 왜 환호하는지 뻔히 알 텐데도 이를 굳이 되물으며 패배자의 존재를 언급하는 것은 모욕주기 의도가 아닌지 강하게 의심된다. (☞관련기사 : 당 선관위도 공개하지 않았는데…이재명, 박용진 득표율 직접 공개)

김부겸 전 국무총리가 선대위 합류 일성으로 "따뜻한 통합"을 강조했듯이, 공천 탈락자들의 아픔을 어루만져도 모자랄 판이다. 그런데 오히려 탈락의 상처를 헤집고 조롱하는 당 대표라니. 정치인으로서 바람직한 모습, 품격을 운운하기 전에 인간다움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한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에 어그러지는 것'을 패륜이라고 부른다(표준국어대사전). '패륜 공천'도 모자라 스스로 패륜에 가까운 행태를 보이는 제1당 대표를 유권자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지난 민주당 정권의 슬로건은 '사람이 먼저다'였다. 민주당은 전통적으로 인간애, 휴머니즘이 퍽 잘 어울렸던 당이었다. 그래서 '사람이 먼저다'는 국민의 가슴에 와닿는 구호였고, 민주당은 국민의 선택을 받았다. 지난 정권 시기 정부·여당이 이 슬로건에 충실했는지는 차치하고, 지금의 민주당은 구두선에 그칠 인간애마저 도무지 보이질 않는다. 따뜻한 진보에서 차가운 진보를 뛰어넘어 '냉혈한 진보'로 탈바꿈해 버렸다. 그리고 유권자들에게 이 형용모순을 견뎌보라 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애정 없이 진보가 꽃필 리 만무하다. 따뜻한 진보로 돌아가라. 총선 승리보다 시급한 민주당의 과제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22일 오후 충남 당진시 당진시장을 방문해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어리 기자(naeori@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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